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51화 (151/189)

학기 시험 (4)

친구.

그것은 지금의 레아 헤리윈에게 있어서는 생소해진 단어였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에는 그런 그녀에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 한 명은.

일찍이 천재로서 촉망받은 그녀였기에, 어렸을 적부터 마탑에 방문하며 여러 명망 높은 마법사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었다.

유리. 소녀는 그런 와중에 만나게 된 마탑의 견습 마법사였다.

나이도 비슷했던 둘은 우연한 첫 만남 이후로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

10살. 당시 레아에게 있어 유리는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내 주변에는 좀처럼 대화가 통하는 녀석이 없다니까. 딱히 친구라고 할 만한 녀석도 하나도 없어.'

'하여간 그렇게 짜증들이 나나봐.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눈가에 얼쩡거리는 게.'

'그래서 너랑 만나게 된 건 정말로 행운이야. 레아, 너라면 날 이해할 수 있지?'

유리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의 제자였고, 또한 뛰어난 재능으로 기대를 받는 유망주였다.

레아는 유리가 입버릇처럼 내뱉곤 하는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생각이 다르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상대에게 허울없이 손을 뻗기도 쉽지 않고, 그것은 상대 또한 마찬가지다.

가문, 배경, 재능, 타고난 것의 차이가 너무 큰 상대와 친해진다는 건 그런 일이었으니까.

유리는 레아를 조금도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아도 누구보다 그런 유리를 좋아했다.

공부를 핑계로 마탑에 방문하는 빈도와 시간도 부쩍 늘렸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마법 실험을 하거나, 그녀와 어울리며 즐거운 경험들을 쌓았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레아는 유리가 조금씩 자신을 피한다는 걸 느꼈다.

급한 일이 있다든지, 몸이 좋지 않다든지, 그런 자잘한 핑계들로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유리가 마법 실험을 하자고 이야기를 꺼내왔다. 다만, 다른 마법사들은 없이 단둘이.

평소 실험을 할 때는 항상 유리의 스승이 감독으로 함께였다.

어린 견습 마법사에 불과한 유리에게 실험을 마음대로 행할 권리는 당연히 없었다. 위험했으니까.

레아는 나름 성실한 성격인 유리가 이상한 제안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흔쾌히 수락했다.

간만에 유리가 먼저 꺼낸 말이었고, 다른 마법사들 몰래 일을 벌이는 건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레아는 유리에게 부탁을 받았다. 먼저 실험실로 가서 필요한 기구와 재료들을 준비해달라고.

들뜬 마음으로 실험 준비를 하던 레아가 그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섞여선 안 될 위험한 성분의 재료 둘이 보관함 안에 교묘하게 섞여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주의하게 꺼내려 들더라면 아마 실험실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레아는 하나의 섬뜩한 가정을 떠올렸다.

처음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부정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정황은 너무도 명백했다.

레아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실험실에 오지 않는 유리를 찾아갔다.

분명 오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주하자마자 그녀가 지은 표정을 보고 레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왜 그런 거야?'

왜 날 죽이려 한 거야?

차마 그렇게는 못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잡아떼는 유리에게 레아는 싸늘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갔다.

증거들을 하나씩 조목조목 따지고, 있었던 일을 그녀의 스승에게 모두 고할 거란 말까지 나오고 나서야 유리는 참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울었다.

'너는 눈치도 없어? 이래서 너랑 더 어울리기가 싫었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마탑에 온 다음부터 스승님은 항상 나랑 널 비교했어! 네가 제자였어야 했다고!'

유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였다. 하지만 레아는 그녀 이상의 천재였다.

단지 그딴 이유였다.

'레아, 너랑 친구가 된 건 불행 중의 불행이야.'

바닥에 주저앉아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소리치는 유리에게, 레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다시는 마탑을 찾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하나의 소식을 전해들었을 뿐이다. 유리가 마법 범죄로 처벌됐다는.

마탑의 탑주가 직접 가문으로 사과를 전하러 찾아오기도 했다.

그날의 일을 레아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어떻게든 밝혀진 모양이었다.

레아는 한참 동안이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겪었다.

고작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 든, 가장 친했던 친구의 저주 같은 말들에 억눌리며.

그녀가 끝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앞으로 친구 따윈 필요 없다. 열등한 놈들에게 구태여 맞춰 어울리려 할 필요도 없다.

그를 기점으로 그녀의 인격과 사고관은 크게 변했고,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다시 현재에 이르러······.

"괜찮아?"

레아는 자신의 눈앞에 뻗어진 손을 쳐다봤다.

리곤. 칼데릭 출신. 처음으로 제대로 된 패배라는 걸 안겨준 또래.

교류 수업에서 그에게 대련을 패배했을 때, 레아가 겪은 감정은 딱히 분함이나 좌절이 아니었다.

곱씹어서 생각해보면 그건 안도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자신만큼, 자신 이상으로 뛰어난 천재가 있기는 있었다는 안도감.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살아온 성격상 쉽지는 않았다.

리곤은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 않게 주위 친구들과 어울릴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것에 욱해서 험한 말들을 퍼부었을 때에는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

가시지 않은 전투의 고양감과,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었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혼자 일어날 수 있어."

레아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가 풀려서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가벼운 탈진 현상이었다. 한계점까지 마법을 펼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팔찌 가지고 먼저 가. 난 당장 못 움직이니까."

이제 서쪽 통로로 이동하기만 하면 시험은 끝이다. 굳이 함께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리곤은 그런 레아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회복되면 같이 가자."

"······뭐?"

"그새 또 다른 학생이 와서 공격하면 어쩌게? 교수님은 이겼어도 탈락하면 성적 깎일 수도 있잖아."

레아는 리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물었다.

"시험은 상대평가야. 내 성적이 떨어지면 너한테는 이득이잖아?"

"난 성적 별로 신경 안 써."

"······애당초 성적 때문에 나한테 협력하자고 제안했던 거잖아."

"뭐? 아닌데."

"왜 시치미를 떼는 거지?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어? 성적이 목적인 것도 아니면 굳이 싫어하는 상대를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리곤이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싫어해? 내가 널? 왜?"

"내가 네 친구를 욕했으니까······."

"야, 그게 언젯적 일인데? 카앤도 그렇고 나도 별로 신경 안 써."

"······."

"난 네가 나쁜 녀석이라곤 생각 안 해. 공부도 잘 알려줬고. 그때 그 말들도 딱히 진심은 아니었잖아?"

그 반응에 레아는 괜히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솔직히 그녀는 리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라면 반대였다.

단지 그렇다고 지금껏 몇 년 동안 몸에 배어온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진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나쁘게 생각 안 한다는 리곤의 말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퉁명스러운 대꾸가 나왔다.

"네가 뭘 안다고. 나에 대해 아는 척하지 마."

"그럼 아니야? 설마 진짜 진심이었어? 하여튼 귀족이란 것들은 다 똑같지, 그놈의 권위의식은."

갑작스러운 험언에 레아는 순간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뭐? 나, 나는······."

하지만 웃음 섞인 리곤의 표정을 뒤늦게 보고 자신을 놀린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레아는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채 그를 노려봤다.

"어, 왜 그래? 아는 척하지 말라더니. 막상 이렇게 말하면 섭섭해할 거면서."

"······한마디만 더 지껄여봐. 마법을 날릴 테니까."

"내가 맞아줄 리가 없잖아, 하하. 알겠으니까 이제 회복에 집중해."

고개를 홱 돌려버린 레아는 정좌를 한 채 눈을 감았다.

몸도 정신도 피곤하고, 리곤은 짜증났지만, 어째서인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어디 보자, 네 명? 우르르 몰려오는 걸 기대했는데."

어스름한 공동 한가운데 우두커니 주저앉아있는 여인.

남쪽 통로 끝에 다다라 가온 교수와 마주하자마자 들려온 말이었다.

"우르르 몰려가는 작전은 이미 로켈 교수님한테 했다가 실패했는데요?"

카앤의 대꾸에 가온 교수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냐? 뭐, 그랬겠지. 그런데도 너희들은 고작 넷이서 나한테 온 거고?"

"네."

"어째서지? 로켈 교수님보다 내가 더 만만해 보였나?"

"아뇨, 그건 여기 있는 얘 때문인데."

카앤이 옆에 있는 바이온을 가리켰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바이온이 한층 무거워진 기세로 칼끝을 가온 교수에게 겨누었다.

"대인 전투 수업 때도 가온 교수님께서는 직접 저희를 상대해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하, 그런 건가? 바이온 너는 덩치는 산만해서 호승심도 남다른 녀석이긴 했지."

교수는 바이온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잠시 웃다가, 몸을 일으켰다.

"패기는 좋다. 근데 패기가 성적까지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싸우다 팔찌가 부서져서 전부 낙제를 받게 돼도 원망하진 마라."

이내 가온 교수가 주위 바닥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원을 그렸다. 반경 몇 미터 정도 되는.

"규칙은 간단하다. 나는 이 영역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을 거다. 검이든 손이든 발이든, 어떻게든 내 몸에 조금이라도 닿거나 스치는 데 성공한다면 팔찌를 주마."

로켈 교수와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듣기에는 무척 쉬워 보이는 룰이었다.

"물론 영역 밖으로 날 몰아내는 데 성공해도 너희들의 승리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명을 마친 가온 교수가 준비가 되면 들어오라는 듯 팔짱을 끼고 섰다.

"바이온, 생각한 작전 있어? 로켈 교수님이랑 마찬가지로 쉬울 리가 없는데."

카앤의 물음에 바이온이 대답했다.

"잔재주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전력으로, 정면에서 정직하게 부딪힌다."

"하긴, 주변에 숨을 곳도 없고. 그 방법밖엔 없나?"

바이온이 먼저 교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가온 교수가 검을 뽑아들었고, 두 검날이 맞물리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나 카앤, 그리고 에스카는 자연스럽게 후방에서 지원 마법을 준비했다.

【Lv. 68】

가온 교수의 레벨은 로켈 교수보다도 조금 더 높은 정도였다.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봐온 교수들 중에서도 그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레벨을 지니고 있었다.

거의 70레벨에 육박하는 상대를 평균 20레벨대 몇 명이서 상대할 방법?

당연히 없다. 옷깃을 스치는 것조차도 원래 같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가온 교수 역시 로켈 교수처럼 수준을 조절할 테고, 교수를 이길 방법이라고 하면 그 틈을 파고드는 것뿐일 터였다.

하지만 전투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닥 가능성이 안 보였다.

바이온은 가온 교수로 제법 선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냥 보기에 그럴 뿐이었다.

가온 교수는 그 좁은 영역 안에서 바이온을 상대해주며 마법까지 모조리 막고 피했다. 아주 여유롭게.

체력전으로 가면 먼저 지치는 쪽은 당연히 우리였기에 이런 방식으로는 답이 없었다.

"카앤, 계속 마법만 쓸 거야?"

나는 카앤에게 물었다. 그녀의 특기는 마법보다 체술이다.

마법으로 지원하기보다 바이온에게 직접 가세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있을 텐데.

"난 마법학부잖아! 마법만으로 승부를 봐야지."

"시험에 그런 규칙은 없었는데. 별로 상관없지 않나?"

"규칙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다니까!"

카앤은 마력을 전력까지 끌어올려서 교수에게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평소 수업 때는 이렇게 전력을 낼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꽤 신난 모양이었다.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슬슬 바이온도 카앤도 지쳐서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 1팀, 마이크 루벨란 탈락.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대기하십시오.

- 2팀, 헨스 드레이크 탈락,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대기하십시오.

- 1팀, 루디 웨스터 탈락······.

도중에는 안내 방송처럼 계속해서 탈락한 학생들의 이름도 확성 마법으로 들려왔다.

그보다 이제 시간은 얼마나 남은 거지?

- 시험 종료 30분 전입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남은 시험 시간이 들려왔다.

'30분이면 별로 안 남았는데.'

이대로 계속 교수한테 도전하고 있으면 죄다 낙제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카앤이나 바이온은 안내 방송은 신경도 안 쓰고 교수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냐? 이제 남은 학생들도 별로 없을 텐데 그러다간 정말로 낙제될 거다. 아니면 너희들끼리 싸우던가."

가온 교수의 웃음 섞인 말에 호흡을 고르던 카앤이 물었다.

"우리는 같은 팀인데 우리끼리 왜 싸워요?"

"같은 팀의 팔찌라고 뺏으면 안 된다는 룰은 없었는데? 성적을 챙기려면 동료 등에 칼이라도 꽂아야지."

놀리는 듯한 짓궂은 말이었다. 카앤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게 이간질하셔도 저희는 절대로 그럴 일 없거든요."

"그래? 그것 참 돈독한 우정이구나."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요. 30분 안에 교수님을 쓰러뜨리면 되는 거잖아요."

"허, 참. 아직도 될 거라고 생각하냐?"

"당연하죠. 그리고 낙제된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어요."

애초에 카앤에게 성적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녀석은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운 듯했다.

카앤이 한편의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에스카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에스카는 다른 애들에 비해 마력량이 떨어졌기에 가장 빨리 지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에스카? 지쳤어?"

"······아니, 괜찮아."

"아, 그리고 랜! 나한테 생각이 있는데, 우리 지금부터는······."

쩡!

그녀의 말을 끊고 자그마한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나도, 다시 전투를 준비하던 바이온도 놀라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나는 두 눈으로 보고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에스카가 충격파 마법을 쏘아냈다. 카앤이 뻗은 손을 향해서, 그녀의 팔찌를 노리고.

"아······."

간발의 차로 뻗었던 손을 거둔 카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에스카를 바라봤다.

"······방금 뭐 한 거야, 에스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