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사 대수림 (4)
뇌후의 일격에 마법사들은 잿더미가 되었고, 창성은 피를 흘리며 황제의 앞을 막아선 게 보였다.
대신 황제는 여전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고, 놈이 범위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띠용이의 등 위에서 그대로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쳤다.
그리고 지근거리에서 쏘아낸 핏물이 황제에게 접촉하기 바로 직전······.
화아악!
검은 기류가 회오리치듯 솟아오르며 황제의 주위를 결계처럼 감쌌다.
'빌어먹을······!'
간발의 차로 접촉에 실패한 나는 부동 장막으로 충격파를 막아내고, 뒤로 물러섰다.
이번엔 옆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창성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놈은 다시금 쏘아진 뇌후의 벼락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저멀리 튕겨나갔다.
꽈르릉!
뒤이어 도착한 뇌후가 하늘에서 내려서며, 다시 한 번 황제의 머리 위로 어마무시한 뇌기를 내리꽂았다.
하지만 황제를 뒤덮은 결계는 뇌후의 공격에도 별 타격은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그녀도 공격이 아무렇지 않게 막힌 게 당혹스러운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아무래도 늦은 것 같다.
황제가 포그위그와 융합을 시작했다.
나는 잠자코 그 광경을 노려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오오오.
마기는 순식간에 거대한 덩어리로 덩치를 불렸다.
마치 전신에 검은 불꽃을 뒤덮은 슬라임과 같은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크기는 가히 작은 산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대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혈술을 사용했다. 핏방울이 놈의 몸체에 닿았다.
'······안 통하는군.'
하지만 즉살은 발동하지 않았다.
저 검은 덩어리는 놈의 몸체가 아닌, 그저 마기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황제의 본체가 저 마기 덩어리 가장 안쪽에 묻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포그위그······ 황제가 어떻게?"
참모장이 중얼거렸다.
그는 놈의 정체를 깨달은 듯했다.
"포그위그? 포그위그라고요? 저게?"
"그런 것 같습니다. 대전쟁 때 아데사를 침공했던 그 재앙과 완벽히 외형이 일치합니다. 크기는 좀 더 작은 듯하지만······."
그때 뇌후의 공격을 맞고 날아갔던 창성이 이쪽을 향해서 걸어왔다.
만신창이 꼴로. 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놈에게로 돌아갔다.
"전부 끝났다. 칼데릭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들은 저걸 막을 수 없어."
나는 답답함에 말했다.
"멍청한 새끼들, 이게 진정 인간을 위한 짓이라고 생각하나?"
"마음대로 떠들어라, 7군주. 넌 아무것도 알지 못한······."
"아니, 알고 있다. 놈이 이제부터 세계수를 집어삼킬 거라는 것도, 그 다음은 곧장 올테로어로 진격할 거라는 것도."
창성은 내가 앞으로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자 놀랐는지, 순간 할 말을 잃은 기색이었다.
황제가 바라는 건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의 멸망.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상.
놈은 인간만의 세상이 적어도 지금보단 평화로울 거라는 터무니없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지구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
황제는 세계수를 통해 대수림의 힘을 모두 흡수하고, 올테로어로 향해서 끝에는 자폭할 것이다.
아데사와 올테로어, 두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킬 계획인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러고 나면 유일하게 남은 칼데릭은 서서히 세인테아에게 밀려나게 될 것이다.
용사가 멀쩡히 존재하기만 한다면 힘의 균형은 세인테아 쪽으로 완벽하게 기울어 있으니까.
놈이 칼데릭만은 공격하지 않고 남겨두려고 하는 건, 그 또한 인간 때문이었다.
칼데릭에 가장 우세하게 존재하는 종족은 인간과 엘프, 그리고 수인이었으니까.
그들을 학살하지 않기 위함이다.
어차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들은 도태되게 될 테니 말이다.
황제는 그런 광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놈의 계획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잘 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네놈들이다. 포그위그를 부활시키면 올테로어도 충분히 멸망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현 마족들의 우두머리인, 원마 서열 1위.
마왕의 가장 광적인 추종자.
대전쟁 때도 마왕의 그림자 아래 자신을 숨기고 있던 아즈켈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아무리 포그위그라도 놈들이 고작 그거 하나에 멸망할 종족이었다면, 용사가 진작 멸망시켰을 것이다.
"······승리하는 건 우리 인간이다. 인류와 세인테아에 영광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창성은 더 입을 열지 않고 우리를 향해서 창을 겨누었다.
하지만 아까 황제 때문에 뇌후의 공격을 못 피하고 정면에서 막았을 때부터 놈은 중상 상태였다.
뇌후가 코웃음을 치며 뇌기를 폭풍처럼 쏟아냈다.
일격, 이격, 그리고 세 번째 공격에 창성은 더는 공격을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새카맣게 타버렸다.
허무한 최후였다. 나는 창성의 시체에서 시선을 떼었다.
언젠간 아셸이 놈에게 직접 복수할 수 있길 바랐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참모장."
"예, 7군주님."
"저걸 막아야 한다. 이견은 없겠지? 아데사가 무너지고, 균형이 깨지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거다."
참모장은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지금 가서 대군주를 불러올 수는 없나?"
참모장이라면 초장거리 텔레포트로 바로 대군주성으로 이동해 대군주에게 상황을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군주께선 현재 자리를 비우고 계십니다."
······하필 대군주까지? 되는 게 없다.
대군주나 용사나 한 사람만 있었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텐데.
물론 나도 용사에게 연락이 닿을 방법은 없었다.
과연 이 전력만으로 저 괴물을 막을 수가 있을까.
어느새 저멀리 멀어지고 있는 포그위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뇌후와 참모장에게 말했다.
"일단은 쫓아가지."
우리는 다시 와이번에 올라타서 포그위그를 쫓아갔다.
놈의 가장 위쪽에는 희미하게 자색 기운이 섞여 검보랏빛을 뿜어내는 부위가 있었는데, 나는 그걸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아마 약점이다. 황제의 본체는 저 안쪽에 묻혀있을 거다."
"그걸 어떻게 알죠?"
"나는 기운에 민감해. 놈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느껴진다."
물론 게임에서 그랬기에 알고 있는 사실일 뿐이었다.
황제의 계략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게 나였기에 뇌후는 내 말은 순순히 믿는 기색이었다.
"2군주, 네가 황제의 본체가 조금이라도 드러나게 덩어리를 뚫어주기만 한다면, 놈의 숨통은 내가 확실히 끊을 수 있다. 가능하겠나?"
뇌후는 말없이 검보랏빛 부위를 노려보다가 다시 정령을 소환했다.
천둥 소리와 함께 거대한 새의 형상이 그녀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이번엔 완전한 소환이었다.
"돕겠습니다."
참모장도 마력을 일으켰다.
솔직히 참모장의 레벨로는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쿠르르릉······.
이전의 공격들과는 비교도 안 될 가공할 뇌기가 모여들며, 거대한 구체를 형성했다.
뇌후의 공격이 떨어지기 전에 참모장이 먼저 붉은빛의 마력포를 쏘아냈다.
마력포는 검보랏빛 부위에 제대로 명중했지만 타격은 전혀 없어 보였다.
번쩍!
다음으로 섬광이 사방을 뒤덮으며, 뇌후가 만든 거대한 뇌구가 내리꽂혔다.
나는 눈부심에 실눈을 뜬 채 바라봤다.
일대의 수풀들까지 한순간에 소멸시킨 뇌구의 파괴력에 언뜻 공격은 통한 것처럼 보였다.
검보랏빛 부위가 움푹하게 파였고, 포그위그의 움직임까지 일순간 멈추었으니까.
'······하.'
하지만 타격을 입은 부위는 곧바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되었다.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기 시작한 포그위그를 보며 뇌후도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통하지 않는군요. 말도 안 되는 방어력과 재생력입니다."
전력을 다한 뇌후의 공격도 저 정도뿐에 그치는 건가.
그렇다면 역시 여기 있는 전력만으로는 답이 없었다.
참모장이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지만, 나는 시선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나는 황제의 본체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놈이 점점 가속합니다."
참모장이 말했다.
그 말대로 포그위그가 나아가는 속도는 덩치에 안 어울리게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저대로 놈이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도착하면 그때는 끝이다.
"아무래도 전력이 더 필요하겠군."
"예. 아데사의 엘프와 수인들에게 상황을 전해야겠습니다."
애초에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그들이니, 곧장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엘프 대족장에게는 내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뇌후가 말했다.
그녀의 가문은 아데사의 엘프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알겠다. 나와 참모장은 수인 대족장을 찾아가지."
우리는 그대로 갈라져서 동쪽의 대수림과 서쪽의 대수림으로 향했다.
***
밤낮이 하루 바뀔 동안 쉬지도 않고 꼬박 이동했다.
수인 부족들의 경계에 들어오고부터는 우리는 고도를 한참 높여서 이동했다.
지상에서 우리를 발견한 수인들이 공격부터 날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다 왔습니다."
그리고 수인들의 땅 한가운데, 고나크 부족의 영역에 진입하고부터는 서서히 고도를 내렸다.
이런 식으로 찾아가면 그들 입장에선 침공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었지만, 여유롭게 허락을 맡고 발을 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음.'
예상대로 아래에서는 열렬한 마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수인들이 한가득 모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공격이 날아들지는 않았지만.
"이쯤에서 내려가지. 내려가자, 띠용아."
나는 띠용이의 목을 툭툭 두드렸다.
지상에, 수인족 전사들이 진을 친 한가운데에 참모장과 내가 착륙했다.
사방에서 적의가 쏟아지는 가운데 한 수인이 나와서 소리쳤다.
"칼데릭의 참모장, 그리고 새로운 7군주.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시오?"
수인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짐작하고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들도 바깥의 일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나보다 참모장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이런 무례를 저지르게 되어 유감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데사의 존속이 아주 위험하다는 소리입니다. 우린 당신들을 도우러 온 것이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대족장에게 안내부터 해주길 바랍니다."
그에 수인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참모장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했을 텐데요."
"자세히 설명하시오. 우리가 무작정 당신들의 말에 따를 이유는 없······."
내가 껴들어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너희 따위가 판단할 사안이 아니니 대족장에게 안내하라는 것 아니냐. 아니면 이 자리로 불러오든가."
"······."
그에 수인들이 저들끼리 말을 나누다가 몇몇이 자리를 떠났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대치를 했다.
잠시 뒤에 일련의 무리가 등장했다.
나는 그들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거대한 덩치의 수인의 레벨을 확인했다.
【Lv. 96】
아데사의 수인 대족장, 우다크바트.
그렇지 않아도 이미 자리로 오고 있었는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아데사의 존속이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설명해라."
가까이 다가온 그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나는 참 시원한 성격이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혹시 5군주가 당신을 찾아가지 않았었나?"
"그렇다만. 세인테아 황제가 대수림에서 뭔가 음험한 짓을 꾸미고 있을 거라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가 빠르겠군. 그 우려가 현실이 됐다."
"······황제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놈이 포그위그를 부활시켰다. 대전쟁 때 이 대수림을 멸망시킬 뻔했던 그 괴물을 말이야."
대족장의 눈이 찢어져라 크게 떠지고, 다른 수인들도 충격받은 기색이 되었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7군주. 포그위그라니?"
나는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광랑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