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63화 (163/189)

아데사 대수림 (2)

아데사의 세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동쪽 대수림을 지배하는 엘프족. 

그리고 서쪽 대수림을 지배하는 수인족. 

서로 다른 종족, 서로 다른 본능과 가치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득한 과거부터 공존해온 그들은 어떤 의미로는 대륙의 그 어느 국가들보다도 단단한 결속력을 지녔다. 

두 세력 집단의 공통점은 많은 부족들이 연합한, 아주 광범위한 부족사회 체제라는 점이었다.

수인은 엘프와 달리 내부에서도 종이 갈리긴 했지만 아데사에서 그것은 별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아데사의 수인족은 오래 전부터 고나크 부족을 중심으로서 뭉쳐왔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전사, '투신의 혼'을 지닌 수인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부족. 

현 수인족의 대족장은 그런 고나크 부족의 족장이자, 가장 강력한 전사인 우다크바트였다. 

"이그넬." 

우다크바트는 복잡한 눈으로 눈앞의 동족을 바라봤다. 

광랑이 고개를 양옆으로 까닥이다가 입을 열었다. 

"날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우다크바트." 

그녀의 말에 주위 수많은 전사들과 부족의 원로들이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반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우다크바트가 손을 휘저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네 버르장머리는 예전부터 누구도 고쳐먹지 못했으니 꼬집을 생각이 없다. 왜 찾아왔느냐?" 

"글쎄, 왜 왔을까?" 

"무례는 참아줄 만큼 참아줬다. 한바탕 날뛴 다음 죽을 장소라도 찾으러 온 거냐?" 

광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명줄은 쓸데없이 긴 늙은이들을 싹 다 처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오늘은 관두자고." 

원로 중 몇몇이 그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혓바닥이 길구나, 이그넬. 일족을 등지고 대군주의 개 노릇이나 하고 있는 배신자가." 

"그 더러운 발을 부족 땅에 들이게 해줬으면 어서 용건만 뱉고 꺼져라!" 

"그래그래, 늙은이들아. 나도 댁들 역겨운 얼굴이나 마주하고 싶어서 온 건 아니거든?"

그들 사이에 휘몰아치는 기운에 고나크의 어린 전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한 인물의 방문으로 부족의 모든 전사장들과 수뇌가 한자리에 모여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광랑에 대한 걸 부족 사이에 전해져내려오는 옛이야기 정도로만 들은 그들에게 있어, 현재의 상황은 너무도 낯설고 묘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짧게 말한다. 세인테아 황제가 수림 북쪽 끝에서 무언가 꾸미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머저리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멀뚱히 있지 말고 제대로 경계해라." 

우다크바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세인테아의 황제? 대군주가 그 말을 전하라고 하더냐?" 

"아니. 이건 그냥 내가 너희들에게 친히 알려주는 정보다." 

"그걸 어떻게 믿지?" 

광랑이 조소를 흘렸다. 

"어이, 내가 아직 이 부족에 잔정이라도 남아있어서 전령 역할을 자처하는 줄 알아?"

"······." 

"부족이 전부 몰살당하든, 대전쟁 때처럼 아데사가 산지옥이 되든 알 바 아니다. 너희는 그 빌어먹을 나무나 제대로 지키면 되는 거야. 너희 늙은이들의 목숨이든 전사들의 목숨이든 싹 다 갈아넣어서라도 말이야. 그때 그랬듯이." 

광랑의 으르렁거림에 우다크바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어린애인 채로 전혀 자라지 않았구나." 

"하하, 그래? 비겁자보다야 훨씬 낫네. 할 말은 끝났다." 

광랑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왔던 길을 돌아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아가는 방향에 서있던 전사들의 안색이 굳었다. 

"어딜 가는 것이냐, 이그넬." 

광랑은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우다크바트가 사나운 울음을 흘렸다.

"멈춰라. 누가 네게 세계수에 접근하는 걸 허락한다고 했지?"

그가 내뿜는 투기에 숲이 짓눌렸다. 광랑이 지지 않고 기운을 맞받아쳤다. 

"허락? 내가 내 형제를 보러 가겠다는데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거냐?" 

"넌 더 이상 아데사의 일원도, 부족의 일원도 아니다. 네가 선택한 자리에 책임을 져라." 

광랑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책임! 좋지. 그럼 칼데릭의 군주답게 감히 내 앞길을 막는 것들은 전부 썰어버리고 가볼까?" 

"이그넬, 정말 죽고 싶으냐?" 

"왜, 못할 것 같아?" 

광랑이 등의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에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더 막아서면 진짜로 한다. 한번 보자고. 내가 쓰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이 처죽일 수 있을지."

원로들도 전투를 준비했다. 

누군가는 살의를 내비쳤고, 누군가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숨 막히는 대치 속, 우다크바트가 고개를 젓고서 침묵을 깼다. 

"이번 한 번뿐이다." 

"족장님!" 

"이런 일로 부족원들의 피를 흘릴 텐가?" 

원로들은 항변하지 못했다. 

부족의 본진 한가운데서 광랑이 작정하고 날뛴다면 피해가 어떨지는 그들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대전사장은 그녀를 따라가서 감시하라." 

명령을 받은 대전사장 투라카가 곧장 광랑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다크바트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디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이그넬. 적어도 내 손으로 널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

광랑은 코웃음을 흘리고 가던 걸음을 마저 옮겼다. 

*** 

"5군주는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고 있나?" 

뇌후와 함께 와이번을 타고 이동하는 중 그녀에게 물었다. 

뇌후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정확한 목적은 몰라도 분명 고나크 부족의 영역으로 이동했겠죠." 

"고나크라면······." 

"수인 대족장의 부족입니다. 5군주의 출신은 알고 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나크 부족은 아데사 수인족들의 중심인 대족장이 다스리는 부족이다. 

광랑은 대수림을 나와 칼데릭의 군주가 되기 전, 그런 고나크 부족의 일원이었다.

"어쩌면 대족장에게 황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러 간 걸지도 모르겠군요." 

"그래도 되나?" 

"대군주께서 따로 언질하지 않으셨다는 건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는 뜻이니, 제멋대로 행동하겠죠." 

뇌후는 지금 걸려있는 게 있어서인지 질문에 다 친절히 답해주었다. 

나는 잠시 광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생각했다. 

광랑이 부족을 저버리고 대수림을 나와 칼데릭의 군주가 된 이유. 그것은 나 또한 알고 있었다. 

아데사 대수림의 정중앙에는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존재한다. 

세계수. 어느 만화나 게임이나 엘프가 나오면 자주 함께 튀어나오곤 하는 설정이다. 

아데사 대수림의 또 다른 이름은 축복받은 대지였다. 

거대한 생명력을 품은 세계수는, 대수림 전체와 이곳에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힘을 전해주는 신성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과거 마족의 침공으로 시작됐던 대전쟁에 아데사 또한 전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대수림을 침공한 건 단 한 개체의 마족이었으나, 놈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재앙이었다. 

대전쟁 시대의 마족이 가졌던 가장 강력한 전쟁 병기. 

현재의 원마들과 비교해도 그나마 서열 1위의 아즈켈을 제외하면 막을 자가 없을 압도적인 존재. 

'포그위그.' 

놈의 힘에 침식되어 대수림이 순식간에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벼랑 끝에 몰린 수인과 엘프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세계수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 

대수림의 가장 강력한 전사의 육신과 영혼을 세계수의 핵에 흡수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투신의 혼을 가진 전사가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하지.' 

투신의 혼이란 고나크 부족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 실체조차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고나크 부족에는 오랜 선조 때부터 언제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강력한 전사가 드물게 태어나곤 했다.

이그렐, 그리고 이그넬. 

자신을 희생해 아데사를 구원한, 그 투신의 혼을 지녔다는 전사가 바로 광랑의 쌍둥이 형제였다. 

그 일이 바로 광랑이 부족을 저버리고 대수림을 나온 결정적인 계기······ 라는 설정이다. 

세세한 내용 하나하나까지는 모르고, 광랑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 정도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고향에 대한 애착? 부족에 대한 애착? 광랑에게는 아직 그런 것들이 남아있는 건가? 

아니면 세계수와 하나가 된 형제에게 미련을 못 버린 건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이유들이야 많았다. 

어쨌든 그런 것들이라면 그녀에게 더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도······. 

'빨리 황제를 찾아내야 돼.' 

황제가 벌일 짓이 재앙과 다름없는 이유가 바로 방금의 내용에 있었다.

왜냐면, 놈이 불러내려는 존재는 바로 아데사를 한 번 멸망시킬 뻔했던 그 마족이었으니까. 

황제가 대체 어디서 포그위그의 편린을 얻게 된 것인지는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황제는 그동안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그 재앙적인 힘을 다룰 방법을 찾아냈다. 

마족, 그것도 원마 급의 강대한 마족의 이능을 인간이 취할 수 있게 하는 연구.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갖 잔혹한 짓들도 마다하지 않으며, 놈은 그것을 끝내 성공했다. 

포그위그는 마수보다도 이지와 자아가 부족한 비생물적 특성을 가진 존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황제는 포그위그와 융합함으로써 새롭게 부활할 것이다. 

이전만 한 힘은 아니겠지만 그렇기에 이 아데사 대수림을 부활의 장소로 택한 것이었다. 

황제는 세계수를 통해 대수림의 모든 생명력을 편리하게 흡수하고, 힘을 완전히 회복할 계획이었다.

"2군주, 네 힘을 되찾게 해주는 데에는 조건이 있다." 

"쯧, 알겠다고 했잖아요. 정령들의 힘을 써서 황제의 위치를 찾아내겠다고요." 

"그것 말고 하나 더. 황제가 아데사를 멸망시키려 하는 거라면 너는 어떻게 행동할 건가?" 

그에 뇌후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다." 

"세인테아의 황제 따위에게 그런 저력이 있을 리가 있나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가 빤히 쳐다보자 뇌후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의 행동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죠.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나요, 7군주? 황제가 이곳에서 뭘 하려는 건지?" 

"대충은." 

"어떻게?"

"나도 내 정보원이 있으니까. 염려로 그치면 좋겠다만, 황제가 아주 위험한 일을 벌일 수도 있다." 

힘을 되찾아주기로 한 이상, 그녀는 이번 일 동안 완전히 아군으로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 

"왜 참모장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군주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대군주는 황제의 의도를 모르기에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 조사하려고 한다. 

하지만 황제가 뭘 하려는 건지 정확히 파악한다면, 그를 그냥 내버려두려고 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아데사는 다른 세력이었으니까. 

게임의 스토리에서는 애초에 이번 일에 칼데릭이 껴든 적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대군주든, 참모장이든, 광랑이든 뇌후든, 이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데사를 돕는 쪽이다. 만약 아데사가 위험에 처한다면, 너는 참모장과 의견이 대립해도 일단 내 뜻에 따라야만 해. 그게 조건이다." 

물론 그건 괜한 걱정일 수도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뇌후가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아데사를 도우려는 거죠?" 

"당연한 걸 묻는군. 아데사가 무너지면 세력의 균형도 무너진다. 지금은 그렇게 되어선 안 되는 시기야." 

뇌후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처음부터 아데사를 도우려고 했었어요. 당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칼데릭의 안위를 위해서. 대군주께서 아데사의 멸망을 바란다면, 나중에 처분을 받더라도 그에 따르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잘됐군." 

*** 

시간이 흐르고, 해가 저물었다가 다시 떠오를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수림의 북서쪽 외곽, 수풀이 적어지고 바위산들이 나타나는 지대. 

"저곳이다." 

나는 눈에 띄게 홀로 우뚝 솟은 바위산을 가리켰다. 

뇌후가 눈매를 좁혔다. 

"정말 저곳인가요?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그래." 

정상에 내려서자 뇌후가 서둘러 와이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뒤따라 내리고서 그녀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으면 곧 나타날 거다." 

놈은 이 바위산에 박혀서 벗어나지를 않는 정령이었으니까. 

그르르······.

얼마 지나지 않아 띠용이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뇌후의 와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뇌후가 긴장한 눈으로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왔군.' 

나도 팔짱을 낀 채 그곳을 바라봤다. 

쿠르르릉! 

천둥 소리가 울려퍼지고, 눈부신 뇌기가 바위산의 정상에 모여들었다. 

이내 거대한 형체의 무언가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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