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과 적응 (7)
로켈 교수는 집무실에 앉아 검술학부의 가온 교수가 건네준 계획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무슨 계획서냐고 하냐면, 어느새 훌쩍 다가온 학기 시험에 관련한 것이었다.
"······흠."
의자에 등을 파묻은 로켈 교수가 묘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저번에 붙잡혀서 대충 듣기는 했는데, 솔직히 제법 재밌는 구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시험 방식이 꽤 과격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도 많겠지만, 이 정도면 위원회에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고······.
"어떠십니까, 로켈 교수님? 역시 어렵겠죠?"
계획서를 전달해온 조교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 생각보다 괜찮군. 좀 더 고민해봐야겠네."
"······예? 정말이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럼 가온 교수님께는 그렇게 전달드리겠습니다."
"됐네. 굳이 수고할 필요 없네. 내가 나중에 직접 말하지."
철컥.
집무실에서 나온 조교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켈 교수는 가온 교수를 별종이라며 상대하길 꺼려하지만, 그가 근처에서 보기에 두 사람은 제법 성격이 잘 맞았다. 이런 걸 보면 말이다.
진심으로 신입생들한테 그런 인정사정없는 시험을 치루게 하려는 건가?
"이번 1학년들은 고생 좀 하겠네······."
조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
입학한 지 3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별다른 사건 없이 아카데미에서의 시간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랜?"
"잠깐 도서관에. 찾는 책이 있어서."
수업이 다 끝난 뒤 늦은 오후.
나와 리곤과 바이온은 함께 기숙사 건물 근처에 위치한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저녁 식사 전에는 약속처럼 그곳에 모여서 잡담을 떠는 게 평소 일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레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리곤이 스스럼없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
그에 레아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지나쳐갔다.
우리도 마저 가던 길을 가는데,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뒤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힐끔거리던 레아가 움찔 놀라서 아닌 척 홱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쟤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싶었다.
"왜 그래?"
"아냐."
저번의 교류 수업 뒤부터, 어쩌다 리곤을 마주칠 때마다 레아의 태도는 묘했다. 리곤을 의식하는 게 눈에 확실히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반에서도 그녀가 다른 학생들과 조금이라도 어울리려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유라면 물론 리곤과의 대련이 원인이겠지.
처음에는 패배한 게 분해서 적의를 비치는 건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인 것 같기도 하고.'
뭐라도 말을 걸고 싶은데 눈치만 보다가 못하는 느낌.
설마 리곤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면야 알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먼저 자리에 앉아있는 카앤과 에스카의 모습이 보였다.
"왔냐?"
카앤이 손을 흐느적거리며 흔들었다. 우리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래서 말이야, 이번 휴일에는 같이 외출할 거지? 에스카."
"음······ 미안.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그때까지는 좀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에이이······."
카앤이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테이블에 몸을 쭉 늘어뜨렸다.
에스카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서 달래듯 주물거렸다.
방금 말대로 요즘 에스카는 공부하기 바쁜지 카앤과 별로 어울려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희는 좀 어때? 리곤, 바이온. 시험 준비 잘하고 있어?"
"나? 나는 딱히 준비 같은 건 따로 안 하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학기 시험.
명칭 그대로 학기말에 보는 시험이다.
엘폰의 교육 과정은 한 학년에 두 학기가 나눠 존재하고, 학기말에 한 번씩 큰 시험을 치루는데, 대충 기말고사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지구로 따지면.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제 학기 시험까지 2주 조금 넘게 남았다.
남일이 아니라 내게도 좀 걱정인 부분이 있었다.
다른 과목들은 그렇다 쳐도, 마법 이론만큼은 아직까지도 막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성적이야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유급하거나 퇴학당하지 않을 정도의 점수는 받아야 하는데.
'이론이 진짜 성가시단 말이지······.'
어렵다고 해서 그동안 이론 공부에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여전히 수업 내용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찰 뿐이지.
여기가 현대 지구도 아니고, 모르겠는 건 바로 인터넷에 서칭할 수 있는 편한 세계가 아니었다.
자료는 부족하기 그지없고, 그조차도 일일이 찾는 수고를 해야 하니 여러모로 빡셀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면 이론 시험 성적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에 약간의 위기감은 느끼고 있었다.
'누가 일대일 과외처럼 붙어서 가르쳐주면 좋겠네.'
답답하게 막혔던 부분들만 시험 전에 한 번이라도 싹 정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카앤이나 에스카에게 부탁하기는 무리였다. 둘도 썩 이론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쳐지나갔다.
친분은 전혀 없지만 실력만큼은 학년에서도 가장 뛰어날 한 학생이.
"······."
한번 얘기나 해볼까?
명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레아와 나는 일단 이론 수업에서 같은 조였으니까.
그리고······.
"응? 왜?"
리곤을 빤히 쳐다보자 녀석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아니, 이번 휴일에는 외출이 아니라 다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라도 하는 게 어떤가 해서."
"도서관에서?"
"어. 리곤 너도 이론 과목은 있잖아? 공통 교양도 있고."
"오, 그럼 그럴까? 그것도 뭔가 색다르니 좋네."
카앤이 금세 들뜬 기색으로 맞장구를 쳤다.
리곤과 바이온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하루가 지나고, 오전의 마법 이론 수업 시간.
"······뭐?"
수업이 막 끝난 뒤 내가 꺼낸 이야기에 레아를 포함한 조원들이 제각각의 표정들을 지었다.
"이제 곧 학기 시험이잖아? 그러니까 휴일에 다같이 모여서 공부라도 하는 게 어떤가 싶어서."
두 조원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자연스레 레아부터 쳐다봤다.
나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했다.
평소 대놓고 주위에 철벽을 치고 다니는 그녀가 스터디 모임 같은 걸 한다고 할 리가 없었으니까.
"누구 좋으라고 그런 시간 낭비를 내가 해야 하는데?"
그리고 레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수업도 지금까지 조별로 진행했으니 시험도 조별 방식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러면 함께 공부를 하면서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는 편이 성적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지 않을까?"
레아가 눈쌀을 찌푸린 채 뭐라고 대꾸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 휴일에 친구들하고 도서관에 모여서 공부하기로 했거든. 근데 알다시피 내가 이론이 약하잖아? 그래서 너희들도 같이 하면 어떨까 싶어서 한번 물어본 거야. 내키지 않으면 별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레아의 반응을 슬쩍 살피니, 순간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무뚝뚝하게 물었다.
"언제, 얼마나 할 건데?"
그 말에 조원들이 놀란 기색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나도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게 진짜 되네.'
리곤을 미끼로 하면 꼬드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말이다.
"정오쯤부터 시작해서 대충 저녁 시간까지. 어때?"
레아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교실 밖으로 떠났다.
다른 두 조원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의외네. 쟤가 저렇게 순순히 한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랜, 너 레아랑 좀 친해?"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
휴일이 되고, 약속대로 도서관에서 모임이 이루어졌다.
카앤과 애들한테는 추가 멤버가 있을 거라고 진작에 양해를 구했다.
"의외네. 너랑 한자리에서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야."
카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레아에게 툭 말을 건넸다.
레아는 카앤을 한 번 흘겨보고는 읽고 있던 서적으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는 어쩌다 보니 나를 기준으로 형성되었다.
왼편에는 이론 수업 조원들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카앤과 에스카와 바이온이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레아, 여기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
나는 본래 목적대로 막혔던 부분들을 레아에게 하나둘씩 은근히 물어봤다.
그녀는 못마땅한 기색을 풍겼지만 일단 가르쳐주기는 했다.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성의껏.
'아, 이런 식으로 푸는 거였구나.'
그리고 그건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배운 내용들을 정리하며 이론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과열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깐 혼자서 가지는 쉬는 시간.
나는 양옆에 앉은 리곤과 레아를 번갈아 봤다.
'얘는 분명 리곤 때문에 온 걸 텐데······.'
그런 것치고 레아는 리곤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공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눈 말이라고는 아까 처음에 만났을 때 인사가 전부다.
보고 있자니 좀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레아에게 고맙기도 했기에 나는 분위기를 살폈다.
리곤은 역사책을 쥐고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리곤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역사? 공통 교양 공부야?"
"응."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뭐 막히는 거 있어?"
"아니, 그냥. 수업에서 배운 거랑 자료랑 내용이 좀 다른 것 같아서. 헷갈리네."
"그럼 레아한테 한번 물어봐. 아마 역사도 잘 알걸."
내 말에 리곤이 레아를 쳐다봤다.
레아도 펜을 우뚝 멈추고 '허?' 이런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리곤이 이내 넉살 좋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좀 가르쳐줄 수 있을까?"
"······뭐가 헷갈린다는 건데?"
"그러니까, 제국력 321년에 있었다는 제하크 참변 말인데······."
리곤이 책을 들고 일어나서 그녀의 옆으로 이동해 앉았다.
레아는 날 가르쳐줄 때와는 달리 별 못마땅한 기색 없이 리곤에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신경 끄고 내 공부에 집중했다.
공부에 집중하니 어느새 시간은 해가 저물 즈음이 다 되었다.
카앤이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 배고프네. 이쯤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자."
슬슬 자리를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었기에 나도 책을 덮고 필기를 정리했다.
"너희도 저녁 같이 먹을 거지?"
"어? 뭐, 그럴까."
카앤이 레아를 포함한 이론 조원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레아는 무시하고 자리에서 떠나려고 했다.
카앤이 그런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야, 레아. 어디가? 같이 밥 먹자니까."
그에 레아가 성가시다는 투로 대답했다.
"뭘 친한 척 굴고 있어? 난 됐으니까 귀찮게 하지 마."
"뭐?"
카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넌 방금까지 같이 잘 어울려놓고 왜 그러냐?"
"어울린 게 아니라 시험 대비를 한 것뿐이야. 성적 때문에."
"뭐, 그게 그거 아닌가······?"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아니,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말이야, 넌 왜 그렇게 혼자서만 다니려고 하냐? 다 같이 어울리면 재밌고 좋잖아. 그렇게 아무랑도 친하게 안 지내면 재미없지 않아?"
카앤에게 악의는 없겠지만 기분 나쁠 법도 한 말인데, 레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울린다는 건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나 할 수 있는 거야."
"수준? 마법 실력 말하는 거야, 아니면 네 가문을 말하는 거야? 대체 왜 그런 걸 따지는데?"
레아가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하찮은 놈들밖에 없으니까. 내게 열등감을 품고 질투하는 놈, 콩고물 떨어지길 바라며 같잖은 아부나 떠는 놈, 그냥 멍청해서 짜증나는 놈. 내가 왜 굳이 인내해가며 그런 것들과 어울려야 하는 건데?"
······무슨 급발진이지?
나는 쟤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가만히 지켜봤다.
카앤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난 너한테 열등감도 없고, 아부 떨 생각도 없는데?"
"그럼 그냥 멍청한 놈인가 보네. 이제 그만 말 걸래?"
그때 리곤이 끼어들었다. 드물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이 심하잖아.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레아가 움찔 놀라며 리곤을 쳐다봤다.
입술을 깨문 그녀가 이내 조소를 흘리고서 몸을 돌렸다.
"너도 그만한 재능을 타고나서 친구놀이에 시간이나 허비하지 마. 지금은 아니더라도, 어차피 결국은 다 내가 말한 대로 될 테니까."
"······."
"아, 그리고 널 확실히 앞섰다는 확신이 들면 다시 결투를 신청할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를 못 잡았네."
레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성큼성큼 떠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카앤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진짜 이상한 녀석이네······."
동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