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감각을 넓혀 뒤쪽에 막힌 통로를 훑었다.
살아있는 기척은 아무것도 없었다. 계약자 놈은 힘이 다했거나 깔려서 죽은 듯했다.
다시 헤피의 혈술을 사용해서 바위 더미 너머로 빠져나갔다.
아까의 갈림길에 다다른 나는 아까 봐두었던 오른쪽 갈림길 안으로 들어갔다.
"······."
갈림길 끝에 다다르자 나타난 건, 웬 넓은 공간에 제단과 같은 구조물이었다.
그 한편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제단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제단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보석이 박혀있었는데, 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끄어어어어······.
나는 그것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걸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끔찍한 영혼들의 절규가 마치 머릿속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놈들이 이런 끔찍한 짓을 한 이유는 여러가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뭔 마법적 실험을 하려 했거나, 아니면 놈들에게 힘을 준 마족에게 바치기 위해서라거나.
"기분 더럽네."
나는 보석을 향해 손을 뻗고 즉살 능력을 사용했다. 영혼들은 곧장 소멸했다.
내가 그나마 해줄 수 있는 일은 더 고통받지 않게 안식을 주는 것뿐이었다.
생존자 확인을 전부 마친 나는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동굴 입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랜이 죽었어······ 나 때문에 죽었다고······.
카앤의 목소리였다.
물론 멀쩡히 살아있는 나는 터벅터벅 걸어서 동굴 바깥으로 나왔다.
주저앉아있는 카앤과, 그 곁에 서있는 리곤과 레아, 유즈가 보였다.
"······어?"
레아가 가장 먼저 날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훌쩍거리며 울고 있던 카앤도 고개를 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너!"
달려들어서 엉겨붙는 카앤을 떼내며 진정시켰다.
리곤이 진이 다 빠진 얼굴로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랜, 어떻게 된 거야?"
"바위에 깔릴 뻔했는데 간신히 피해서 살았어. 옆쪽에 운 좋게 빈 공간도 나서 빠져나왔고."
묘한 눈길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레아가 입을 열었다.
"너 분명······."
"응?"
"······아니야. 진짜 다행이네. 네 덕분에 셋 다 전부 살았어. 고마워."
나는 의심 섞인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그녀는 무시하고, 카앤을 살폈다.
카앤에게서는 아까의 성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다행입니다. 후우, 일단 좀 휴식을 해야겠습니다."
"유즈, 몸은 좀 괜찮아?"
"외상은 없습니다. 마력을 너무 과하게 끌어올려서 탈진이 조금 온 것뿐입니다."
그때 일련의 무리의 기척이 가까워지더니, 새롭게 나타난 놈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정말 쉴 틈을 안 주는군."
유즈와 기사들이 다시금 검을 치켜들었다.
외부에 있있던 놈들인가? 어쨌든 마저 처리하면 그만······.
"······!"
몸을 섬짓하게 만드는 소름 끼치는 기운.
나는 기운의 근원지로 고개를 홱 돌렸다.
숲 저편에, 검고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서 가공할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이내 수풀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등장한 건······ 괴물이었다.
아니, 마족이었다.
놈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사람들 모두가, 그리고 유즈까지도 숨마저 멈춘 채 얼어붙었다.
【Lv. 95】
전신에 뼈 갑옷을 두르고 있는 놈의 몸에선 끊임없이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놈의 레벨을 보고 탄식을 흘렸다.
원마 급의 마족이다. 아까 그 계약자 놈의 주인인가? 뭐 이런 개 같은······.
그때 계약자 집단의 놈들이 마족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시, 신이시여! 당신의 미천한 종자들이······!"
뿌직!
마족이 손을 휘둘러 놈들을 모조리 짓뭉갰다. 핏물이 바닥에 흩뿌렸다.
"쓸모없는 것들이, 제물을 준비해두랬더니 고작 이것뿐이냐?"
마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번엔 이쪽을 쳐다봤다.
"빌어먹을, 힘을 완전히 회복하기만 했어도 이딴 굴욕은······!"
놈이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유즈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모, 모두 도망······."
하지만 누구도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카앤도, 리곤도, 레아도 넋을 놓은 채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나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놈을 막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푸른 섬광이 그대로 놈의 몸을 관통해버렸다. 고요했다.
삐이이이.
천둥처럼 한 박자 늦게 귀가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퍼지고, 이명이 울렸다.
거대한 충격에 대지는 통째로 뒤집어져서 마치 벼락이 떨어진 듯했다.
"큭, 크큭. 도대체 어디까지 쫓아올 생각이냐, 끈질긴······ 놈······."
마족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 온몸이 부스러져 소멸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섬광이 날아든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멀리 떨어져있는 산봉우리 정상.
시각을 최대로 끌어올린 나는 그곳에 서있는 한 사람을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천궁?'
천궁
천궁이 왜 이곳에 있지?
이곳은 칼데릭도, 3군주령도 아니고 세인테아의 영역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풀썩.
다리가 풀렸는지 카앤이 털썩 주저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궁의 일격은 너무 빨라서 그들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테니.
푸른 빛이 번쩍하더니 눈앞의 마족이 죽어버린 게 보인 전부일 것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이다.
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이런 어마무시한 공격을 날린 건가?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방금 천궁이 날린 일격은 게임에서 그의 궁극기 중 하나였던 '섬뢰'일 것이다.
저격이 날아든 방향에서 수십 미터 거리 뒤까지는 길이 뚫린 것처럼 숲이 통째로 증발했다.
나는 다시 천궁이 있던 산봉우리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어디로 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기척이 빠르게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다름이 아니라 그가 오고 있었다.
"······!"
천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넋을 놓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천궁은 사람들을 슥 둘러보고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마족이 소멸한 자리로 다가갔다.
마족이 사라진 자리에는 웬 검붉은 보석 하나가 떨어져있었다.
천궁은 그게 목적이었다는 듯 보석을 집어들었다.
'저건······?'
그것이 아까 동굴 안에서 봤던 사람들의 영혼을 가둔 보석과 비슷하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보석을 챙긴 천궁이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위험하다.
나는 위기감을 느끼며 천궁의 시선을 피했다.
천궁의 눈은 굉장히 좋다. 대군주의 폴리모프도 군주들 중 유일하게 꿰뚫어볼 수 있을 정도로.
설마 들켰나? 지금 내 정체를 알아본 건 아니겠지?
빤히 나를 쳐다보던 천궁의 입이 이윽고 열렸다.
"7군······."
"쿨럭, 쿨럭! 쿨럭!"
나는 거세게 기침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제발 좀 그냥 지나가라, 제발. 더 말하지 마!
옆에 서있던 리곤이 나를 붙잡았다.
"왜 그래, 랜? 괜찮아?"
"아니, 갑자기 사레가······."
나는 필사적으로 천궁을 흘겨보며 계속 기침을 했다.
그러자 천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파앗.
천궁의 모습이 사라졌다. 떠나간 것이었다.
나는 십년감수한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
한바탕 고난이 끝나고 마차를 세워둔 자리로 돌아갔다.
슬슬 해가 저물 시간도 가까워져서 하늘이 노을빛에 물들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이동하는 것도 무리였기에 그대로 야영하고 가기로 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야?"
"비발테 령의 영주에게 부탁해보겠습니다. 일찍 출발하면 내일 정오 중으로 도착할 겁니다."
"영주가 순순히 사람들을 거두어줄까?"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사정을 설명하면 거둬줄 겁니다."
비발티 령은 다음에 도착하는 중간 목적지였다.
유즈는 구출한 사람들을 그곳의 영주에게 맡길 모양이었다. 아직 거리가 많이 남은 본성까지 달고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좀 쉬십시오, 아가씨. 남은 일들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지친 얼굴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몸에 떨림이 안 멈춰. 그 괴물은 대체 뭐였지?"
"어쩌면 마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족?"
"예, 그런 괴상한 생김새에 이질적인 마력을 지닌 종족은 마족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놈들은 아마도 마족을 숭배하는 집단이었을 겁니다."
이제야 알아차렸군.
나는 내 다리에 머리를 깔고 누으려는 카앤을 밀어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그 마족을 쓰러뜨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유즈. 말도 안 되게 강했잖아."
유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오늘 있었던 일은 가주님께만 말씀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게 무슨 소리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남자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유즈가 리곤을 슬쩍 쳐다봤다.
그에 리곤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마도 3군주님이 맞을 거예요. 저도 실제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레아가 깜짝 놀라서 눈이 커졌다.
리곤의 말에 확신을 얻었는지 유즈가 말을 이었다.
"칼데릭의 3군주가 세인테아의 영역에서 마족을 쫓고 있었다, 이번 일에 휘말려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그가 우리를 순순히 보내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벌떡 고개를 든 카앤이 끼어들었다.
"리곤 때문에 보내준 거 아닐까요? 아까 3군주가 리곤이 있는 쪽을 쳐다보던 것 같던데."
정확히는 리곤이 아니라 나였지만 말이다.
레아가 나를 슬쩍 쳐다봤다. 쟤는 또 신경 쓰이게 왜 저래.
"리곤은 7군주님 편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살려준 거죠."
"글쎄, 3군주님이 내 얼굴을 알 리가 없을 텐데······."
리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카앤에게 물었다.
"그보다 카앤, 아까 그 황금색 검기는 대체 뭐였어? 그런 엄청난 걸 숨기고 있었던 거야?"
모두가 궁금하다는 듯 시선을 집중했다.
카앤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머쓱 웃었다.
"미안한데 나도 잘 몰라. 갑자기 몸에 힘이 솟아나더니 그러더라고. 그 다음은 힘이 쭉 빠졌고."
"뭐? 그게 뭐야."
"진짜 나도 모르겠다니까. 내 안의 엄청난 잠재력이 위기의 순간에 폭발한 거 아닐까?"
카앤이 사용한 성검의 힘에 대해서는 나도 아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용사가 성동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다면 성검에 뭐라도 변화가 생겼는지 연락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 자리를 비우는 건 적당히 볼일을 보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즈가 그런 날 보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제가 망을 봐드리겠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아직 숲에 적이 남아있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큰 거라서 그래요. 금방 돌아올게요."
카앤과 리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유즈를 떨쳐내고서 야영지에서 벗어나 숲 깊숙한 곳으로 돌아갔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멈춰선 나는 입을 열었다.
"나와라, 3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