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검 (1)
나는 봉투에 밀봉되어 기숙사 방 앞으로 도착한 성적서를 확인했다.
'한 과목 낙제인가.'
나름 괜찮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론은 결국 낙제였다.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점수를 보니 한 문제만 더 맞혔어도 통과였을 텐데.
나는 성적서를 도로 봉투에 집어넣고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깥으로 나섰다.
학기 시험이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이제부터는 약 두 달 가까이 휴학기 기간이었기에 수업도 없었다. 한마디로 방학이었다.
'벌써 반 년이 지났나.'
반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진전은 없이 제자리걸음이다.
처음의 의도대로 카앤 주위의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긴 했다.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역시 이 아카데미라는 공간에서 성검의 계승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극적인 이벤트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대인 전투 시험에서 있었던 일로 혹시나 싶어 용사에게 연락은 해봤지만, 성검에 변화는 없다고 했다.
뭔가 좀 다른 대안이 필요한 시점일까?
달리 마땅한 수가 없더라도 이대로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용사를 만나면 다시 의논해봐야겠네.'
용사와는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 한 번 만나기로 했었다.
아셸도 그간 군주성에 별일은 없었나 보고를 위해서 함께 찾아올 것이고.
"랜! 어디 가냐?"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앤이 여느 때처럼 실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깐 도서관에. 너는?"
"난 그냥 저녁 먹을 때까지 산책 중."
"성적 나왔던데 기숙사로 가봐. 아마 방문 앞에 도착했을 걸."
"어, 그래? 넌 뭐 어떻게 나왔어?"
"아깝게 이론 한 과목 낙제됐더라."
"흐응, 그러냐."
카앤이 묘한 표정을 짓다가 몸을 돌렸다.
"나도 확인해봐야겠네. 그럼 먼저 간다. 이따 저녁 때 보자."
에스카가 잘 나와야 할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앤이 기숙사 쪽으로 멀어져갔다.
대인 전투 시험에서 그런 일이 있고, 에스카와는 곧장 바로 화해한 카앤이었다.
화해랄 것도 없이 한쪽은 울며불며 사과하고 한쪽은 괜찮다고 달래준 게 전부였지만.
아직 분위기가 어색한 건 별 수 없었지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이내 공용 도서관으로 이동한 나는 의외의 광경을 마주했다.
리곤과 레아, 두 사람이 한쪽 책장에 나란히 서서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리곤이 인사를 건네왔다.
"어, 랜."
"도서관에는 웬일이야? 아까 훈련장에 간다더니."
"훈련 끝내고 온 거야.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책이라도 읽을까 해서."
나는 레아를 힐끗 바라봤다.
태연한 리곤과 달리, 그녀는 수상한 짓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움찔 놀란 기색이었다.
"근데 의외의 조합이네."
"응? 하하, 그런가? 우연히 마주쳐서 얘기 좀 나누던 중이었어."
"아, 아까 바이온이 너 찾더라. 그리고 방에 학기 시험 성적서 도착했어."
"그래? 내 것도 몰래 본 건 아니지?"
"내가 왜."
"농담이야. 그럼 먼저 가볼게."
나와 레아에게 손을 흔들며 리곤은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나도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레아가 날 불러 붙잡았다.
"공간 계열의 마법이라고 들었어. 네가 시험에서 썼던 마법."
나는 도로 멈춰서서 그녀를 돌아봤다.
"리곤한테 들었어."
"어, 그래."
저번의 대인 전투 시험에서, 카앤이 애쓴 것을 위해 나는 별 수 없이 공간 도약을 사용했었다.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아카데미 내에서 본래 능력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문제가 안 발생하진 않았다. 시험장 곳곳에 마법 옵저버가 많이 있었으니까.
다 감수하고 한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제는 로켈 교수에게도 불려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로켈 교수에게는 공간계열의 내 고유 마법이라고 둘러댔다. 가장 편리한 핑계였다.
고유 마법이라는 건 기존의 마법과 체계가 완전히 다른 영역이고, 옵저버로 잠깐 봤다고 그게 마법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을 리도 없으니까.
'적당히 넘어가서 다행이긴 했지.'
교수가 일일이 캐묻지 않은 건 아마 내가 교장의 추천으로 입학한 것으로 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직접 능력을 목격한 리곤에게도 그렇게 둘러댔다. 고유 마법이라고.
레아도 그걸 리곤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방금 나누고 있던 이야기가 그거였나?
레아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짜증나네. 그동안 그렇게 사람을 기만하면서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어?"
"······뭔 소리야?"
"네가 그 마법을 대련 수업에서 사용한 적은 없었잖아. 내 배후를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적당적당히 했다는 거 아니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그동안 자기를 적당히 상대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건가?
"네가 그렇게 말할 게 아니지 않나?"
"뭐?"
"너도 리곤 빼고 전력을 다한 적은 없었잖아. 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서로 똑같네."
"나는 전력을 안 다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 그렇고! 너는······."
"내가 왜 대련이나 이기자고 내 고유 마법을 수업에서 내보여야 되는데. 당연한 상식이잖아."
반박이 궁색한지 말없는 레아를 향해, 나는 손을 휘휘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근데 너 리곤이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뭐, 뭐?!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교수도 같이 상대하고, 단둘이 이야기도 나누고 있고."
"아니라고!"
몰리는 주위 시선에 레아는 날 노려보다가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참 낯선 반응을 보여주네. 진짜 리곤한테 마음이라도 있나?
이내 시답잖은 생각은 끄고 내 볼일을 보러 움직였다.
매주 공용 도서관에 방문하며 신비가 생겼나 확인하는 건 지난 반 년간 해온 루틴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별 생각 없이 책장의 숨겨진 자리를 살펴보는데······.
"······!"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봤다.
어두운 구석에서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문양, 신비.
'드디어 나타났군.'
나는 최대한 조용히 책장을 밀어내고, 신비의 문양을 향해서 곧장 손을 뻗었다.
한순간 밝은 빛을 뿜어내며 흩어진 문양이 팔을 타고 몸으로 흡수되었다.
잠시 미약한 전율감에 잠겨서 멍하니 있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무슨 일이에요?"
나는 서둘러 복도 쪽으로 나와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서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법서를 읽는데, 마력만 조금 제어해보려다가 실수로 섬광 마법을······."
그에 사서가 긴장 풀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훈련장 외의 교내에서 마법 사용은 엄금인 거 몰라요? 1학년이죠?"
"네, 정말 죄송합니다."
"따라와서 이름하고 담당 교수님 적어요."
깐깐한 사서의 요구를 모두 수행하고 나서야 나는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나중에 벌점이 부과되겠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번에 얻은 신비의 명칭은 진혼 강림.
죽은 대상의 혼을 내 육체에 받아들여, 그 대상의 능력을 빌릴 수 있는 능력이다.
'게임에서는 대상의 스킬을 랜덤으로 뺏어서 일정 시간 동안 쓸 수 있는 능력이었는데······.'
지금껏 내가 얻어온 신비들의 능력은 모두 게임과 다소 차이가 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비를 얻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달라졌나.'
이 세계에서의 진혼 강림은 일회성이나 다름없는 신비였다.
단 한 번, 단 한 명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당연히 대상의 영혼은 아직 소멸하지 않고 현실세계에 남아있어야 하며, 제한 시간 또한 있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힘을 빌리는 것이기에 대상의 허락 없이는 신비를 쓸 수 없다는 제약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패널티들에도 불구하고 능력 자체는 굉장히 강력한 신비긴 했다.
왜냐면, 리턴 또한 랜던 스킬 탈취라는 게임의 설정과 달리 엄청났으니까.
'혼을 받아들인 대상의 생전 능력을 모두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대군주의 혼을 받아들이면 그녀의 마법적 능력과 육체 능력, 종족 특질을 제한 시간 동안은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능력은 강력해도 쓸 수 있는 조건이 여러모로 까다롭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얻기 전에도 애매한 신비라고는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더 애매해진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보다야 낫지만.'
어쨌든 초재생, 부동 장막, 공간 도약에 이어 얻게 된 4번째 신비였다.
***
며칠의 시간이 더 흐르고, 정식으로 휴학기가 시작됨과 함께 외출이 완전히 허가되었다.
나는 용사와 아셸을 만나기 위해 아카데미 밖으로 나와 약속 지점으로 이동했다.
도시 대로변에 위치한 한 여관을 찾아들어가서 2층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을 슬며시 두드렸다.
철컥.
문을 열어준 이는 낯선 여인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 레벨을 슬쩍 쳐다봤다.
이전에 봤을 때와 외관을 다르게 바꾼 용사였다.
나는 아무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 테이블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금발이라니, 아셸까지도 외관을 좀 바꿨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긴 하지만.
이내 용사가 마력으로 소리를 차단하는 막을 방 주위에 펼쳤다.
나는 아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의 재회였기에 꽤나 반가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아셸. 오느라 수고 많았다."
"예, 론 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군주성에 별다른 일은 없었나?"
"평소대로입니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용사와도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녀와는 평소에도 마도구로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항상 서로의 근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대로 얼마 전에 암영이 군주성으로 찾아왔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영은 이맘때 찾아와서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자리를 비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아셸에게도 미리 언질하여 맡겨둔 부분이었다.
"뭐라도 성과가 있다던가?"
"예, 목표로 의심되는 인물의 과거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적은 정보로 정말 찾아낸 건가?
"자세한 정보는 여기에 모두 정리되어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셸이 품에서 꺼내든 두루마리 종이를 받아들고 펼쳤다. 그리고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세인테아 황실 소속의 암대?'
암영이 조사해온 정보를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과거에 세인테아에 황실의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는 비밀 조직이 있었고, 그 대원들은 어느 사건을 계기로 모두 토사구팽당했다.
그중 살아남은 대원 하나가 내가 언급한 인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빙의의 신비를 가진, 멀지 않은 미래에 세인테아 수도를 테러할 바로 그놈.
내가 아는 지식과 종이에 적힌 정보들을 비교하며, 나는 상당히 신뢰성 있는 추측이라고 판단했다.
"암영이 따로 남긴 말은 있나?"
"조사한 정보를 토대로 계속해서 추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암영이 놈의 꼬리를 붙잡는 것도 기대해볼 만했다.
정보지를 품에 집어넣은 뒤, 옆쪽에 서있는 용사에게 물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건?"
내 물음에 용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내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몸 상태라고 하면?"
"7군주 그대에게는 면목이 없지만, 나는 다시 당분간 성동에서 회복에 전념해야 할 것 같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다시 성동으로 돌아간다니, 그 말은 즉 용사의 몸상태가 더 악화됐다는 뜻이었으니까.
"상태가 많이 좋지 않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군. 상당히 좋지 않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원마와 또 충돌이 있기라도 했나?"
"그런 건 아니다."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마왕을 봉인하며, 내 몸에는 마왕의 힘의 잔재가 남아있다. 그것이 나를 계속해서 좀먹고 있다는 건 그대도 알고 있었지."
"알고 있다."
"아무래도 마왕의 부활이 멀지 않은 듯하다. 몸속의 놈의 기운이 근래 심상치 않게 격동하고 있어."
"······!"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멀지 않았다고 하면, 정확히 얼마나 남았다는 거지?"
"알 수 없다.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언제 부활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가.
게임의 스토리대로면 마왕은 몇 년 뒤에나 부활해야 정상이다.
이건 무언가 상황이 변화한 건가, 아니면 본래의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가? 난 확신할 수 없었다.
"성검에게선 무언가 내려온 계시가 없나?"
"없다."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네.'
불쑥 날 짜증나게 만드는 사실은, 여전히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게는 명확하게 제시된 동기가 없다.
만약 성검의 계승을 성공하고, 마왕을 쓰러뜨린다면, 그 다음은?
나는 어째서 게임 속의 세계에 빙의한 거지?
모든 게 끝나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기는 한 건가, 아니면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가.
침묵하고 있던 용사가 허공에 성검을 소환했다.
"미안하다. 성검이 내게 무언가를 알려준 건 계승자에 관한 것 이후로 여전히 한 번도······."
번쩍!
그때 갑작스레 성검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나는 정신이 한순간 현실에서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뭐야?
뭔 일이 일어난 거지? 용사가 뭘 한 건가?
다시 의식과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방금까지 있던 방안의 풍경이 아니었다.
사방이 새하얀 순백의 공간.
사람의 형체를 띤 거대한 존재가 주저앉은 날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전신이 압도되는 느낌에 쭈뼛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설마?
"······당신은?"
마치 신과도 그 존재가 대답했다.
- 성검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