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58화 (158/189)

마족 숭배자들 (4)

"아직도 그 흡혈귀를 못 잡아왔다고?"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의 한가운데 세워진 제단과 같은 구조물.

수하의 보고를 받은 남자의 눈이 살의가 일렁거렸다.

"이 쓸모없는 새끼들. 버러지 같은 새끼들. 고작 재료 하나 제대로 못 관리해서 이 사단을 벌여?"

"죄송합니다!"

"그분께서 곧 오실 거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너희는 물론이고 나까지 전부 다 죽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찾아와!"

수하를 쫓아낸 남자는 손톱을 뜯으며 제단 위를 서성거렸다.

"······왜 이곳에 직접 찾아오신다는 거지? 대체 왜? 왜?"

그분에게 힘을 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의 씨앗을 찾거나, 정보를 조사하고 전달하거나. 항상 충실한 종으로서 명령만 수행했을 뿐.

위대한 존재가 언제 하찮은 미물들에게 관심이나 둔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질 낮은 제물들이라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닥치는 대로 준비해두라니.

전부 제쳐두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가장 강력한 계약자인 남자는 그의 주인과 정신적인 연결을 통해 뜻을 전해받는 게 가능하다.

한데 이전에 계시를 받았을 때······ 그분에게서 느껴진 감정은 다름이 아닌 다급함이었다.

마치, 무언가 두려운 것에 쫓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째서?

아니, 아니다. 감히 그분의 힘에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남자는 신실한 신도처럼 엄숙히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신이시여, 당신의 충실한 종이 영광스러운 현현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

우리는 중간부터 마차에서 내려 이동했다.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년, 헤피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넌 어쩌다 인간들과 함께 살게 된 거야? 다른 동족들은 없어?"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있던 녀석이 대답했다.

"이, 있었어요. 예전에는. 그런데 다른 부족들의 침략해서······ 저는 도망쳐서 떠돌다가 인간들이 사는 곳까지 오게 됐어요."

부족들 간의 전쟁인가?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에 도와줬던 뱀파이어 자매도 그런 사정이 있었지.

"친절한 주민들이네."

세인테아의 영역에 흘러들어온 뱀파이어가, 뱀파이어를 적대하지 않는 마을을 만나서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보통은 죽거나 팔려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응?"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 일만 시키는 사람들이에요. 욕하고, 걷어차고, 일을 제대로 못하면 굶기고. 절 받아준 것도 그렇게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그런 건데요."

의외의 이야기에 모두가 헤피를 쳐다봤다.

카앤도 황당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허, 뭐야. 그런 나쁜 사람들이었어?"

나는 자연스레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너는 혼자 안 도망치고 마을 사람들을 굉장히 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마을 사람들이 죽으면 자기가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건가?

헤피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보다 한 명 꼭 구하고 싶은 애가 있어서······."

"구하고 싶은 애?"

"엔마라는 여자애예요. 마을에서 제 유일한 친구예요. 그 애만큼은 항상 절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아, 그런 거였나.

나는 얼추 상황을 이해했다.

잠자코 헤피의 이야기를 듣던 레아가 카앤을 쳐다봤다.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참 대단한 인간들을 구하게 생겼네. 안 그래?"

카앤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나도 갑자기 기운 빠지긴 하는데, 그래도 어쩌겠어? 해야지."

"대단한 영웅 납셨어."

나는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또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놈들한테서 용케도 혼자 탈출했구나."

"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자세히 알려줄 수 있어?"

헤피가 머뭇거리다가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헤피의 손이 붉은 피로 녹아내리듯 변하더니 허공에 둥둥 떠다녔기 때문이다.

'혈술?'

몸을 혈액으로 변환시키는 혈술, 예전에 본 적이 있던 혈술이었다.

엘로드 숲 뱀파이어 부족의 족장이 사용했던 능력이 아닌가.

"우, 우와! 그게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카앤이 호들갑을 떨었다. 팔을 원래대로 되돌린 헤피가 설명했다.

"이게 제 능력이에요. 뱀파이어는 자기 피로 여러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헤에······."

나는 넌지시 물었다.

"혈술이라고 하는 거지? 근데 어린 뱀파이어는 혈술을 못 사용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너 아는 게 많네? 랜."

"이종족 백과사전에서 읽은 적이 있거든."

"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감옥에 갇혀있는데 갑자기 능력을 각성해서 쓸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감시가 허술한 틈에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어요."

목숨의 위기에서 혈술을 각성하기라도 한 건가?

카앤이 피로 변했던 소년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친구는 우리가 꼭 구해줄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헤파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의 다 왔어요. 이 방향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동굴이 나와요."

"좋아. 그럼 일단 여기서 멈춘다."

모두를 멈춰세운 유즈가 말했다.

"아가씨, 그리고 친구 분들. 이제부터는 부디 제 말에 따라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좋습니다. 우선 소년의 말대로면 사람들이 갇혀있는 곳까지의 통로 구조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헤피에게 들은 설명에 따르면, 계약자 놈들의 근거지는 동굴 내부에 지하굴처럼 나있다.

안쪽의 일자 통로로 들어가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그중에 왼쪽이 사람들이 갇혀있는 장소였다.

"적들의 정확한 숫자도, 함정 장치의 유무도 파악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가씨와 친구 분들은 바깥에 남겨두고 저 혼자 동굴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것만큼은 싫어, 유즈."

"예, 어쩔 수 없이 흩어질 수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근처를 배회하는 적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전위에 서고, 기사들이 후방에, 그리고 아가씨하고 친구 분들은 중간에서 이동할 겁니다."

유즈가 레아를 쳐다봤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아가씨께서는 그걸 사용해서 몸을 지키십시오."

"알겠어."

레아가 팔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녀가 평소에도 거의 늘 차고 다녔던 팔찌였다.

꽤 거대한 마력을 숨기고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보통 마도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짧은 작전 회의를 끝내고 우리는 적들의 근거지에 다다랐다.

한참 앞장서서 걷던 유즈가 돌아와서 기사들에게 말했다.

"동굴을 발견했다. 입구에 경비를 서고 있는 인원이 둘 보이니 먼저 내가 기습해서 처리한다."

유즈가 먼저 나아가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이동했다.

잠시 뒤,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파육음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이윽고 수풀 사이로 모두의 시야에 동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앞에 서있는 유즈와 적들의 시체도.

"동굴 안쪽에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 이제부터 너희는 후방을 철저히 지켜라."

유즈의 명령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앤을 포함한 애들도 긴장을 끌어올렸다.

앞서 계획한 진형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유즈의 말대로 안쪽에 또 다른 입구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마. 이 철문을 지나서 왼쪽의 갈림길이라고 했지?"

"네, 네. 맞아요."

헤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막길로 이어진 철문. 유즈가 철문을 향해 강력한 검기를 쏘아냈다.

콰아아앙!

철문이 산산히 박살남과 동시에 유즈가 앞장서서 돌진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달렸다.

통로 천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불빛이 달려있었기에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습격이다!"

일자 통로를 따라서 달리자 곧 안쪽에서 적들이 몰려나왔다.

유즈가 다시 마력을 끌어올려 전방으로 검기를 쏟아부었다. 가로막는 적들의 몸이 모조리 찢겨나갔다.

유즈의 공세는 아까의 전투보다도 훨씬 매서웠는데, 그건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적들에게 둘러싸였던 아까와 달리 이번엔 우리는 전부 뒤에, 적들은 전부 앞에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휘말릴 걱정할 필요 없이 힘조절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우리는 조금의 충돌도 없이 안전하게 유즈의 등만을 바라보며 달리기만 했다.

'섬세한 제어력이군.'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유즈는 최대한 통로 외벽에는 충격을 주지 않고 있었다. 만약 벽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튀어나오는 적들은 전부 40, 50레벨대의 피라미였다.

아까 두 놈처럼 마족의 힘을 직접 사용하는 놈은 없었기에 전진은 조금의 막힘도 없이 순조로웠다.

나는 초감각을 퍼뜨려 혹시 모를 함정이나 적들의 위치를 찾았다. 별달리 걸리는 건 없었다.

그나저나 숲 한가운데에 이런 지하굴을 만들어서 기지 삼고 있었다니, 어지간하네.

"저기예요!"

적들을 모조리 쓸어넘기며 나아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헤피가 말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나는 아까부터 코를 찌르던 시체 썩는 냄세에 오른쪽 갈림길을 바라봤다.

일단은 왼쪽 갈림길에 있다는 사람들의 구출이 우선이었다. 우리는 왼쪽 갈림길로 나아갔다.

"······저기 있다! 사람들이다!"

카앤이 소리쳤다. 그 말대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보였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사람들의 수는 대략 서른 명 정도였다.

우리가 감옥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의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히, 히익!"

"진정들하게, 구하러 온 거니까."

스겅!

유즈가 가볍게 감옥의 철창들을 베어서 사람들을 나오게 해주었다.

옆에서 누군가를 찾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헤피가 화색을 띠며 소리쳤다.

"엔마!"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한 소녀가 헤피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피!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뭐긴 뭐야, 구하러 온 거야! 이분들이 우릴 잡아온 놈들은 전부 쓰러뜨려주셨어!"

서로 얼싸안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다.

사실 헤피를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었기에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녀석의 이야기는 전부 진실이었던 듯했다.

"거동이 불편한 자는 없는가? 그럼 다들 서둘러서 움직이게. 이곳에서 빠져나갈 테니."

"예, 예! 알겠습니다, 나으리!"

사람들은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으로 유즈의 말에 따랐다.

그때 엔마라는 소녀가 다른 사람들을 챙기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 나으리. 그런데 저희 말고도 또 다른 장소에 끌려간 사람들이 있어요."

소녀의 말에 사람들 중 한 명이 버럭 소리쳤다.

"엔마, 그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데······."

"그야 뻔한 것 아니냐? 그보다 여기 살아있는 사람들 목숨이 우선이지! 나으리를 방해하지 말거라!"

"맞아! 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데비 아저씨의 동생도 끌려갔잖아요! 그런데 걱정도 안 돼요?!"

말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을 레아가 한심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보다 끌려간 사람들이라고 하면 오른쪽 통로에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겠으니 우선······!"

곧 유즈도 굳은 표정으로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의 발소리였다.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사람들의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아아······."

【Lv. 75】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웬 사제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늙은 남자였다.

남자가 양손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로 들어올렸다.

"아, 아아! 감히! 이 하찮은 벌레 놈들이······!"

놈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며, 사악하고 끈적한 마력이 공간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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