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61화 (161/189)

고요한 숲에 찬바람이 불어왔다.

주위에 있던 나무 하나가 부스럭거리더니, 그 위에서 사람이 뛰어내렸다. 천궁이었다.

나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무슨 용건이지? 왜 따라오는 거냐."

그대로 떠나간 줄 알았던 천궁이 아까부터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초감각으로 알았다.

그럴 이유라고 한다면 나밖에 없었기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와서 불러낸 것이었다.

천궁이 말없이 날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물었다.

"7군주, 세인테아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정체도 숨기고 있는 것 같던데."

"개인적인 일이다. 관심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데."

갑자기 날 공격할 이유는 없지만,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천궁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사실 관심 없어."

"그럼 용건이 뭐지?"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서 천궁이 품에서 꺼내든 건, 아까 죽은 마족에게서 챙겼던 보석이었다.

천궁이 내게 보석을 던졌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며 보석을 받아들었다.

"4군주한테 들은 적이 있어. 7군주, 너는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즉살 능력의 정확한 메커니즘을 깨달을 수 있게 해준 건 4군주였다.

그에 대한 얘기를 3군주도 그에게 언제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러면 그 보석 안에 갇혀있는 영혼들을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해?"

물론 가능했다. 아까 동굴에서도 했던 일이니까.

나는 보석 안에서 울부짖는 영혼들을 보며 물었다.

"가능하다. 그런데 왜 이런 부탁을 하지?"

"나도 네 일에 관심을 안 가질 거야. 그러니 너도 내 일에는 관심 안 가졌으면 좋겠는데."

"무슨 궤변이냐. 지금 부탁을 하고 있는 게 누구지? 내게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널 도우라는 건가?"

물론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기에 그냥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양새였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군주와 신경전에서 밀리는 건 내 입지와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천궁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혀를 찼다.

"쯧, 알겠어. 그럼 이유를 알려주면 부탁을 들어주는 거지?"

"당연히 들어보고 결정한다."

"거기 갇혀있는 영혼 중 하나가 내 친척 동생이야."

친척? 이건 뭔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지? 아까 그 마족 놈에게 네 혈족이 당했다는 건가?"

"그놈이 3군주령 변경의 요새를 쓸어버렸거든. 거기 사령관이 내 친척 동생이었어."

"······그럼 너는 그놈을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거였나?"

"그래."

천궁이 고개를 까닥였다.

"보시다시피 갇힌 영혼들끼리 완전히 얽혀서 그건 돌이킬 수가 없게 됐어. 그렇다고 파괴하면 그 영혼 덩어리가 어디로 튀어버릴지도 모르겠고, 나한테 영혼을 깔끔히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지도 않고."

그래서 동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나한테 부탁하는 거라는 소리였다.

이야기를 이해한 나는 바로 즉살을 발동했다. 보석의 영혼들이 깔끔하게 소멸했다.

어차피 이들도 마족의 희생자일 것이었기에, 별 이상한 이유 아니면 원래 부탁은 들어주려고 했었다.

조건을 걸고 거래하려고 하면 천궁을 더 자극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됐다."

영혼이 소멸해서 텅 빈 보석을 도로 천궁에게 던져주었다.

보석을 받아든 천궁이 조금 씁쓸해 보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히 사라졌네. 고마워. 이건 빚으로 남겨둘게."

나는 몸을 돌리는 천궁을 향해 말했다.

"오늘 나를 만났던 건 없었던 일로 해줬으면 하는군."

"그래. 애초에 말하고 다닐 생각 없었어."

그리고 천궁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야영지로 걸음을 옮겼다.

***

"랜, 시원하냐?"

"시끄러."

자리로 돌아온 랜의 모습을 레아는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까지 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학기 시험에서 있었던 일, 마차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동굴 전투에서 있었던 일.

괴한들의 수장의 등장으로 모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랜은 오히려 놈을 욕하며 도발했다.

원래 그런 놈이었다면 모르겠지만 평소의 랜은 무던한 성격이지, 그런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레아의 눈에 그 모습은 마치, 랜이 그 참담한 상황을 혼자 전혀 위기로 느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동굴에서 탈출할 때도 그렇다.

분명히 바위에 깔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서 나왔다.

그러한 의심들은 마족과 칼데릭 군주의 등장으로 거의 확신이 되었다.

카앤은 3군주가 리곤을 쳐다본 거라고 했지만, 그녀는 똑똑히 봤다.

랜이 3군주의 말을 끊고 그와 무언의 시선 교환을 했다는 걸.

그리고서 3군주는 곧장 자리에서 떠나버렸다.

레아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랜의 정체에 대해서.

랜은 분명 칼데릭의 7군주가 리곤에게 붙인 '비밀 호위'일 것이라고.

'······확실해.'

능력을 숨기고 있으며, 칼데릭의 군주와 어떤 연결점이 있어 보인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랜은 리곤과 기숙사도 같은 방이었다. 모든 정황이 완벽했다.

리곤이 7군주에게 있어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가 리곤을 세인테아에 보낼 때 아무런 안전 장치도 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추측이었다.

그래, 어쩐지 계속 이상했다고.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자신의 추리에 만족한 레아는 조금 마음이 상쾌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윈

시간이 흘러 목적지인 바욘터 령, 헤리윈 가문의 본성에 도착했다.

남은 여정까지 또 습격을 받는다거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네.'

제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반드시 꼽는다는 마법 명가.

그런 헤리윈의 본성은 말할 것도 없이 웅장하고 거대했다. 칼데릭의 군주성만큼은 아니지만.

"어서 와라, 레아! 하하하!"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젊은 남자였다. 마르고 키가 큰, 레아와 똑같은 머리와 눈 색을 가진.

한눈에 봐도 그녀와 닮았기에 보자마자 레아의 형제자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아 오빠인가봐, 그치?"

"쉿. 카앤, 너 무례하게 행동하지 마라."

카앤과 리곤이 소곤거렸다.

남자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레아를 안으려다가, 그녀가 몸을 피하자 멋쩍게 물러났다.

"오랜만에 보는 오라비가 반갑지도 않느냐?"

"고작 반 년인데 무슨."

"아, 유즈 경! 동생 데리고 오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다가 큰일이 있었다던데?"

"예, 도련님. 따로 제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남자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그리고······ 레아의 친구들이라고 했지?"

그가 어째서인지 몹시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두 눈으로 직접 봐도 믿기지가 않아. 레아에게 친구들이 생겼다니? 이게 정녕 현실인가?"

레아가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러든 말든 남자는 호쾌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정말 반갑구나! 난 레아의 오라비 되는 시안 헤리윈이라고 한다."

이 격한 반응은 뭐지?

카앤도 리곤도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좋아해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전 카앤이에요!"

"오오, 카앤! 아주 활기찬 친구구나! 반갑다!"

"랜이라고 합니다."

"랜! 조금 과묵해 보이는 친구구나. 반갑다!"

"리곤이라고 합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곤! 반갑다. 예의가 바른 친구구나!"

"그만해. 이대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까?"

레아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남자, 시안은 그제야 헛기침을 하고서 점잖은 태도가 되었다.

"아무튼, 모두들 헤리윈 가문에 온 걸 환영한다. 가주님과 안주인께서는 용무가 있어 외출 중이시니 함께 맞이해주지 못한 걸 양해해주려무나. 자, 계속 서있지 말고 이만 안으로 들어가자."

시안은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다.

우리는 지내는 동안 각자 머물 방부터 안내받은 다음, 우선 씻은 다음에 좀 쉬었다.

"엄청나게 큰 성이네. 안 그래, 랜?"

침대에 드러누워서 쉬는데 창밖을 둘러보던 리곤이 말했다.

저 녀석은 칼데릭에 있을 때 훨씬 더 큰 성에서 지내놓고 새삼스레 무슨.

저녁이 되고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이동했다.

하인들이 계속 음식을 나르고 있는 가운데, 식당에는 호화스러운 진수성찬이 차려져있었다.

차려진 음식들은 각종 육류부터 흔히 보기 힘든 해산물까지 다양했다. 카앤이 신난 표정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 이게 대체 뭐예요? 징그럽게 생겼는데 엄청 맛있네!"

통째로 찐 문어 다리를 하나 떼먹고서 카앤이 호들갑을 떨었다. 문어는 처음 먹어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개가 잔뜩 들어간 스프, 아니, 스프보다도 맑은 탕에 가까운 음식을 먹었다.

이런 류의 음식은 오랜만이었기에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카앤, 랜, 리곤. 오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즈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정말 큰일을 해줬구나. 고생이 많았다."

시안의 말에 카앤이 멋쩍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고집을 부려서 전부 위험할 뻔했는걸요."

"알고는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

"하하,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 네 탓이라고 생각할 녀석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시안이 웃다가 물었다.

"세 사람은 어떻게 동생과 친해진 건지 궁금하구나. 저 까칠한 녀석이 남과 친하게 지낸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아서 말이다."

카앤이 맞장구를 쳤다.

"그쵸?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뭐 저런 녀석이 다 있나 싶었다니까요."

"야."

"안 그래, 리곤?"

리곤이 웃으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레아는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이 됐다.

"그래도 대단한 녀석이라는 것도 잘 알아요. 목숨이 위험할 때도 가문 사람들은 끝까지 챙기더라니까요. 솔직히 그건 좀 멋있었어, 레아."

기습 칭찬에 카앤을 노려보던 레아가 움찔했다.

"······헤리윈의 핏줄로서 지극히 당연한 책임이고 의무야."

"하하,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 솔직하게 좋아하면 될 걸."

"시, 시끄러워. 너는 진짜······!"

투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시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평소 레아의 성격만 보면 집안의 가족들도 얼음장 같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그들이 꽤 우애가 좋은 남매라고 생각했다.

***

저녁 식사가 끝나고, 레아는 시안이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시안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오, 동생아."

카앤은 맞은편에 앉으며 그가 읽고 있는 책을 힐끗 바라봤다.

"무슨 책이야?"

"그냥 마법서다. 오랜만에 서재를 정리하다가 낡은 책들을 많이 발견해서."

카앤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안이 읽고 있던 책을 접었다.

"재미 삼아 읽는 것뿐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헤리윈의 성을 가졌는데, 마법에 완전히 연을 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오라버니가 마법을 포기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그러니까 몸이나 잘 챙겨."

시안이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친구들과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더구나. 정말로 깜짝 놀랐다."

"······."

"그때 이후로 너는 누구와도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었지. 나는 정말 기쁘다, 레아. 네가 다시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상대들을 찾은 것 같아서."

레아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침묵하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제야 수준에 맞게 어울릴 수 있는 애들을 찾은 것뿐이야. 별 볼 일 없는 녀석들이었다면 친해질 일은 없었어."

"하하, 내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거냐? 그런 녀석이 이런 형편없는 오라비는 무시하지도 않고 항상 신경 써주는구나."

시안은 마력과 관련된 병을 앓고 있다.

마력을 끌어올리면 불규칙적으로 마력이 발작을 일으키는, 마법사로서는 치명적인 희귀 질환이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혹여 마력 발작이 심하게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마법사로서의 수명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까.

시안은 알고 있었다. 동생인 레아가 누구보다도 상냥한 마음을 가졌다는 걸.

자신이 이런 처지임에도, 후계는 사실상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임에도 혈육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언제나 한결같았으니까.

수준에 맞는 사람을 사귄다느니, 그런 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그녀를 오랫동안 봐온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가주인 아버지가 억지로 동생을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려고 했을 때만 해도 역효과만 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듯했다.

그 일로 인해 그녀가 마음에 입었던 커다란 상처는, 이제 조금이나마 아문 것처럼 보였다.

"짜증나는 소리하지 마."

"그래, 미안하다. 까칠한 녀석아."

우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창가로 돌아갔다.

편안한 침묵 속에 남매는 잠시 나란히 밤하늘을 바라봤다.

***

헤리윈 성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하루를 놀기만 하면서 지냈다.

성 이곳저곳도 구경하고, 우연히 도시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었기에 도시를 구경하며 축제도 즐겼다.

그래도 자기가 데려온 손님이라는 건지 레아는 뭘 할 때마다 항상 우리 곁에 붙어서 안내를 해줬다.

'여기가 헤리윈의 서재인가.'

하루는 성 내에 있는 서재를 구경하기 위해서 들렀다. 리곤의 의견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도서관에 자주 들리더니 독서에 취미를 붙이기라도 했나.

"넓다!"

서재에 들어서고 카앤이 짧은 감상평을 외쳤다.

카앤은 1층은 둘러보지도 않고 계단을 타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버렸고, 리곤은 레아와 붙어서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걸으며 혼자 서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세인테아의 마법 명가의 서재에는 어떤 책들이 있을까.

물론 외부인한테도 공개하는 서재에 별 중요한 마법서가 있지는 않겠지만, 시간 때우기로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낡은 책들만 모여있는 책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책들을 하나씩 뽑아서 둘러보는데 어느새 다가온 레아가 말했다.

"이쪽은 고서들을 모아놓은 곳이야. 별 건 없을걸. 저쪽에 공간계 마법에 대한 마법서들도 있어."

"아, 그래."

내 고유 마법이 공간 마법이라고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레아는 나를 힐끔거리다가 다시 리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공간 마법은 관심도 없는데 말이지.'

장거리 이동은 불가능하더라도, 내가 가진 공간 도약의 신비는 즉발성과 연발성 면에서는 그 어느 마법과도 견줄 수 없는 능력이다.

나는 계속 책을 듬성듬성 둘러보며 여러 생각들을 했다.

천궁이 죽인 그 마족은 어디서 튀어나온 놈일까?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원마들 중에 그런 외형을 가지고 있는 녀석은 없다.

그리고 지금껏 잠자코 있던 올테로어에서 갑자기 칼데릭을 들쑤시려고 할 리도 없고.

마왕의 부활과 관련된 게 아닌 이상 그들이 쓸데없이 3군주령 변경을 공격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그래서 아마도 떠돌이 마족일 것이었기에 크게 놈에 대해 신경 쓸 이유는 없지만, 그것과 별개로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곧 마왕이 부활할 거라는 용사와 성검의 경고. 다시 성동으로 돌아간 용사.

게다가 마족뿐만 아니라 아직 처리하지 못한 빌런들과,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대군주까지.

'······이렇게 여유롭게 있어도 되나.'

용사가 성동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카앤을 맡을 사람도 나밖에 없기에, 행동의 자유도 없는 상황이다.

계승자를 맡겠다고 한 건 내가 자처한 일이니 누굴 탓할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성검은 계속 나아가라고 했지만, 좀 뭐라도 도움이 되는 말이나 해줄 것이지······.

"······?"

잡념들이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중, 나는 문득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고서들이 모여있는 책장의 가장 아래 칸에 꽂힌, 하얀 표지의 제목이 없는 책.

왜 갑자기 그 책이 눈에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다.

왠지 모를 묘한 이끌림을 느낀 나는 그것을 뽑아들었다. 수북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책을 펼쳤다.

'마법서네.'

마법서는 마법서인데······ 이게 뭐야?

나는 안에 적힌 내용을 조금 읽다가 금세 덮어버렸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마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누구나 혀를 찰 터무니없는 내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서라기보다 망상서에 가까웠다.

'음?'

그때 품속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카앤은 여전히 2층에 있고 리곤이나 레아는 저멀리 있었다.

나는 서재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서 두루마리 종이를 꺼내들었다.

아카데미에서 용사와 연락을 주고받던 마도구. 용사는 성동으로 가며 이걸 아셸에게 넘겨줬었다.

아셸에게는 급한 일이 있을 때 이걸로 연락을 하라고 언질을 해뒀었다.

'무슨 일이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아셸이 연락해올 일은 없는데. 성에 무슨 일이 생겼나?

나는 종이를 펼치고 안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 론 님, 참모장이 대군주님의 말을 전하러 성에 찾아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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