광랑 이그넬
"이그넬, 오늘따라 왜 이렇게 죽자고 덤벼?"
이그렐이 한숨을 내쉬며 이그넬에게 말했다.
바닥에서 몇 번은 굴렀는지 몰골이 엉망인 그녀와 달리, 이그렐은 땀도 별로 흘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그넬이 그런 그를 잔뜩 심술이 난 얼굴로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들었다.
가볍게 날아드는 주먹을 피한 이그렐이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다시금 바닥에 내리꽂았다.
"여전히 의도가 뻔히 보인다니까, 네 공격은. 좀 상대의 생각을 짐작하면서 싸워보라고."
"이익······."
"이제 그만하고 가자. 비크 씨가 간만에 붉은뿔 물소를 사냥해왔잖아? 늦게 갔다간 맛있는 부위는 하나도 안 남아있을 거라고."
이그렐이 어깨를 누른 손을 떼는 순간, 득달같이 몸을 일으킨 이그넬이 머리채를 콱 붙잡았다.
둘은 잠시 바닥에 엉켜 뒹굴었다.
"이게 진짜!"
끈질기게 머리를 잡고 놓지 않는 그녀를 이그렐이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낑낑대며 몸을 일으킨 이그넬이 질리지도 않고 다시 덤벼들려다가, 산발이 된 이그렐의 머리칼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꼴 좀 봐! 푸하핫!"
"······재밌냐?"
이그렐이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이그넬의 시원한 웃음소리에 같이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젠장. 웃으니까 온몸이 쑤셔. 야무지게도 두들겨맞았네."
이그넬이 지쳐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그렐은 그 옆에 주저앉았다.
"이걸로 305전 305승이다. 넌 305전 305패고. 언제쯤 한 번을 이길래?"
"시끄러. 넌 투신의 혼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렇게 강한 거잖아."
"언제는 그딴 미신 안 믿는다며?"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그넬이 물었다.
"야, 이그렐. 어제 족장님한테 불려가서 무슨 얘기 들은 거냐?"
"별 얘기 안 들었다니까 그러네."
"다른 사람들은 속여도 나는 절대로 못 속이지. 형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빤히 쳐다보는 이그넬의 눈빛에, 이그렐은 못 이기겠다는 듯 웃고는 대답했다.
"아아, 그래. 알겠어. 어차피 짐작하고 있었잖아? 차기 대족장 자리는 내게 물려주기로 거의 마음을 정했다고 언질해주셨어."
"흐응······."
"싱거운 반응이네. 형제가 대수림의 모든 수인들의 우두머리가 될지도 모른다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그렐은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부족의 그 누구보다도 승부욕이 강한 이그넬이었다.
형제인 자신이 바로 곁에 있으니 입으로 말한 적은 없어도, 그녀가 대족장 자리에 관심이 없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대족장이란, 대수림의 모든 수인들 중 가장 강한 전사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이그넬이 코웃음을 쳤다.
"우쭐대지 말라고, 이그렐."
"······?"
"대족장? 난 그런 자리 따위 별로 관심도 없어. 대족장은 네가 되더라도, 이 대수림 최강의 전사는 언젠가 내가 될 거니까."
이그렐이 허, 하고 김빠진 탄성을 흘렸다.
"가능하겠어? 너가 강해질 동안 나는 놀고만 있는 게 아닌데."
"물론이지. 그럼 약속할까? 내가 언젠가 대수림 최강의 전사가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네 누이다. 건방지게 굴지 말고 깍듯하게 대해라."
이그렐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둘의 손위 관계를 굳이 따지자면, 이그렐이 이그넬보다 몇 분 일찍 태어났다.
물론 이그넬이 지금껏 그를 오라비 대접해준 적은 없었다.
"약속을 못 지키면 너는 뭘 할 건데?"
"엉? 그딴 건 없어. 기한은 내가 죽기 전까지니까."
"하여튼 제멋대로구만."
이그렐은 혀를 찼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이다. 대족장은 내가 되고, 대수림 최강의 전사는 언젠가 이그넬 네가 되는 거다."
두 형제가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었다.
***
쾅! 콰앙!
공격을 막을 때마다 울려퍼지는 폭음.
나는 쉴 틈 없이 날아드는 광랑의 주먹을 막거나, 쳐내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이그렐의 육체가 아니라 내 본래의 육체였다면 뼈까지 가루로 분쇄됐을 것이다.
'이 자식, 눈 돌아갔잖아?'
광랑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는 괴수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본래 이그렐의 힘이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신비의 유지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는 중이고, 아까 포그위그를 쓰러뜨린 일격으로 몸에 힘이 상당히 빠져나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무엇보다도 날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지금 나의 정신 상태였다.
광랑을 굳이 맨몸으로 상대해주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아까처럼 공간 도약으로 피하거나 부동 장막으로 막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난 왜 이러고 있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난감함이나 당혹스러움보다도, 흥분과 고양감이었다.
주먹을 막을 때마다 몸에 울리는 충격이 상쾌했다.
이렇게 막고만 있을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반격해서 광랑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아니라 이그렐이다.
지금 내 의식과 동화되어있는 이그렐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해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싸움을 원하고 있다는 걸.
"이그넬, 뭘 하는 거냐!"
그때 광랑의 공격이 잠시 멈추었다.
대족장을 포함한 다른 수인들이 발광하는 광랑의 앞을 일단 막아서고 나섰기 때문이다.
"꺼져, 이 늙은이들아! 방해하지 말라고!"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다들 비켜라. 그녀를 막지 마."
내게 시선을 돌린 수인들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힘겹게 전투를 끝내고 이건 또 뭔 난리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대족장은 광랑과 나 사이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모두 비켜서라."
그렇게 방해꾼은 모두 사라졌다.
나는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광랑에게, 손을 까닥였다.
"어디 마음껏 덤벼봐라."
이그렐이 힘을 빌려준 덕분에 포그위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게 그의 마지막 바람이라면 들어줘야겠지.
내 말에 입고리가 찢어져라 웃은 광랑이 돌진했다.
"그렇게 나와야지!"
콰아앙!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다른 광랑이 주먹을 내뻗었다.
나도 주먹으로 마주 받아쳤다.
묵직한 충격이 팔을 타고 흘렀다.
광랑이 팔을 굽히며 한 걸음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측면에서 날아드는 반대 손. 주먹이 아닌 펼친 채다.
노골적으로 어깻죽지를 붙잡으려는 손을 팔꿈치를 들어올려 쳐냈다.
양손 공격이 모두 막히니 이어서 박치기가 날아들었고, 나는 뒤쪽으로 몸을 눕히며 무릎을 차올렸다.
허공에 튀어오르는 핏물.
아슬아슬하게 턱끝을 스쳐 맞은 광랑이 그제야 뒤로 물러나서 고개를 털었다.
눈 한 번 깜빡일 사이에 이루어진 한 차례의 공방이었다.
턱에 묻은 피를 핡은 광랑이 다시 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도 정면. 하지만 움직임이 더 다채로웠다.
페이크를 주듯,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경로가 공격 도중에 난잡하게 휘어 눈을 어지럽혔다.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육체는 보편적인 물리 법칙은 쉽게 거슬렀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주먹질 하나에도 수많은 묘리가 담겨있다.
공방이 지속되고, 이그렐의 시야로 싸우며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콰앙!
주먹이 교차하며 서로의 얼굴을 후려쳤다.
나와 광랑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가, 곧장 다시 맞붙었다.
나는 광랑의 공격을 눈으로 쫓으며 과감하게 반격했다.
막고, 흘리고, 일부러 타격을 허용한 뒤에 더 큰 공격으로 받아치기도 했다.
종아리로 날아든 로우킥. 곧장 반대쪽 발로 똑같이 반격했다.
이어서 가슴팍을 노린 주먹. 그녀의 복부에 마주 주먹을 꽂아서 돌려줬다.
"키학······!"
헛숨을 들이킨 건지, 아니면 웃는 건지 모를 괴상한 소리를 낸 광랑이 날 몸으로 들이받아서 밀쳐냈다.
다시 한 번 가속해서 들이받으려는 광랑을, 나는 발을 뒤로 빼고서 중심을 고정한 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위로 처올려 던져버렸다.
그녀는 날아가는 경로에 있는 나무를 몇 그루나 부숴버리다가 바위에 처박혀서 간신히 멈췄다.
"하! 흐학!"
이번에는 명백한 웃음소리였다.
광랑이 폭소하며 자신의 몸을 깔고 무너진 돌더미들을 쳐내고 일어냈다.
나는 입에 고인 핏물을 퉤 뱉고서 뻐근한 고개를 돌렸다.
육체 능력의 수준은 내가 지쳐서 비슷해도, 전투의 감각이라거나 다른 모든 면은 기본적으로 이그렐이 광랑을 훨씬 상회했다.
그렇기에 내가 우위를 점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딱히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으니까.
'30초.'
이제 남은 유지 시간은 대략 30초 정도다. 충분할까?
전투의 희열에 그런 생각도 금세 사라졌다.
나도, 광랑도, 물러서거나 거리를 두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마치 사방에 낭떠러지를 둘러싼 채 싸우는 것처럼, 우리의 전투는 오로지 팔을 뻗으면 닿을 지근거리에서만 이루어졌다.
어떠한 무기도, 마법도, 이능력도 없는 순수한 육체와 육체의 싸움.
물론 나도 내가 가진 신비들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
싸우면서 어느 순간부터 광랑의 모습이 다른 형상과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그것이 좀 더 어린 시절의 광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그렐의 기억이다.
안면으로 날아들던 주먹이 도중에 경로를 바꿨다.
나는 멱살을 붙잡으려는 광랑의 손을 잡아챈 상태로, 다시 한 번 그녀의 복부를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의도가 뻔히 보인다니까."
광랑이 킥 웃으며 소리쳤다.
"그럼 이건! 어떤데!"
자세를 낮춘 광랑이 태클 걸듯 하단을 노렸다.
그에 이마를 붙잡고 막으려 했는데, 갑자기 머리를 올려든 광랑이 입을 쩍 벌리고 팔목을 물어뜯었다.
나는 팔을 휘둘러 팔목을 문 그녀를 냅다 반대편 지면으로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산산히 박살난 지면에 꽂힌 광랑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질리지도 않는 체력이었다.
'10초.'
이제 남은 시간은 그 정도뿐이다.
그 뒤면 내 몸에 깃든 이그렐의 힘은 그의 영혼과 함께 깔끔하게 소멸할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핏빛의 마력이 전신에 휘감겼다.
우두커니 서있던 광랑도 입꼬리를 올리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한 듯, 자세를 잡고 천천히 주먹을 내밀었다.
"전력으로 와라.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나와 광랑이 동시에 뛰어들었다.
서로의 주먹이 맞닿고, 힘이 충돌했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이 일대를 뒤덮었다.
"······."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나는 주먹을 거두었다.
마지막 일격과 함께 원래 상태로 돌아온 몸에 힘이 없었다.
이그렐의 혼은 이걸로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탈력감을 느끼며, 저편으로 튕겨 날아간 광랑을 바라봤다.
마지막 순간, 나는 부동 장막을 펼쳐셔 내 몸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광랑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내 힘이 광랑의 힘을 몰아내고 그녀까지 휩쓸어버리기 직전, 이그렐이 힘을 거두어버렸기 때문이다.
숲은 고요했다.
멀찍이 떨어진 채 전투를 지켜보던 수인과 엘프들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쓰러진 광랑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얼마 안 지나서 실눈을 뜬 광랑이 이쪽을 올려다봤다.
"······넌 7군주군."
그녀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서있기도 힘들었다. 광랑이 누운 채로 내게 물었다.
"세계수의 핵으로 뭘 한 거냐?"
나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내가 가진 능력이다. 이그렐의 영혼을 받아들여서, 잠시 그의 힘을 빌렸다."
"이그렐의 영혼은 어떻게 됐지?"
"능력의 대가로 완전히 소멸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슬쩍 광랑의 기색을 살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광랑은 내게 적의나 살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7군주."
잠시 침묵이 흐르고, 광랑이 말했다.
"······고맙다."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그리고 도로 고개를 돌렸다.
폐허가 된 숲에 어느새 일출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