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55화 (155/189)

마족 숭배자들 (1)

수십 년 전, 마족의 침공으로 시작됐던 대전쟁의 끝은 마족들의 체계와 구도 또한 크게 바꿔놓았다.

모든 마족들의 구심점이었던 마왕의 부재로 찾아온 혼돈과 무질서.

그를 정리하고 올테로어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건 단 한 명의 마족이었다.

원마 서열 1위, 아즈켈.

마왕의 최측근이었던 아즈켈은 틈을 타 분란을 일으키고 반항하는 마족들은 모조리 힘으로 숙청했다.

원마라는 새로운 수뇌부 체계를 만들었으며, 마왕의 부활을 목표로 다시금 마족들을 단결시켰다.

물론 아즈켈을 따르는 마족들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마족들 중엔 현재의 원마들만큼이나 강력한 마족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중 아즈켈에게 거스른 자는 결국 대부분이 죽었지만 살아남은 이들 또한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변방의 황무지를 떠돌거나, 혹은 아예 올테로어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크큭. 크크크. 고작 이게 끝이냐?"

3군주령 북쪽의 변경, 오프 요새.

산산히 무너져 폐허가 된 요새에 터지고 찢긴 시체들로 대지는 붉게 물들었다.

시커먼 골갑과 같은 것을 전신에 두른 마족이 자신이 벌인 참상을 감상하며 웃음을 흘렸다.

"온통 벌레들뿐이군. 슬슬 지루해. 얼마나 더 죽이고 다녀야 큰 놈이 오는 거냐?"

그 마족은, 과거의 전쟁 때 마족 진영에서 그보다 강한 이가 열이 넘지 않았을 정도의 강자였다.

비록 종전 후 아즈켈에게 대립하다 목숨만 건져 올테로어를 도망쳐나온 패배자일지라도 말이다.

고통스러운 인내의 세월이었다. 고향 바깥의 땅에서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숨어다니기만 한 건.

과거의 힘을 얼추 회복한 지금, 그는 길었던 잠적을 꺠고 서서히 행동에 나서려 하고 있었다.

당장 다시 올테로어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아즈켈, 그 괴물을 넘어서는 건 힘을 회복했어도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목표를 바꿨다.

현재의 세상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벌써 과거의 공포를, 자신들의 존재를 잊었다.

가증스러운 용사만 아니라면 진작에 절멸당했을 멍청하고 약해빠진 쓰레기들.

적당히 강한 벌레들을 사냥하면 지금보다 더욱 힘을 쌓고 강해질 수 있다.

그아아아아······.

끔찍한 영혼들의 절규. 마족이 손에 들린 검붉은 보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다려라, 내가 올테로어로 돌아가는 날······."

그는 중얼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태연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주위를 둘러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거하게도 저질렀구나, 마족."

"고작 이 정도로? 찢어발기는 손맛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마족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읽고 히죽 입을 찢었다.

"이제야 기다리던 게 왔구나. 네가 칼데릭의 3군주라는 놈이냐?"

3군주, 천궁이 한 시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칼데릭 한복판에서 날뛰기에는 대군주가 많이 두려웠던 모양이야. 답게 비루한 짓거리를 하는군."

"크큭, 죽기 전에 좋을 대로 지껄여둬라."

마족이 손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거체를 일으켰다.

"천궁이라고 불린다지? 쥐새끼마냥 멀리서 활을 쏘는 게 특기라도 들었는데, 내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이제 어쩌겠느냐?"

몇 걸음 다가가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천궁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걱정할 것 없어."

그의 손목의 팔찌가 꾸물거리며 순식간에 활의 형상으로 변했다.

"지금부터 네 몸뚱이가 갈기갈기 땅에 흩뿌려질 때까지, 넌 이 간격을 조금도 못 좁힐 테니."

***

아카데미의 휴학기가 시작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향과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레아는 방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앞으로 도착한 편지를 읽었다.

- 아카데미 생활은 어땠느냐? 설마 아직까지도 친구 한 명 못 사귀었으면 이 오라버니는 실망이 크다.

- 곧 유즈 경이 그쪽에 도착할 테니 빨리 집으로 오거라. 데려올 친구 있으면 최대한 많이 데려오고.

장난기가 한가득 묻어나오는 내용에 레아는 눈쌀을 찌푸리며 편지를 도로 접어버렸다.

"친구는 무슨······."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는 괜한 천장만 노려봤다.

편지를 읽자마자 머릿속에 생각난 사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난 후에도 레아는 리곤과 간간이, 아니, 적지 않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마주칠 때마다 나란히 서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남는 시간에는 리곤이 있을 만한 곳을 은근히 찾아다니게 됐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며 부정한 그녀였지만, 이제는 그냥 인정했다.

리곤과 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

인정하고 나니 자존심은 조금 상했지만 그게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리곤은 자신에 버금가는 천재다. 뛰어난 인재였다.

지금까지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던 건 수준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였을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자신의 태도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면 친하게 지내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지. 그런 것뿐이야.'

게다가 칼데릭 쪽의 유망주와의 친분은 어디서 쉽게 쌓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훌륭한 인맥이다.

지금껏 살면서 인맥의 '인'도 신경 써본 적이 없던 레아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어차피 걔는 휴학기 동안에도 아카데미에만 있을 거고.'

리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칼데릭과 세인테아를 편하게 왔다갔다 넘나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너희 집에 같이 가자고?"

저녁 시간에 리곤과 마주친 레아는 타이밍을 보고 슬며시 이야기를 꺼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리곤의 반응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다급히 준비한 말을 뱉었다.

"세인테아의 귀족들은 은원에 민감하거든? 그러니까 내 명예를 위해 시험에서 빚을 갚으려는 것뿐이야. 네가 날 도와주기도 했고, 내가 못해서 지기도 했고."

"아니, 그거야 랜이 너무 예상 밖이었고 네 잘못이······."

"아무튼 갈 거야, 말 거야? 손님 대접은 확실히 해줄게. 너 어차피 휴학기 동안 갈 곳도 없잖아?"

리곤이 머리를 긁적였다. 레아는 팔짱을 끼고서 태연한 척하며 그를 곁눈질했다.

"으음, 초대해준다면야 나야 좋은데. 근데 나 혼자만 가? 다른 애들도 같이 가면 안돼?"

"응?"

"랜하고 카앤은 나처럼 아카데미에 남아있는다 했거든. 바이온이나 에스카는 집으로 간다 했지만."

······그 녀석들도 아카데미에 남아있었나?

솔직히 내키진 않았지만 거절하면 리곤도 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둘 정도 더 붙여가는 거야 수용 가능한 범위였다. 어쨌든 리곤이 간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레아는 들뜬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건 없지. 마음대로 해."

***

방 침대에 멍하니 누워서 쉬고 있는데, 돌아온 리곤이 이상한 말을 해왔다.

"······레아가 우릴 집으로 초대했다고? 헤리윈 가문?"

"그래."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가 이내 상황을 짐작했다. 요즘 둘이 친하게 지냈었지.

"너만 같이 가자고 물어본 건데 네가 다 같이 가자고 한 건 아니야?"

"하하, 들켰네."

리곤이 머쓱하게 웃었다.

"걔도 나쁜 애는 아니야. 이번 기회에 너나 카앤도 친해지면 좋잖아."

"뭐, 아무렴 상관은 없는데······."

방금까지 어제 성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운명의 변화고 자시고는 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어도, 성검은 적어도 내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그건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정말 이대로만 가도 상관없다는 건가? 성검의 계승을 위해 골머리를 싸맬 필요 없이?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인가······.'

어쨌든, 휴학기 동안 아카데미에 박혀있는 것보단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지. 그러면 뭐라도 이벤트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리곤이 물어온 외출 건은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그래, 가자. 카앤한테도 물어보고 와."

"아까 오면서 마주쳐서 이미 물어봤어. 듣자마자 좋다고 신났던데."

그렇게 바로 다음 날 점심, 우리는 짐을 싸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목적지는 헤리윈 가문의 본성이 있는 바욘터 령. 들어보니 꽤 먼 길이었다.

아카데미 정문으로 모여서 나가니 이미 마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아 아가씨.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웬 집사 차림의 노인이 레아를 맞이했다. 보이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 기사 두세 명 뿐이었다.

위세 대단한 명문가치고는 꽤 검소한 마중이다 싶었는데, 집사가 어째 보통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Lv. 71】

평범한 하인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레벨.

기사단장쯤 되는 자리나 맡아야 할 사람이 왜 집사 노릇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남의 집안 일을 관심 가질 건 아니었다.

집사의 시선이 뒤쪽에 서있는 우리에게로 시선을 옮겨왔다.

"한데 저분들은······?"

"내 친구들이야. 휴학기 동안 집에 손님으로 초대하는 건데, 상관없지?"

그 말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친구분들 모두 한 치의 불편함도 없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오버하지 말고 빨리 짐이나 실어줘."

"예, 허허허. 마차 자리도 충분합니다. 이거 큰 마차를 끌고 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허허허허."

레아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먼저 마차의 안쪽 자리에 올랐다.

집사가 우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헤리윈 가의 집사인 유즈라고 합니다. 저희 아가씨와 친하게 지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 예."

"그럼 먼 길 가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짐을 싣고 마차에 한 명씩 올랐다.

곧장 출발한 마차는 도시의 성문을 통과한 뒤 가도를 따라서 빠르게 달렸다.

"이야, 푹신하다."

카앤이 신난 기색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레아가 바로 한마디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좀 가만히 있어."

"알았어. 근데 진짜 의외다."

"뭐가?"

"친구는 필요 없느니, 수준에 맞지 않느니 전에 그런 말까지 해놓고 우릴 집에 초대를 다 하고."

레아가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기색으로 히죽거리는 카앤을 쳐다봤다.

들으면 대놓고 돌리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얜 그냥 이런 성격이었다.

"착각하지 마. 나는 너희가 아니라 리곤을 초대하고 싶었던 거거든?"

"뭐가 달라?"

"리, 리곤은 나와 어울리기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야. 너랑 다르게!"

리곤이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앤은 콧소리를 흘리며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아무렴 어때. 너희 가문 되게 대단한 가문이라며. 도착하면 맛있는 거 많이 먹겠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나는 창틀에 턱을 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앞머리를 슬슬 흔들었다.

***

가는 동안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은 의외로 카앤 다음으로 레아였다.

카앤이 심심해서 아무 말이나 뱉으면 거기에 가장 반응이 좋은 게 레아였기 때문이다.

"근데 왜 하필 마차지? 다른 몬스터도 길들여서 몰고 다니면 말보다 훨씬 빠르지 않을까?"

"제발 나까지 멍청함이 옮을 것 같은 소리 좀 그만해."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나나 리곤은 평소에도 같이 어울렸으니 대충 흘리는 게 익숙했지만 말이다.

"칼데릭에서는 몬스터 마차가 드문 건 아니야. 길들이는 비용과 기술이 엄청 든다고 들었지만."

"봐봐, 들었지? 리곤이 그렇다잖아."

좀 지나서는 레아도 상대하기가 지쳤는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레아는 리곤이 칼데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았는데, 카앤은 끈질기게 둘의 대화에도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대충 그런 분위기였다.

간간이 휴식도 하며 나아간 마차는 해가 질 즈음 멈춰서서 자리를 잡았다.

집사 유즈가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홀로 신속하게 야영 준비를 마쳤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참 고급 인력을 잡일에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동안 아셸과 함께 돌아다니며 그녀를 부단히도 부려먹은 내가 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거 맛있어요! 고기에 소금 말고 또 뭘 뿌린 거예요?"

"제 비법 양념이라고 할까요, 허허. 비밀입니다."

유즈의 요리는 훌륭했다. 따뜻한 수프와 고기 구이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갔다.

유즈는 굉장히 넉살이 좋은 편이었기에 카앤이나 리곤도 금세 편하게 그와 말을 나눴다.

"후, 진짜."

불빛 때문에 주위에 꼬이는 벌레들에 레아가 짜증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유즈는 그 모습을 보다가 우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세 분은 모두 야영에 익숙해 보이십니다. 저희 아가씨와는 다르게."

"아, 저는 산에서 살았었거든요."

카앤이 대답했다.

야영이 익숙한 건 나야 말할 것도 없었고, 리곤이야 뭐 인생 자체가 안 평탄했으니.

"리곤, 너는?"

그때 레아가 갑자기 리곤을 콕 집고서 물었다.

아까 마차에서부터 묻는 걸 봐서 어지간히 리곤의 칼데릭 생활이 궁금한 듯했다.

리곤은 그냥 얼버무리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나는······ 훈련 같은 걸 받을 때 야외에서 많이 활동해서."

"훈련이라면 무슨 훈련?"

"기사 훈련이라고 할까. 대충 그런 거야."

"뭐? 기사 훈련? 그거 뭔가 멋진데?"

카앤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끼어들었다.

"근데 기사면 무슨 기사인데? 7군주의 휘하 기사단이야?"

"······7군주?"

유즈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아직 리곤이 칼데릭 출신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레아가 리곤의 눈치를 보고서 유즈에게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이상한 오해하지 마, 유즈. 리곤은 출신과 관계없이 그, 좋은 애니까."

유즈는 설명을 듣고 조금 놀란 기색일 뿐, 적대감이나 불쾌감 같은 건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이거 아가씨가 굉장한 친구 분을 사귀셨군요, 허허."

카앤이 말했다.

"야, 리곤. 이왕 얘기 나온 김에 좀 더 들려주면 안돼?"

평소에도 리곤은 자신에 대한 얘기를 물으면 은근히 피하곤 했었다.

나야 대충 그 이유를 알지만 카앤이나 다른 애들은 알 턱이 없었다.

"뭐, 못해줄 건 없는데······."

리곤은 슬쩍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4군주령에 있을 때의 끔찍한 이야기는 제외였다.

내게 어떻게 목숨을 구해진 건지는 적당히 얼버무린 리곤은 군주성에서의 생활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칼데릭의 7군주는 되게 좋은 사람 같네. 아, 네 말만 들으면 말이야."

카앤은 입이 근질근질한 기색이었다. 좀 참아라.

흥미롭다는 얼굴로 리곤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레아도 거들었다.

"의외기는 하네. 칼데릭의 군주라고 하면 보통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일 것 같은데."

"그런 군주들도 있지. 하지만 7군주님께서는 달라. 그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나는 홀로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잠자코 식사나 했다.

식사가 끝나고는 슬슬 잘 준비를 했다.

마차가 크기는 해도 4명이 편히 누워 잘 수는 없었기에 유즈가 바깥에서 잘 침구 준비를 해주었다.

장작 타는 소리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카앤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야, 랜."

나는 자는 척 대꾸하지 말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너가 전에 그런 얘기 한 적 있었잖아? 내 모든 걸 희생해서 세상을 구하려면 구할 수 있겠냐고."

······역사 수업 때 이야기인가. 갑자기 그건 왜?

"그랬지."

"들어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아마 대단한 마법 검 같은 걸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근데 그 검을 나한테 물려주고 싶어하는데, 그 검을 사용하려면 나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을 지켜야만 한대."

나는 순간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뭐지? 용사가 성검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건가? 아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럴 리가.

카앤이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성검이라는 사실만 빼고 그런 말을 한 듯했다.

"신기한 검이네."

"그렇지? 그거에 대해 생각하니까 네가 했던 이야기도 문득 생각나더라고. 비슷한 얘기잖아?"

"······."

"그래서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까, 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했어. 넌 어떻게 생각해? 그게 무슨 뜻일까?"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네가 행동하는 신념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거 아닐까. 그건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흐음, 신념이라······ 그런가?"

그리고 카앤은 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고민에 잠긴 건가 했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가 울려퍼졌다. 잠들었네.

***

여행은 계속해서 순탄하게 이어졌다. 도적 무리나 몬스터를 마주치는 일은 없이.

그러다 숲길을 가는 도중 몬스터 무리가 한 번 튀어나왔는데, 기사들이 나서서 순식간에 처리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원래 몬스터가 꽤 서식하는 숲인데, 금방 다시 관도로 빠져나갈 겁니다."

유즈는 우리가 불안해할까봐 그런 말을 했는데, 여기에 몬스터 좀 마주쳤다고 그럴 사람은 없었다.

몬스터 사체들이 길을 막았기에 우리는 잠시 마차에서 내려서 휴식했다.

카앤은 심심했는지 오히려 신난 기색으로 기사들이 사체를 치우는 걸 구경했다.

"또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제가 처리할게요. 저도 산에서 몬스터 사냥하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허허, 그러십니까. 그래도 손님께 수고를 끼칠 수는 없으니 기사들에게 맡겨주시······."

인자하게 웃던 유즈가 갑자기 한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레아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왜 그래?"

"······."

유즈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이쪽은 더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 놈들이야?'

아무래도 단순한 도적 무리는 아닌 듯한데.

유즈가 마차 안에서 검을 하나 꺼내들어 오고서 말했다.

"모두 마차 안으로 들어가계십시오."

"뭔데? 대체 무슨 일인데?"

"별일 아닙니다, 아가씨. 저와 기사들이 금방 정리할 겁니다."

유즈가 떠밀었기에 우리는 일단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세 명의 기사가 마차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숲이 잠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스스스.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과 함께 이내 수풀에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일련의 괴한 무리가 마차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