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57화 (157/189)

마족 숭배자들 (3)

쓸데없이 눈치가 좋다. 아니, 내가 좀 안일했던 건가?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저기, 진짜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숨기기는 내가 뭘?"

"······."

"아니, 그러니까 니 말은······ 사실은 내 마법 실력이 마차에 날아든 공격을 몰래 막아줬을 만큼 뛰어나다고 하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걸 너희한테 숨기고 있고? 내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는데?"

나는 목을 긁적이며 레아를 정말 이상한 놈 보듯 쳐다봤다.

내 표정 연기는 제법 먹혔는지, 녀석도 긴가민가했던 건지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 레아, 너 대체 무슨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시끄러! 아니면 됐어. 아무것도 아니니까 잊어버려."

레아는 그렇게 소리치며 자리를 떠버렸다.

카앤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던 리곤이 다가와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얘기 나눴어?"

"별일 아니야."

그때 유즈가 레아에게 다가가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기습 공격이 날아들었던 방향에서 또 다른 시체들을 확인했습니다."

"······시체?"

"예. 같은 패거리의 놈들인 듯한데 상태가 조금 이상합니다. 주위에 전투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고, 시체에 외상도 전혀 없습니다. 대체 이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유즈가 말하고 있는 건 아까 내가 죽인 놈들이었다.

레아가 홱 고개를 돌려서 날 쳐다봤다. 나는 못 본 척 그녀의 시선을 무시했다.

"유즈 님! 이리로 와주십시오!"

그때 목숨을 붙여둔 놈들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다급히 유즈를 불렀다.

"무슨 술수인지 전부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죽은 시체들을 노려보던 유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심문으로 별다른 성과는 얻어내지 못할 듯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서둘러서 이 숲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습격을 받을지 알 수 없으니 그게 최선일 터였다.

그렇게 마차는 곧장 다시 출발했다.

카앤이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즐거운 여행이었는데 이게 다 뭔 일이냐······."

"그러게.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숲을 나갈 때까진 우리도 제대로 경계하자."

카앤과 리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레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는 그 마음을 짐작했다. 자신이 초대한 여행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속이 좋을 리 없었다.

"걱정하지 마. 너희 안전은 헤리윈의 명예를 걸고 끝까지 책임질게."

"응?"

카앤이 그런 레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뭐야아? 니가 그렇게 다 소심해지고."

"······소심해진 적 없거든?"

"괜찮아, 괜찮아. 안 어울리니까 평소대로 가자. 이런 것도 다 인생 경험이지, 뭐."

"진짜 짜증나네."

좀 무거워졌던 분위기는 카앤 덕분에 금세 다시 풀렸다.

나는 초감각을 끌어올려 넓게 주위를 살폈다.

내 감각의 최대 반경까지도 걸리는 놈들은 없고, 당장 또 습격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

달리던 마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로 멈춰선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길목에 웬 어린 소년이 쓰러져있었다.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소년을 살펴보던 유즈가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나도 소년을 빤히 내려다봤다.

마족 계약자 놈들의 습격에 이어 이건 또 무슨 일인지.

흑발, 적안, 그리고 입술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

다름이 아니라 소년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였다.

"인간······ 이 맞나?"

카앤이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즈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뱀파이어인 것 같습니다."

"아, 역시 인간이 아니에요?"

"예. 다른 생물의 피를 식사로 일삼는 위험한 종족입니다."

칼데릭에서도 보기 드문 뱀파이어가 왜 세인테아의 땅에 있지?

뱀파이어 소년은 몸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어 꽤 처참한 몰골이었다.

계속해서 소년을 경계하며 살펴보기만 하는 유즈를 보며 카앤이 재촉했다.

"저, 어쨌든 빨리 치료부터 해줘야 되지 않을까요?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유즈가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나는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았다. 그야 뱀파이어니까.

뱀파이어라는 종족에 대한 인식은 칼데릭이나 세인테아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습격까지 받고 상황이 이런 와중이니 그의 입장에선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레아가 입을 열었다.

"치료해주자, 유즈."

"상황이 너무 미심쩍은 구석이 많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뱀파이어는······."

"어린애잖아. 그렇다고 다친 애를 내버려두고 그냥 가자고?"

나는 껴들어서 말했다.

"혹시 습격자들과 관련이 있다면 뭐라도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으음······."

그러고 보니 아까 놈들은 무언가를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마족 계약자들의 조직의 습격과, 쓰러져있는 뱀파이어.

둘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우연일 가능성은 당연히 적어 보였다.

결국 유즈는 마차에서 약제들을 꺼내 뱀파이어 소년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서둘러야는 했지만 마차에 태워서 가기도 그렇고, 일단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 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년이 깨어났다.

소년이 실눈을 뜬 채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피, 피······."

그 중얼거림에 유즈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갑자기 공격하려 들 수도 있으니 물러서계십시오."

"에이, 이런 꼬마가 공격하긴 뭘 공격해요? 너무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잖아요."

"뱀파이어는 피를 다뤄 특이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종족입니다. 그러니······."

어린애라서 아마 아직 혈술은 못 사용할 텐데.

나는 슬쩍 소년의 옆에 주저앉아서 소매를 거두고, 맨 팔뚝을 입가에 내밀었다.

레아가 당황해서 물었다.

"잠깐, 너 뭐 해?"

"피를 못 마셔서 기운이 없는 거잖아? 빨리 정신 좀 차리게 하려고."

"랜! 그래도 그건 좀 위험해 보이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유즈, 빨리 말려!"

레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소년이 먼저 내 팔뚝을 물었다.

"앗······!"

나는 태연한 얼굴로 보란 듯이 사람들을 돌아봤다.

"괜찮다니까요. 피 좀 빨린다고 안 죽어요."

모두가 당황스러움 섞인 얼굴로 내 피를 빨아먹는 소년을 구경했다.

한 명, 혼자서만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카앤이 내 옆에 주저앉았다.

"재밌겠다. 내 피도 줄래."

"······재밌으려고 하는 일이냐? 보고나 있어."

이내 흡혈을 끝낸 소년은 훨씬 기운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가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유즈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즈가 한숨을 내쉬며 검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우리는 숲을 지나던 행인이다. 네게 적의는 없으니 안심하거라. 왜 이런 곳에 쓰러져있었느냐?"

겁 먹은 기색이었던 소년은 그제야 조금은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소년이 갑자기 몸을 수그리더니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발 좀 도와주세요!"

"돕다니 무얼? 이미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사악한 마법사들에게 붙잡혔어요. 도와주세요, 제발······!"

사악한 마법사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일단 소년을 진정시킨 뒤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직 정신을 덜 차려 횡설수설한 소년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웬 괴한들이 소년이 살고 있던 마을을 습격해서 주민들을 전부 죽이거나 잡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이 근처에 위치한 놈들의 근거지에서 홀로 겨우 탈출해서 도망쳐나온 거라고.

유즈가 물었다.

"혹시 그 괴한들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느냐?"

"네, 네! 맞아요!"

소년이 말하는 괴한이란 아무래도 그 습격자들이 맞는 듯했다.

'마족의 계약자 집단이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건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은 아니었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놈들이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납치하는 것 정도야.

이해가 힘든 점들은 오히려 이 뱀파이어 소년에게 더 많이 있었다.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소년에게 물었다.

"그, 마을 사람이라면 혹시 다 너처럼 뱀파이어를 말하는 건가?"

"아, 아니요. 전부 인간이에요. 뱀파이어는 저뿐이고요."

"너는 뱀파이어잖아. 그런데 인간들의 마을에서 인간이랑 섞여 살았다는 거야?"

소년이 주눅든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가 있나?

세인테아 땅에서 뱀파이어를 본 것부터 신기한데, 그런 뱀파이어를 수용하고 사는 마을도 있었다니.

나는 그 자세한 사정이 궁금했지만 유즈가 소년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그 괴한들이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을 납치한 건지 알고 있느냐?"

"그게······ 잘 모르겠어요. 무슨 제물을 바친다고 하는 얘기를 떠드는 것만 들었어요."

제물?

소년이 다시 애원을 시작했다.

"감옥에서 다른 곳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다시는 안 돌아왔어요. 아마도 전부 죽었을 거예요. 제가 도망친 탓에 그놈들이 화나서 남은 사람들까지 다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제발 도와주세요!"

잠시 침묵하던 유즈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어쩔 수 없지만 우선 이 소년을 데리고 이동하는 게······."

"당연히 그럴 거야. 근데 그 습격자들에게 붙잡혀있다는 주민들은?"

"본성에 도착한 후에 바로 병력을 파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직 본성까지는 한참 남았잖아."

레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유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레아 아가씨, 아가씨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

"소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주민들은 안타깝지만, 지금 이대로 구하러 가기는 어렵습니다. 이 소년의 말의 진위도, 적들의 규모도 모든 게 불확실합니다."

"거, 거짓말이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유즈가 소년을 돌아봤다.

"미안하다. 네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유즈의 말은 정론이었다.

적들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근거지로 처들어간다니, 보통은 미친 짓이다.

레아까지 지켜야 하는 입장인 그가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때 카앤이 끼어들었다.

"유즈 씨, 그래서 안 도와주실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아까 전 놈들도 어렵지 않게 처리했잖아요. 그런데 레아의 안전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서요?"

"그렇습니다. 제게 실망하셨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카앤이 유즈를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알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야, 너 이름이 뭐야?"

"······헤피."

"좋아, 헤피. 난 카앤이야. 나 혼자라도 갈 테니까 그놈들 근거지가 어딘지 가르쳐줘."

얼씨구.

나나 리곤보다 레아가 먼저 카앤을 불렀다.

"야, 너!"

"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혼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사람들을 구해야지. 난 이대로 가던 길 가기 싫거든. 여기까지 여행 재밌었다."

레아가 카앤을 노려봤다.

나도 카앤에게 말했다.

"카앤, 네 실력으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까 전보다도 더 강한 놈들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면 별 수 없지. 근데 아까 놈들이 전력의 전부였을 수도 있잖아. 난 거기에 기대를 걸어볼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목숨이 안 아까워?"

카앤이 날 쳐다봤다.

"랜,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전에 했던 그 마법 검 이야기."

"······?"

"내 전부를 희생해서 사람들을 돕느니 뭐니, 그건 여전히 감이 안 와도 말이야, 적어도 위험에 처한 사람들 외면하고 지나가는 건 싫어. 내 목숨 아까운 건 아는데 그건 그냥 싫어."

나는 실소를 흘렸다.

"그게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는 거야, 멍청아."

왠지 이 녀석이라면 억지를 부릴 것 같았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내가 카앤의 곁으로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리곤까지 따라왔다.

카앤이 짐짓 놀란 듯 물었다.

"너희 둘도 할 거야?"

"그럼 너만 남겨두고 가리? 가자."

그 모습을 보며 유즈는 어이가 가출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야 그의 눈에는 철부지들의 철없는 행동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마족의 떨거지들을 처리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었고, 뭐라도 이벤트가 발생한다면 좋았기에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레아, 그럼 간다. 만약 우리가 죽으면 나중에 시신은 잘 챙겨줘."

레아가 입술을 깨물며 유즈를 돌아봤다.

"이런 모욕을 받고 그냥 가자고? 헤리윈 가문의 명예가 땅에 처박히겠네."

"아가씨······."

"나도 안 가. 유즈가 안 오겠다면 넷이서 사이좋게 죽을게."

유즈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

"너 진짜로 너만 보냈으면 어쩌려고 했어?"

"저 콧대 높은 녀석이 그렇게 둘 리가 없잖아, 하하."

"닥쳐. 만약 유즈나 기사들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넌 평생 용서 안 할 거야, 카앤."

소년을 태운 마차가 적들의 근거지를 향해서 나아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