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64화 (164/189)

아데사 대수림 (3)

일찍이 황위를 계승해, 세인테아의 역대 황제들 중 제일의 성군으로 칭송받던 다이드 황제. 

그의 나이가 마흔이 막 넘었을 때 슬하에 다섯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그란디오스. 황제와 황비는 몹시 기뻐하며 그의 앞날을 축복했다.

*** 

다이드 황제의 선대 때부터 제국은 한 가지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다. 

제국 서쪽의 산맥에 자리를 잡은 야만 수인 부족. 

언제인가부터 어마무시하게 집단의 덩치를 불린 그들이 행인들을 습격하고, 더 나아가 주위의 마을이나 도시들까지 습격했다. 

선대는 병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완전히 토벌하고자 했으나, 번번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상정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지리적인 문제가 컸다.

수인들이 산맥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리면 언제나 흐지부지한 결과로 전쟁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선대의 방식으로는 갈등의 원천을 해결할 수 없다 생각한 다이드 황제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했다. 

무작정 창칼을 들이미는 대신 수인 부족의 사정을 헤아리고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 

종이 다르더라도, 생김새와 가치관이 다르더라도, 다이드는 대립보다 공생의 길을 강구했다. 

그런 각고의 노력에도 수인 부족과 소통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쉬이 포기하지 않았다.

젊은 그란디오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곁에서 봐오며 자연스레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다. 

'종족의 화합. 그것이 세상을 보다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시작점이다.' 

칼데릭은 이미 많은 종족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대군주의 힘으로 성립되는 체제일 뿐이다. 

그란디오스는 힘에 의한 억지력이 아닌,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란디오스는 다른 종족들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에 힘썼다. 

그들의 특성을, 문화를, 그리고 가치관을 이해하고자 했다. 

어느 날 그란디오스는 다이드 황제에게 예전부터 해왔던 생각을 꺼냈다. 

'수인들의 거주구를 따로 마련하고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수인은 노예로 사고팔리는 가장 흔한 종족이었다.

세인테아에서 수인이 인간들 틈에 평범하게 섞여 사는 건 그동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란디오스는 생각했다. 

서서히 인식을 바꿔보자고. 

당장 법과 제도를 바꾸고 개혁을 일으키는 건 어렵겠지만, 수도의 수인 노예들을 일부 해방시켜서 자유롭게 살게 해주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어쩌면 그것이 산맥의 수인 부족들의 마음을 열 계기까지도 될 수 있었다. 

다이드 황제는 그란디오스의 생각에 몹시 흡족해하며 즉시 실행에 옮겼다. 

도시에 수인 거주구를 만들고, 조금씩이나마 그들이 인간들과 정상적인 관계로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구성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인 거주구 계획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란디오스는 계속해서 다른 종족들과 화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어느 날은 칼데릭에서 양국의 관계 논의를 위해 대군주가 직접 수도에 찾아왔다. 

그란디오스와 그의 형제 몇몇도 황제를 따라서 회담에 참여했다. 

한창 회담 중 우연히 수인 거주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대군주는 배까지 붙잡고 깔깔 웃었다.

'무엇이 그리 재밌으십니까, 대군주?' 

'그야 재밌을 수밖에! 어떻게 하면 늑대와 친해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양이 있다니 말이야.'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란디오스는 대군주의 앞에서 언성까지 높여 소리쳤다.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렸지만, 대군주는 그런 그에게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상은 이룰 수 없기에 이상인 것이야, 황자. 포기해.'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산맥의 수인들은 여전히 말썽이었다. 

조금 노력의 성과가 있나 싶던 시기도 잠시뿐이었다. 

선대처럼 주기적으로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피해도 더욱 커졌다. 

황제에게 그만 온건책을 관두고 수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지금껏 쌓아온 것들은 전부 물거품이 되고 관계를 두 번 다시 복구할 수 없을 것이기에, 황제의 고뇌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아직도 시간이 부족한 것인가.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지?' 

그란디오스는 막막함에 발이 가는 대로 수도를 암행하다가, 수인 거주구에 다다랐다. 

거주구를 관리하는 인간 병사가 어린 수인을 죽도록 두들겨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거리에서 뛰어놀다가 순찰하는 병사와 부딪힌 모양이었다. 

문득, 그란디오스는 두려움과 허망함을 느꼈다. 

만약 자신의 노력에도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면? 

무언가를 바꾸더라도, 자신이 죽은 뒤 시간이 지나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라면. 

인간이 다른 종족과 화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전부 잘못된 것이었다면······.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서쪽 변경의 요새에 방문하려던 황실의 마법사가 수인들의 습격에 휘말려 사망했다. 

마법사는 어릴 때부터 그란디오스에게 마법과 예법을 가르쳤던 그의 스승이었다. 

다이드 황제의 나이가 일흔이 되었을 때, 그는 앓고 있던 고질병으로 세상을 뜨게 됐다. 

본래라면 1황자가 황위를 계승할 수순이었지만, 1황자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사했다. 

1황자 다음으로 계승권을 가졌던 이들 역시 시간을 두고 전부 다양한 이유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란디오스가 황위에 올랐다. 

오래 전부터 권력을 치밀하게 장악해온 그란디오스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인물은 더 이상 없었다. 

살아남은 형제와 친척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욕했다. 

그란디오스는 개의치 않았다. 황제가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주구의 수인들을 몰살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는 병력을 움직여 서쪽 산맥의 수인들의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했다. 

타국을 강제로 전쟁에 끌어들이고, 대규모 살상 마법을 사용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시체로 산을 쌓아올렸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산맥의 수인들은 끝내 절멸했다. 

누군가는 스승이 죽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란디오스는 수인들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란디오스가 그런 세상을 꿈꾸는 건 인간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과 다른 종족이 어울리지 못하고 충돌하는 건 인간의 잘못도, 그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간단한 진리였다. 

자신은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오직 인간만을 위할 자격과 권리가 있었다.

그들 또한 그들의 종족만을 위할 권리가 있었다. 이기적인 것이 아닌 너무도 당연한 일. 

"내가 인간이기에······." 

그란디오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의는 선과 악이 아닌 승리와 패배로 나뉘어지는 것. 

자신은 이 싸움의 최후의 승자를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폐하." 

마법진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이 말했다. 

창성 퀘이덴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란디오스를 쳐다봤다. 

그란디오스가 시선을 내리고,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시커먼 덩어리를 응시했다. 

***

눈앞에 강림한 천둥의 정령은 언뜻 보기에 거대한 새와 같은 형상이었다. 

콰르릉! 

정령이 우리에게 적의를 내비치며 가공할 뇌기를 뿜어냈다. 

놈에게 표정은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우호적인 기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하고 있지?" 

나는 가만히 서있는 뇌후에게 말했다. 

뇌후가 천천히 천둥 정령을 향해서 걸음을 내딛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뇌후는 그렇게 정령을 달래듯 말하며 다가갔는데, 별 효과는 없는지 몰아치는 뇌기는 더 사나워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힘겹게 뇌기를 뚫어내고 계속해서 정령에게 거의 무방비하다시피 다가갔다. 

저것도 아마 엘프가 아니라 다른 종족이 다가갔다면 진작에 재가 되고도 남았겠지. 

나는 슬쩍 뒤로 더 물러나서 거리를 벌렸다.

뇌후를 죽게 둘 수도 없었기에 여차하면 구하려고 나설 준비를 한 채. 

"크으으······!" 

뇌후와 정령의 거리가 몇 걸음 안으로 가까워졌다. 

뇌후는 내상을 입었는지 입에서 핏물까지 흘리고 있었는데, 끝내 손을 뻗어 정령과 접촉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의 정령이 서서히 기운을 거두는 걸 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성공했나?"

아, 이건 플래그잖아. 

다행히 내 그런 말에도 정령은 끝내 모든 기운을 거두고 모습을 감추었다. 

진이 빠졌는지 뇌후가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Lv. 95】 

나는 뇌후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레벨이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정령과 계약에 성공한 건가?" 

뇌후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요. 나에게 이렇게까지 사나운 정령은 처음 봤어요." 

"어쨌든 힘을 되찾아서 다행이군." 

"······그래요. 참 다행이군요." 

뇌후가 나를 흘겨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상을 입은 것 같은데." 

"작게 충격을 받은 것뿐이니 금방 회복할 겁니다." 

"그럼 바로 이동하지. 시간이 없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나를 째려봤다. 

***

다시 대수림의 북쪽으로 돌아간 뒤, 이제 예정대로 뇌후가 황제를 찾아낼 차례였다. 

정령술사에게 정령의 미움을 사는 건 본래 아주 위험한 일이라며 그녀는 아주 내켜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고오오. 

준비를 마친 뇌후가 일대의 정령들에게 모조리 힘을 뻗쳤다. 

초감각으로 살피자 정령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바둥거리는 게 느껴졌는데, 뇌후의 안색도 어두웠다. 

"2군주께서 설마 이런 부탁을 들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참모장이 묘한 눈길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뇌후와 나 사이의 관계를 모르니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할 것이다.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했기에 나와 참모장은 그녀의 주위를 엄호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번쩍 눈을 뜬 뇌후가 기운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정말인가?" 

"여기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습니다. 황제가 분명해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았다. 뇌후가 심각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내게 물었다. 

"그 기운은 대체 뭡니까? 황제가 설마 마족과 손을 잡기라도 한 겁니까?" 

"······아마 그럴 거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이동하지." 

뇌후가 마족의 기운을 느꼈다면, 황제가 정말로 실행에 나선 건가? 

나는 불안감이 점점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곧장 뇌후가 말한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반나절 정도에 걸쳐 다다른 무성한 숲. 

저멀리 수풀 사이에서 내 감각에도 서서히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만난 그 어느 원마들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마족의 기운이. 

'이런······!' 

시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나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황제, 창성 퀘이덴에, 그리고 몇몇 마법사들. 

황제는 어떤 마법진 위에 시커먼 덩어리와 함께 올라가있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나는 소리쳤다. 

"뇌후, 놈을 공격해라! 어서!" 

그에 뇌후가 인상을 구기고서 정령을 소환했다. 

거대한 벼락이 뻗어나가 황제가 있는 자리로 내리꽂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