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사 대수림 (5)
광랑의 목소리는 단순히 기분 나쁜 감정을 넘어서 살의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저 살기가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건 알기에 굳이 같이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황제가 대수림 북쪽에서 포그위그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세계수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다. 부활이라기보다는 융합에 가까워 보였지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황제가 대체 어떻게 포그위그를 부활시켰다는 건데?"
"나라고 알겠나? 아무튼 놈은 지금도 세계수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다. 세계수가 목표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속도도 점점 가속하고 있기에 얼마나 빨리 세계수까지 다다를지는 알 수 없다. 그게 설명할 수 있는 현 상황의 전부다."
광랑이 이를 빠득 갈았다. 나는 대족장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지, 대족장. 놈을 막아야 한다. 지금 당장 전력을 집결시켜라."
잠시 침묵하던 대족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두 조용."
그 한마디에 술렁이던 수인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대족장이 쭉 찢어진 동공을 내게 고정했다.
"네 말은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가 너희를 어떻게 믿지?"
"······."
"5군주가 우리를 찾아와서 세인테아의 황제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 말하고, 그 뒤에 곧바로 너희들이 찾아와서 이제 황제가 아데사를 멸망시킬 거라고 하는군. 한데 어찌 미심쩍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야 그렇긴 하겠지. 대족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 상황이 혼란스럽고, 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칼데릭의 군주들이 갑자기 줄줄이 찾아오더니, 뜬금없이 포그위그를 부활시킨 황제가 대수림을 멸망시킬 거라고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이 일이 우리가 꾸민 일이라고 하고 싶은 건가?"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속셈은 있을지도 모르지. 칼데릭과 아데사가 언제부터 이렇게나 가까운 동맹이었던가? 이리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는 쯧 혀를 찼다.
"떠보듯 묻지 마라, 대족장. 아데사가 무너지면 대륙의 세력 구도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 이건 너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대족장이 눈매를 좁혔다.
"그래,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여전히 너희를 신뢰할 근거는 부족하다."
아, 이 새끼가 진짜.
대족장의 입장에선 신중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건 알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에 계속 저렇게 나오니 나도 욱할 수밖에 없었다.
"이봐, 대족장. 이야기를 빙글빙글 돌리지 마라. 그래서 대체 어쩌겠다는 거냐? 지금 당장 북쪽으로 나아가면 우리 말이 사실이라는 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포그위그가 세계수를 향해서 접근해오고 있다는 말이다."
"······."
"너희한테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우리까지 당장 이 자리에서 적으로 만들고 손실된 전력으로 포그위그를 막거나, 아니면 일단 우리를 믿고 협력하여 포그위그를 막거나. 아, 세 가지겠군. 우리가 더 이상 간섭하길 원하지 않는 것뿐이라면 바로 떠나주지. 어차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너희들이니, 너희가 시간을 벌 동안 우리는 좀 더 여유롭게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면 되겠어."
할말을 끝낸 나는 가만히 서서 대군주를 노려보기만 했다.
내 답답함과 진심은 그래도 좀 전해졌는지, 이내 대족장이 표정을 풀었다.
"좋다. 당장 선택지는 하나뿐인 것 같군. 7군주, 우선 중대한 정보를 전해준 것에 감사한다. 아데사를 도와주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재 포그위그가 부활했던 장소에서 세계수까지 얼마나 이동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놈이 얼마나 속도를 붙였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족장은 내 설명을 듣고, 포그위그를 막을 전력을 어떻게 구성할지 바로 결정했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병력을 대거로 움직일 시간도 없다.
그리고 어차피 놈을 상대하는 데 물량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우르르 몰려가봤자 약한 이들은 먼지처럼 쓸려나갈 것이다. 필요한 건 뇌후와 같은 강력한 단일 전력.
그 말도 안 되게 질긴 덩어리를 힘을 모아 한 번에 뚫어낼 파괴력이었다.
"다른 부족들과 엘프 대족장에게도 서둘러 연락을 보내야겠군."
"엘프 쪽에는 이미 2군주가 향했으니 그럴 필요 없다."
"그런가? 2군주도 있었나 보군."
"그래. 다른 수인 부족들에게만 소식을 전하면 될 거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포그위그에게로 이동하겠다 했으니, 이쪽도 곧바로 이동하면 된다."
그렇게 이동하기로 정해진 인원은 나와 참모장, 대족장, 수인 대전사장, 원로 몇몇과, 그리고 광랑이었다.
"크크,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그 거지 같은 일이 이렇게 되풀이되나? 음험한 황제 놈 멱을 진작에 따버렸어야 했는데."
실소를 흘리던 광랑이 참모장에게 물었다.
"대군주는 안 온다더냐?"
"대군주께서는 자리를 비우고 계시기에······."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이봐, 참모장. 대군주는 정말로 황제가 이런 짓을 벌일지 몰랐나?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았으면서?"
"무슨 의미이십니까?"
광랑과 참모장이 잠시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의미긴, 우리 대군주님은 언제나 속을 알 수가 없다는 의미지."
광랑이 픽 웃으며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대족장에게 빈정거리며 말했다.
"우다크바트, 이번엔 네가 대족장으로서 한몸 바쳐 세계수에 희생할 생각이 없나? 이그렐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대족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말뿐이라면 누군들 못할까, 역겨운 위선자 새끼들."
"이그넬! 닥쳐라!"
수인 원로 한 명이 참다 못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그에 광랑이 귀를 후비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이그넬, 적당히 해라. 세계수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않아도 그때 무리하게 힘을 증폭시킨 탓에, 더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간 핵이 완전히 파괴될 거라는 걸."
대족장의 말에, 광랑은 코웃음을 내뱉고서 말했다.
"그 전에, 애초에 네 역량으로는 한참 부족하긴 하지. 네가 세계수에 흡수되어봐야 이그렐의 힘의 절반분이라도 보탬이 되겠어?"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이그렐은 최강의 전사였으니."
나는 광랑을 상대하는 대족장을 보며 참 인내심이 깊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급해서 그런가. 대족장이 싱겁게만 반응하자 광랑도 더 빈정거리기를 관두었다.
'그나저나 세계수가 그런 상태였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대충 아데사의 사정을 파악했다.
이그넬의 형제, 이그렐의 힘을 흡수시켰던 건 세계수의 핵에 상당한 부담을 동반했던 모양이다.
즉 지금 상황에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닌 듯했다.
"이동하지."
이내 수인들이 데려온 건 매처럼 생긴 거대한 새였다.
호크디. 아데사 대수림에 서식하며, 그들이 길들여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몬스터였다.
크오오! 호크디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띠용이가 포효했다.
겁을 먹은 호크디들이 날갯짓을 하며 난리를 피웠다.
"야, 장난치지 마라."
녀석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는 거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목을 툭 때렸다.
준비를 전부 마치고 곧바로 이동을 시작했다.
***
호크디도 빠르긴 했지만 와이번보다야 못했기에, 속도는 그들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포그위그가 나아가고 있을 루트로 꽤 한참을 이동했다. 그런데······.
"······맙소사."
수인들이 아래로 펼쳐진 참상을 바라보며, 충격받은 얼굴로 탄식을 터뜨렸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쓸려지나간 흔적 아래, 그 주위의 수풀을 온통 좀먹고 있는 검고 끈적한 기운.
그건 단순히 폐허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이질적이고 기괴한 광경이었다.
나도 그걸 보며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벌써 이만큼 이동했다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포그위그가 지나간 길의 흔적이었다.
놈이 이 장소를 이미 지나쳐갔다는 뜻이었다.
"대족장, 여기서 세계수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남았지?"
내 물음에 대족장이 대답했다.
"우리가 날아온 속도로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가깝잖아······.
나와 참모장이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포그위그의 속도는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놈은 그 덩치로 움직이는 동안에 계속해서 가속했던 모양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수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깨달은 듯, 먼저 앞장서서 검은 길을 따라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놈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새 더 덩치를 불린 것 같군요."
참모장이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검고 거대한 덩어리를 보며 말했다.
놈은 지금은 이동하지 않는 건지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있었다.
나는 수인들을 돌아봤다. 광랑의 인상이 사납게 굳어있었다. 대족장이나 다른 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포그위그는 그들에게 있어 고향을 멸망시킬 뻔했던 존재.
그리고 광랑에게 있어서는 형제의 목숨마저 앗아간 거나 다름없는 존재. 당연한 반응이었다.
"엘프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야. 먼저 칠 건가?"
"그래. 기다리고 있을 시간 따윈 없어 보이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족장에게 말했다.
"포그위그의 가장 위쪽에 검보랏빛을 띄고 있는 부위가 있다. 그 안쪽에 황제의 본체가 묻혀있다."
"약점이라는 건가?"
"그래. 본체를 죽이기만 하면 저 거대한 재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수인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당장 별다른 작전은 필요 없었다.
공격을 한 점에 집중시켜서 황제의 본체가 드러나게 하는 것.
"저게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는지 알고 있나?"
대족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우리가 공격했을 때는 특별히 반격이 없었다. 너희가 과거에 상대했던 포그위그는 어땠지?"
"몸체를 분리시켜 사방으로 쏘아내더군. 일단 그 정도만 경계를 해야······."
"뭘 아직도 재잘거리고들 있어? 그냥 처죽여버리면 되는 걸!"
등의 대검을 뽑아들고 먼저 앞으로 나아간 광랑이, 그대로 포그위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쩌어엉!
핏빛의 검기를 두른 광랑의 검이 포그위그를 내리찍었다.
약점을 정확히 노렸으나, 역시 별 타격은 없었다.
광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끝부분만 조금 박힌 검날을 빼냈다.
뒤이어 대족장을 포함한 다른 수인들이 나아가서 합류했다.
그들은 광랑의 공격에도 포그위그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광랑처럼 놈의 몸체 위에 내려섰다.
"놈이 무언가를 하려는 반응을 보이면 즉시 떨어져야 한다! 일단은 몸체를 분리해서 쏘아내는 공격을 경계해라!"
한 번에 모두가 약점을 타격할 모양이었다. 나와 참모장은 여전히 와이번 위에 탄 채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나는 공격에서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위험에 빠진 이가 생기면 나서서 방어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콰아아아앙!
찢어지는 폭음과 함께, 수인들의 공격이 일시에 포그위그의 약점을 타격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금 타격이 있었는지, 포그위그의 약점 부위가 움푹 파인 것이 보였다.
뇌후가 공격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족장님, 다시 한 번 공격을······!"
그러나 그때 포그위그에게서 무언가 반응이 나타났다.
덩어리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나는 즉시 소리쳤다.
"······피해라!"
"모두 물러나라!"
동시에 족장도 소리쳤다.
모두가 허공으로 뛰어든 바로 다음 순간, 격하게 요동치던 덩어리의 표면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파편을 쏘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