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44화 (144/189)

수업과 적응 (4)

마법학부라고 해서 마법에 대해서만 배우는 건 아니었다.

수업으로 듣는 과목 중에는 기본적인 교양 학문도 있었는데, 역사 역시 그중 하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마왕의 탄생과 함께 올테로어의 마족들이 대대적인 침공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 수업을 담당한 조교수의 말을 들었다.

이번 역사 수업의 주제는 다름이 아닌 마족에 대한 것이었다.

"마족의 첫 목표는 그들의 영역과 바로 인접하여 붙어있는 세인테아 제국 연합이었습니다. 마족들의 사악하고 강대한 힘 앞에 인류는 빠르게 수세에 몰렸습니다. 하지만 그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인류를 구원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요?"

어린아이라도 모를 수가 없는 질문. 몇몇 학생들이 대답했다.

"그래요. 용사 에인델 님이십니다. 신께서 내리신 성검의 힘으로 용사님은 세인테아에 침공한 마족들을 처단하셨고, 역공에까지 나서 끝내 마족들의 왕인 마왕을 봉인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대륙의 세력 구도는 빠르게······."

이미 라사의 세계관을 줄줄이 꿰고 있는 내가 흥미롭게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교양이라 그런지 세세한 사건들은 없이 큰 줄기만 가르치고 있는 까닭도 있었다.

"에스카, 실제로 용사님 만나본 적 있어?"

"뭐? 그야 있을 리가 없잖아."

"랜, 너는?"

카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없어."

"그래? 한 번 만나보고 싶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용사는 과연 언제쯤 자신의 정체를 녀석에게 밝히게 될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건 그닥 좋지 않겠지만,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슬며시 물었다.

"카앤."

"응?"

"만약에 말이야, 네가 용사처럼 이 세상을 구할 운명을 타고났다면 너는 어쩔 거야?"

카앤도 에스카도 그게 뭔 뜬금없는 소리냐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뭔 소리야, 그게?"

"아니, 그냥 한번 가정해보는 거야. 네 모든 걸 희생해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면 너는 어쩔까 싶어서."

"랜, 너도 좀 독특한 구석이 있구나······."

에스카의 반응이야 아무래도 좋고, 카앤은 질문에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꽤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감이 안 와. 실제로 처해봐야 알 것 같네."

"······."

"그러는 랜, 너는 어쩔 건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영웅이 되고 싶진 않아.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야."

***

헨릿 반의 두 번째 대인 전투 수업은 첫 수업과 다르지 않았다.

"자, 지원자는 나서라."

가온 교수의 말에 한 학생이 곧바로 훈련장의 한가운데로 나왔다.

바이온 렉시오, 검술학부 신입생 대표.

그가 가장 먼저 나서자 나서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나서나 눈치만 보는 학생들을 가온 교수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둘러봤다.

별 수 없이 그녀가 상대를 고르려는데, 바이온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제가 상대를 지목해도 괜찮겠습니까?"

"음?"

바이온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리곤이 서있는 쪽이었다.

그에 가온 교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호승심을 가졌었나?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두 사람을 붙여볼 생각이기는 했었다.

'어느 쪽이 이길지야 뻔하다만······.'

가온 교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누굴 지목할 거지?"

"리곤입니다."

"리곤, 나오도록."

리곤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이온의 맞은편으로 걸어나왔다.

대련이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바이온이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라, 리곤."

"응?"

"방심 따윌 하다가 시시하게 대련이 끝나질 않길 바란다."

바이온이 나이에 맞지 않는 엄숙한 기세로 검을 치켜들었다.

리곤도 옅게 웃으며 자세를 잡고서 말했다.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어."

대련이 시작하자마자 바이온이 살벌한 기세로 돌진했다.

리곤은 정수리를 쪼갤 듯 내리쳐오는 검격을 피할까 막을까 고민하다가, 막기로 했다.

한 손으로 검을 들어올리는 리곤의 모습에 바이온의 눈가가 꿈틀했다. 이전 수업에서의 자신의 괴력을 보고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방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대로 상대의 자세를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으로 바이온은 내려치기에 전력을 다했다.

쩡!

굉음과 함께 바이온의 검이 우뚝 멈추었다.

"······!"

바이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맞물린 검을 바라봤다.

자세가 무너지기는 커녕, 리곤은 미동 하나 없이 전력을 다한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아무리 힘을 줘도 한 손으로 쥐고 있는 리곤의 검은 조금도 밀려나지가 않았다.

단순한 힘으로는 또래의 상대에게 밀려본 적이 없는 바이온에게 있어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너 힘이 장난 아니네. 손이 다 저릿하다."

검을 쳐낸 리곤이 반격을 시작했다.

다리를 노려오는 검격에 바이온이 곧장 자세를 잡고 방어했다.

하단에서 다시금 맞물린 검. 리곤은 그 상태 그대로 한 발짝 나서며 맞물린 검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한 바이온은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주도권은 순식간에 리곤에게로 넘어갔다.

그 뒤로도 바이온은 연신 뒤로 물러나며 매섭게 날아드는 검격을 막아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별다른 자세도 잡지 않고 가볍게 휘두르는 검격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강하다.'

처음 리곤의 대련을 봤을 때, 바이온은 생각했었다.

아마 1학년 학생들 중에는 저 녀석만이 자신의 맞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강하다. 바이온은 그 사실을 금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힘으로 충분히 찍어누를 수 있음에도, 리곤이 오직 검술만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고 있다는 걸 바이온은 알았다. 그조차도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대로면 결과는 뻔했다.

바이온은 이를 꽉 깨물고서 검날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승패는 아무래도 좋다. 이 녀석에게는 전력을 다해서 부딪혀보고 싶었다.

"······?"

바이온의 검날에 일렁거리는 검기를 보고 리곤은 뒤로 물러섰다. 지켜보는 학생들 또한 웅성거렸다.

1학년 신입생이 기사들이나 사용하는 검기라니, 보통의 학생들에게는 까마득한 일이었으니까.

리곤은 가온 교수가 서있는 쪽을 바라봤다.

검기까지 써도 되는 건가 싶어서 본 거였는데, 그녀는 대련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도 검기를 사용해라, 리곤!'

바이온이 검기를 두른 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검으로 검기를 막는다면 부러질 것이다.

하지만 리곤은 검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격을 피하지도 않았다.

두 검날이 닿는 순간, 리곤은 검날을 기울여 바이온의 검을 매끄럽게 흘려냈다.

바이온의 검이 허무하게 바닥을 내리쳤고, 그 사이에 리곤의 검은 그의 목에 닿아있었다.

"아, 아깝네. 반쯤 성공인가."

리곤의 중얼거림에 넋을 놓고 있던 바이온의 리곤의 검을 바라봤다.

흘려내기가 완전하지는 않았는지 검날의 이가 박살나고 금이 가있었다.

"허······."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있던 가온 교수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그런 리곤을 바라봤다.

리곤이 정면에서 바이온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라서 나서려고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기를 두른 검을 맨 검으로 흘려내려고 하다니. 심지어 그걸 또 성공시켰다.

훈련용 가검이 아니라 더 내구도가 높은 검이었다면 검도 멀쩡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녀석이야.'

가온 교수가 헛웃음을 흘리며 선언했다.

"대련 종료. 리곤의 승리다."

"교수님, 근데 검이 부러지기 직전인데······."

"신경 쓰지 마라. 대련 중의 모든 사고는 학생에게 책임이 없으니까."

설마 자신이 물어내야 싶었던 리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바이온이 리곤에게 물었다.

"왜 굳이 검기를 사용하지 않고 막았지?"

"응?"

"네 실력이라면 나를 얼마든지 압도할 수 있었다. 내게 모욕감을 주고 싶었나?"

리곤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뭔 소리야, 그게. 그냥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시험해본 건데."

"······대련 결과가 시험 성적에 포함된다는 걸 잊었나? 고작 그런 이유로 도박을 했다고?"

"난 성적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너랑 대련은 그래도 제법 즐거웠어. 그게 전부야."

그 말에 바이온은 빤히 리곤을 바라보다가, 저벅저벅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바이온 렉시오다."

"어, 아는데······."

"나도 네 이름은 안다, 리곤."

리곤은 특이한 녀석이다 생각하며 악수를 받았다.

***

오전 수업이 끝나고 식당으로 향하자 누군가와 함께 있는 리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과 거대한 덩치에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신입생 대표였던······.'

리곤이 다른 친구와 어울리는 건 본 적 없었는데.

카앤과 에스카도 의아하게 바라봤다.

"저 덩치는 뭐야? 교복 입은 거 보니까 학생 맞지?"

리곤도 우리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얘는 누구야, 리곤?"

"반 친구야. 같이 점심을 먹고 싶다고 하는데, 상관없지?"

카앤이 오오, 하고 탄성을 뱉었다.

"물론 상관없지. 그보다 리곤한테도 드디어 친구가 생긴 건가?"

남학생이 우리를 슥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바이온 렉시오다. 너희는 전부 마법학부 학생들인가?"

"응, 맞아."

"의외군."

검술학부면서 친구는 전부 마법학부 학생들인 게 의외라는 거겠지.

어쨌든 그렇게 식사 자리에 새로운 인원이 추가됐다.

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우리는 바이온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리곤에게 패배했다. 좋은 목표점이 될 것 같아서 리곤과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흐응, 그렇구나. 근데 너는 리곤이 안 껄끄러워? 리곤이 칼데릭 출신인 걸 모르는 건 아니지?"

"출신이 무슨 상관이지?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고맙긴 한데, 반 애들이 날 피하는 건 알잖아? 나랑 어울리면 너까지 피할 수도 있다고, 바이온."

그에 바이온이 눈을 깜빡였다.

"딱히 상관없다. 나도 다른 친구는 하나도 없으니. 리곤 말고는 죄다 시시한 녀석들뿐이고."

그 말에 카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마음에 든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식당 한편에서 몇몇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레아였다.

"야, 사과 안 할 거야? 너 때문에 옷에 다 튀었잖아!"

레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상대는 1학년이 아니라 상급생이었다.

척 보니 지나가다가 부딪혀서 옷에 음식이 튄 걸로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상급생 둘을 상대로도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저는 가만히 있었고, 부딪혀온 건 선배님들입니다. 제가 사과할 이유가 있나요?"

"근데 이 싸가지없는 게 진짜······."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상급생들은 더 뭐라 못하고, 욕만 몇 마디 더 뱉어내다가 물러섰다.

주위의 학생들이 그 광경을 보며 떠들었다.

"쟤 신입생 아니야? 3학년들이 왜 저렇게 쫄아서 물러나?"

"너 쟤가 누군지 모르냐? 레아 헤리윈이잖아."

에스카가 슬며시 바이온에게 물었다.

"저기, 바이온. 너는 검술학부 신입생 대표가 맞지?"

"그렇다."

"그럼 레아와도 아는 사이야? 입학식에서 함께 강단에 섰었잖아."

"아는 사이긴 하지. 가문끼리 교류도 있고. 하지만 딱히 친하지는 않다."

바이온이 뒷말을 덧붙였다.

"저 녀석도 내 목표점이다. 리곤 말고 비슷한 나이의 상대에게 패배한 건 저 녀석이 유일하다."

카앤이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껴들었다.

"그래? 쟤 우리랑 같은 반이야. 수업 때 보니까 강하긴 하더라."

"그렇겠지."

식사를 하는 동안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제로 떠들었다.

아카데미 생활 내내 넷이서만 어울리게 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멤버가 한 명 더 늘어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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