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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54화 (154/189)

성검 (2)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린지 성숙한지 분간하기도 힘든 이질적인 목소리.

심장이 두근거린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성검이라고?'

이 세계에서 신이라 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확실히 지금 내 눈앞의 존재는 보통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기분은 용사나 대군주를 처음 마주했을 때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

그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니, 무슨 뜻이지?

여기는 또 어디야? 현실이 아니라 무슨 정신적인 공간인 건가?

자신을 성검이라 칭한 존재는 내가 혼란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그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 나의 심상 세계, 그렇게 여기면 될 것이다. 현실의 그대는 잠시 의식을 잃은 상태다.

"왜 나를 이곳에 불러왔습니까?"

- 말했다시피 그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자다.

"······대체 어떤 이야기를?"

- 내게 궁금한 것들이 많을 터인데.

궁금한 거······ 그야 많긴 하지.

지금 물어보면 전부 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렇게 갑자기?

-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서 머리를 굴렸다.

뭐가 됐든 기회가 왔으니 지금 최대한 많은 의문들을 해소해야 한다.

그리고 첫 질문은 당연하게도 그것이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전부터 쭉 생각했었다.

성검, 신이라면 내가 이 세계에 빙의한 이유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성검이 대답했다.

- 대부분의 것을. 그대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라는 것도, 그대가 가진 능력들도, 그대의 본질도.

"······!"

정말이냐······.

이 몸에 빙의한 뒤 처음으로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자를 만났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질문을 이어갔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이 세계는, 그러니까······.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게임이라고 하면 뭔지 이해할 리 없나?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 게임이라고 한다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게 무엇인지 대략적인 개념은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뭘 말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성검에게서 먼저 대답이 돌아왔다.

개념은 안다?

어딘가 묘한 말이었지만 일단 넘겼다. 어쨌든 알고 있다는 거니까.

"그럼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이 맞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맞다면 어째서 내 세계에서는 게임이었던 거고, 왜 나는 게임 속 인물의 몸에 빙의된 겁니까?"

성검이 이번에는 대답에 잠시 뜸을 들였다.

- 그것은 내가 답해줄 것도, 답해줄 의미도 없는 질문이다.

"뭐라고요? 궁금한 걸 물어보라면서······."

- 그대의 고향 세계와 관련된 것은 제외하고 답해주겠다.

가장 중요한 부분만 안 알려주겠다면 어쩌자는 거야?

순간 황당함과 짜증이 확 솟아올랐지만,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성검의 말을 상기했다.

"······그럼 마왕은 정확히 언제 부활하는 겁니까?"

- 에인델이 말한 대로 당장 내일이 될 수도,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다.

"정확히. 나는 정확한 시간을 물어보고 있는 겁니다."

- 그것은 확정지을 수 없다. 다만 아주 가까운 시일 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도 모르면 알려줄 수 있는 게 뭐야?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다음 질문을 쥐어짜냈다.

그래, 지구와 관련된 것을 빼고 물으라면, 역시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건······.

"내 즉살 능력으로 마왕도 죽일 수 있습니까?"

처음 마왕을 막겠다는 목표를 세웠을 때부터 쭉 궁금했던 의문.

그걸 확신할 수 없기에 나는 지금껏 용사와 성검에 그렇게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 그렇다.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 그대가 가진 힘은 마왕에게도 닿는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

그래, 그렇군.

그럼 만약 성검의 계승에 실패하더라도, 남겨진 수단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과 마음이 짓눌리는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또 뭐가 있지······.'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있다가, 성검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 마족의 절멸, 이 세계의 안정과 평화. 에인델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다.

"그럼 왜 당신 스스로 마왕을 막지 않는 겁니까? 신으로 칭송받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이건 어쩌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의 생각만큼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는 없습니까?"

- 여유가 있다면 그러겠다만, 시간이 다 되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벌써? 체감상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잠깐만, 그럼 내가 이 세계에 처음 빙의될 때 들렸던 목소리는······!"

다급히 하나라도 더 물으려고 했지만, 성검의 형체가 차츰 흐릿해졌다.

- 그대가 품은 의문들도, 이 짧은 문답에도 아무런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대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처음으로 운명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덩달아 내 의식도 희미해졌다.

메아리처럼 성검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 지금 옳은 길을 걷고 있는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대는 틀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아가라.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공간은 원래의 여관 방으로 돌아와있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움찔 놀랐다.

"······두 사람, 뭘 하고 있는 거지?"

아셸이 살기를 뿜어내며 용사를 향해 검을 뽑아들고 겨누고 있었고, 용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론 님!"

내게 시선을 돌린 아셸이 그제야 살기를 거두고서 소리쳤다.

용사도 나를 보며 왜인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셸."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용사가 성검을 소환하고서······!"

용사가 한숨을 내쉬고서 물었다.

"괜찮은가, 7군주?"

"괜찮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지?"

"1분이 조금 안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설마······ 성검과 연결된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대충 무슨 상황인지 파악되었기에 아셸에게 손짓을 했다.

"검을 거둬라, 아셸. 용사 때문에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다. 나는 괜찮다."

아셸은 용사를 힐끗 쳐다보고서 순순히 검을 내렸다.

한숨을 돌린 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용사는 내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말했다.

"······성검과 대화를 나눴다. 그것뿐이다. 어째서 성검이 날 부른 건지는 나도 모른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려줄 수 있는가?"

"미안하지만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하군."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해봤자 이해할 수도 없을 이야기다.

용사가 대답을 강요하면 어쩌나 난감한 기분을 느끼는데, 다행히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성검이 그대만 따로 불러냈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알겠다."

나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오늘 용사와 만나면 원래는 새로운 계획에 대해서도 논의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옳은 길을 가는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마왕의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시간 낭비는 아니라는 건가?

'아, 모르겠다······.'

어쨌든 이야기는 그 뒤로도 그렇게 어영부영 끝났다.

그동안 연락은 계속 주고받긴 했지만, 용사는 계승자에 대해서도 내게 별 걸 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했다. 역시 아직도 성검의 계승에 대해 내켜하지 않는 건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용사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카앤······ 계승자를 만나러 갈 건가?"

"그렇다."

용사가 내 옆에 서있는 아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미약한 적의를 띄우고 있는 아셸에게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네고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 물건은 그녀에게 넘겨주겠다, 7군주."

나와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던 마도구였다.

"성동으로 들어가면 내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어째서? 최소한의 연락은 주고받을 필요가 있지 않나?"

"성동의 결계는 외부의 기운을 모두 차단하기에 이 마도구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건가.

돌아가는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데 용사와의 연락도 완전히 단절된다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가보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빠르게 몸을 회복하고 그대를 먼저 찾겠다."

"그래······."

용사가 떠나고, 방에는 나와 아셸만이 남았다.

잠시 멍하니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셸이 입을 열었다.

"저도 바로 성으로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무리하지 마십시오, 론 님."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눈빛에서 날 향한 걱정과 염려가 느껴졌다.

복잡한 마음이 왠지 한순간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작게 웃었다.

"떠나기 전에 오랜만에 함께 식사라도 하자. 도시에 괜찮은 레스토랑을 알고 있으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

7군주와 헤어진 뒤, 에인델은 곧장 카앤을 찾아갔다.

"델! 나 진짜로 섭섭했다고요. 입학하면 금방 또 만나러 온다 해놓고 왜 한 번도 안 찾아왔어요?"

"미안하다. 그동안 바쁜 일이 많았어서."

"뭐,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근데 아버지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배고파 죽겠네."

산속 오두막이 아닌 새로운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벤은 장을 보러 나섰다.

오랜만의 재회에 들뜬 기색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카앤을 보며 에인델은 미소를 지었다.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 친구는 좀 많이 사귀었니?"

"하하, 벌써 4명은 생겼어요. 식사도 훈련도 매일 같이 할 정도로 친해요."

카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야 7군주에게 들어와서 알고 있지만, 에인델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정말로 고마워요, 날 바깥세상으로 데려와줘서. 산속에서 아버지와 둘이 살 때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요즘 진짜 즐겁거든요."

에인델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카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카앤, 아카데미 생활도 끝나면 그때는 무엇을 하고 싶니?"

"글쎄요?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는데. 친구도 많이 생겼고, 지금도 만족스럽고."

카앤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델 언니는 역시 나한테 검을 물려주고 싶은 거죠? 그렇죠?"

"······."

"걱정하지 마요. 덕분에 이렇게 즐겁게 지내고 있는걸요. 델의 바람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요."

에인델이 입을 열었다.

"카앤,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응?"

"내 검을 물려받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의미가 아니야. 내가 가지고 있는 책임과 의무까지 전부 네가 짊어지게 된다는 뜻이지."

"책임과 의무? 그게 뭔데요?"

"그건······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거야."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다른 사람들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을 거야. 필요하다면 네가 가진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책임을 수행해야만 해. 카앤, 네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네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를 위해서. 그럴 수 있겠니?"

"음? 으음······."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카앤은 눈치를 보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어려운 일을 델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건데요?"

에인델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건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하는 답이란다."

끼익.

탁자에 앉아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열리며 벤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바구니에는 식재료가 한가득 들려있었다.

"좀 늦었군.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좀이 아니라 엄청 늦었거든, 아버지."

"시끄럽다. 금방 솜씨 발휘해서 식사를 내올 테니, 딸 녀석 좀 조금만 더 상대해주고 있으시오."

허허 웃으며 부엌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카앤이 혀를 내밀었다.

"아, 그래서 델, 방금 이야기는······."

에인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괜히 이상한 이야기를 했구나. 식사가 다 되면 먹자."

***

어둡고 싸늘한 공간에 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우두커니 서있다.

세인테아 제국의 황제, 그란디오스.

그는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곧 세상이 전화에 휩싸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선 제 몸 상태가 어떤지를 모르시지 않을 겁니다. 저는 쇠약해졌고, 부활한 마왕은 이전보다 더욱 강대해질 것입니다. 한데도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 때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이 이상 저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이제 남아있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반 년 전, 은둔을 깨고 바깥세상으로 나왔던 용사의 경고.

그동안 황제는 용사의 눈과 신경을 피해 많은 일들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용사가 그리 말했다면 그 말대로 재앙은 멀지 않았을 것이니.

우습게도 황제는 누구보다 자신을 멸시하는 존재를 그 누구보다도 믿고 신뢰하고 있었다.

"우선시해야 할 것이라."

준비가 완전치 않았지만, 더 늦기 전에 수십 년 대업의 끝을 봐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언제나 한 곳을 보고 있었소, 용사. 오직 우리 인간들만의······."

황제의 중얼거림이 어둠에 덧없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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