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41화 (141/189)

수업과 적응 (1)

리곤의 삶은 평화로움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위치해있던 삶이었다.

고향은 멸망하고, 자신은 끔찍한 불치병에 걸리고, 누이는 그런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노예 검투사가 되어 몇 년을 생사의 경계 속에서 살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리곤은 새삼 묘한 감정을 느끼며 아카데미의 복도를 걸었다.

검술학부에는 총 5개의 반이 존재했으며, 그중 리곤이 배정받은 반은 '헨릿'이라는 이름의 반이었다.

'여긴가?'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채 리곤은 반으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해서 앉아있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몰렸다.

리곤은 인사를 해야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기에 그냥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이 하나둘씩 반으로 들어왔다.

그중에 한 남학생이 리곤의 근처로 다가와서 앉아 인사를 건네왔다.

"여, 안녕."

모르는 이였기에 리곤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너 205호 기숙사지? 나 바로 옆방 206호야. 몇 번 지나가면서 봤는데 얼굴 기억 안 나?"

남학생이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에 리곤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 어쩐지 조금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같은 반이 될 줄은 몰랐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그래, 잘 지내보자."

"제이스 마홉, 내 이름이야. 마홉 가의 삼남인데 우리 가문 들어본 적 있어? 좀 변경에 있긴 해도 남부에서는 꽤 유명한데."

알 턱이 없었기에 리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쩝, 역시 모르는구만. 네 이름도 가르쳐줘."

"난 리곤이야."

"리곤이구나. 성은?"

"성은 없는데."

그 말에 남학생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쳐다봤다.

"아······ 너 귀족이 아니었구나?"

"응."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리곤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난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그럴 생각 전혀 없거든. 오히려 대단하네. 가문도 없으면 순수하게 네 능력만으로 인정받아서 입학했다는 거잖아?"

"음, 그런가?"

"그런 거지. 여기서는 입만 살아서 배경 따지는 게 머저리 같은 짓이라더라. 실력으로 증명해야지."

리곤은 좋은 녀석이구나 생각하며 함께 웃었다.

"그보다 넌 어디 출신이야? 궁금한데 혹시 누구한테 추천받았는지 알려줄 수 있어?"

"아, 나는 칼데릭에서 왔어. 세인테아 사람이 아니라······."

리곤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으나, 웃음기 가득했던 남학생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칼데릭?"

순간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두 사람에게로 몰렸다.

그들 또한 남학생과 비슷한 표정으로 리곤을 쳐다봤다.

"그, 그렇구나. 하하."

리곤의 어깨에서 슬며시 손을 뗀 남학생이 입을 꾹 다물었다.

리곤은 왜 그러나 싶어 말을 걸려다가, 그가 겁을 먹은 거란 사실을 깨닫고서 관두었다.

"······방금 들었어? 칼데릭이래."

"진짜 거기서도 사람이 오는구나······."

조금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 주위 학생들이 소곤거렸다.

리곤은 잘 몰랐지만, 세인테아의 사람들에게 있어 칼데릭의 이미지란 이러했다.

대륙의 유일한 드래곤이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거칠고 무자비한 강자존의 땅.

온실 속에서 자라온 어린 귀족들에게 있어선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건가?

뒤늦게 어떤 분위기인지 감을 잡은 리곤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은 듯했다.

***

1교시 수업은 마법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한 수업이었다. 마력의 방출과 술식의 전개에 대한.

간단히 말해서 모든 마법을 펼치는 데 있어 적용되는 과정을 자세히 탐구하는 것이었다.

"즉, 술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정해진 형태가 없다. 개개인이 다르게 느끼는 심상을 말로 설명해서 가르치는 건 고블린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조금 덜 머저리 같은 짓거리에 불과하지. 그런데도 이런 수업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이 수업에 유의미한 배움이 있다고 생각하나?"

로켈 교수가 대답해보라는 듯 앞자리에 앉은 한 남학생을 바라봤다.

"어, 그게 그러니까······."

남학생은 당황해서 더듬거리기만 할 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턱을 긁적였다. 물론 나도 정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교수의 시선이 다른 학생에게로 향했다.

"모든 술식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이론을 배우려고······."

"그건 이 다음에 있을 이론 마법 수업에서 열심히 배우도록. 다음."

계속해서 다른 학생들의 대답이 이어졌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게도 교수의 시선이 닿았기에 나는 조금 고민하는 척하다가 당당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는 별 반응 없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이었다. 레아 헤리윈.

그녀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입을 열고 대답했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에 그제야 교수의 표정에 미약한 변화가 생기는 게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이미 제 술식의 형태가 어떤지를 완전히 인지하고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러니 적어도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업이 맞습니다. 술식과 관련해서는."

교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 말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대답해보겠나?"

그녀가 주위를 한 번 힐끗 둘러보고는 말했다.

"앞서 말씀하셨다시피 술식은 본질적으로 무형합니다. 때문에 아직 자신의 술식을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 미숙한 마법사들은 술식의 형을 다르게, 더 적합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수업은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저와는 다른 이유로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겠죠."

물 흐르듯 매끄러운 대답.

교수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정답이 맞는 듯했다.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씹어보다가 이내 깨달았다.

'아······ 그래서 그런 거였나?'

내가 군주성에서 마법을 배울 때도 가르치는 역할을 했던 마법사는 내게 다양한 술식의 형을 최대한 말로 설명하며 알려주려고 애썼었다.

그건 방금 그녀가 말한 것처럼 내가 술식을 다르게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지를 기대했기에 그랬던 것이리라.

교수가 턱을 긁적이며 다시 레아 헤르윈에게 물었다.

"자네가 술식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게 어느 시점이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인지했습니다."

"타고났군. 다들 방금의 설명은 잘 들었나?"

그가 교탁을 툭툭 두드리고서 말을 이었다.

"술식은 무형하기에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계기야 아무래도 좋다. 이 수업은 그 계기라는 걸 너희들에게 최대한 많이 제시해주기 위해 마련된, 1학년에만 존재하는 기초 수업이다."

"······."

"들었다시피 아주 간단한 이유지. 들으면 누구나 그렇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한데 질문에 대답한 건 단 한 명뿐이다. 그것도 애당초 이 수업이 필요하지도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가장 알 필요가 없는 학생이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학생들이 침묵했다.

"그 이유 또한 간단하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했겠지. 문자나 그림으로 그럴듯하게 표현된 술식들을 많이 접하고, 외웠을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은 품지 않고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도 딱히 의문을 품지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었으니까.

"물론 그런 식으로도 실력은 발전한다.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뛰어난 마법사도 될 수 있겠지. 그러나 마법의 본질은 탐구하는 것이다. 사소한 의문과 궁금증 하나까지도 샅샅이 전부. 너희가 책으로 봐온 술식들도 수많은 마법사들의 그러한 탐구의 산물이다. 남들이 편하다고 알려준 길만 걷다간 그저 그뿐인 마법사가 될 것이다. 뛰어날지언정 결코 위대하지는 못한."

대부분 학생들의 묘한 표정을 짓자 교수는 조금 김이 빠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겠지. 위대하느니 어쩌니, 평생을 마법에 전념하며 살 것도 아닌데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맞다. 적당히 할 녀석들은 그렇게 하면 된다. 적당히 배우고, 적당히 학업에 전념하고, 적당히 퇴학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열심히 해서 적당히 졸업해라. 나도 그런 어중간한 놈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으니. 그렇지 않은 녀석들에게는 내 말이 사소하게나마 조언이 되었기를 바란다."

교수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첫 수업은 이 정도로 마치겠다. 남은 시간은 휴식해라. 종례는 따로 없으니 수업이 전부 끝나면 그대로 해산하면 된다. 설마 아직까지 교칙도 다 숙지 못하진 않았겠지."

교수가 반 밖으로 걸어나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일 있는 대인 전투는 이 수업처럼 말로만 떠드는 수업이 아니니 단단히 준비들 하고 오도록."

그가 나가고 나서도 교실은 한동안 침묵에 잠겨있다가, 곧 긴장이 풀어진 분위기가 되었다.

교수 성격이 깐깐하다느니, 앞으로 힘들 것 같다느니, 몇몇 학생들이 작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앞자리의 계승자를 바라봤다.

"말하는 게 왠지 좀 재수없는데?"

"카, 카앤. 교수님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친구인 여학생이 당황하며 계승자를 말렸다.

그래도 수업이란 것 자체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계승자의 입가엔 재밌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갑자기 따분하다고 다 때려치고 나가기라도 하면 그것도 곤란하니 잘된 일이었다.

***

다음 수업은 이론 마법 수업이었다.

담당 교수는 로켈 교수보다는 비교적 젊은 여성이었다.

"이론 마법 과목을 맡은 마린드 필리스티아 교수라고 합니다. 전공은 해독계 마법입니다. 혹시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 학생은 얼마든지 질문하도록 하세요."

질문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없다면 바로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죠."

이론 마법이란 말 그대로 마법의 이론에 관련한 것이었다.

무한한 형태를 가진 술식에서 그나마의 공통성들을 찾고, 그를 가시적으로 표현한 학문. 수많은 마법사들이 아주 오랜 시대에 걸쳐 정리하고 발전시킨 인고와 지혜의 총집합.

성에서 마법을 배울 때 날 가르쳤던 마법사는 이렇게 비유했었다.

'술식이 육체라면, 이론은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식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육체 자체를 단련하는 거라면, 거기에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무기를 잡는 일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어울리는 무기는 각자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검이 가장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메이스가 가장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채찍이 가장 적합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한 이론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 규칙성을 술식에 응용하여 무기의 숙련도를 높이는 게 이론을 학습해야 하는 이유······ 라고 했었다.

대마법사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마법을 창조하는 것 역시 대체로 이론에서부터 출발되는 거라던가.

'근데 더럽게 어렵지.'

마법 이론은 술식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분야의 자질이긴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내게 있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이 이론이라는 거야말로 정말 수학 공부와 다름이 없었으니까.

내가 고등학교 때도 일찍이 포기하고 손을 놨던 과목이 바로 수학이었다.

마린드 교수가 학생들을 슥 둘러보더니 말했다.

"4명으로 나누면 적당하겠네요. 자, 지금 바로 넷씩 가까운 사람끼리 붙어앉도록 하세요. 제 수업은 조별 형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조별 수업? 그런 식으로도 하는 건가.

나는 이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붙어있는 사람끼리 조를 이루는 거라면 나는 계승자와 한 조였으니까.

"음, 아니다. 그냥 출석 명단 순으로 나눠야겠네요. 다들 다시 앉으세요."

그런데 학생들이 우왕좌왕거리는 걸 본 교수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아, 그냥 그대로 하지.

"아리아 맨카스트, 앤디 그리밋, 오실리아 트로앙······."

그렇게 내가 속하게 된 조에는 아쉽게도 계승자는 없었다.

대신 한 명 보통이 아닌 녀석이 있었는데, 레아 헤리윈이 나와 같은 조가 되었다.

"첫 수업의 주제는 화염 마법입니다. 지금부터 자료를 나눠드릴 테니, 제가 칠판에 적는 문제를 자료에 제시된 이론을 적용해서 풀어보도록 하세요. 우선 조원들끼리 문제를 논의하고 푼 다음 제가 해답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할 겁니다. 시간은 30분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나눠받은 자료와 칠판의 문제를 훑어보고서 벌써부터 머리가 난잡해지는 걸 느꼈다.

원소 마법에서 가장 기초에 속하는 화염 마법.

물론 나도 지금은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이론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마법 이론이란 건 마법의 기본적인 형식을 다양하게 응용시키는 학문이기도 했으니까.

"저기······ 어떻게 할까?"

조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나까지 포함해서 조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레아 헤리윈에게.

자료를 읽고 있던 그녀가 우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분담해서 풀어야지."

"응, 그렇지. 근데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논의부터 해야 될 것 같은데······."

"할 필요 없어. 해석 다 끝났으니까."

그 말에 그녀는 무언가를 종이에 슥슥 적고는 보여주었다.

"이런 식으로 풀면 되는 문제야. 계산할 부분은 내가 분담해줄 테니 각자 계산하도록 해. 이견 있어?"

조원들이 입이 떡 벌어져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도 속으로 놀랐다. 자료 받고 몇 분도 안 지났는데 그새 혼자 문제를 해결했다고?

'진짜 천재구나.'

레아는 이내 종이 4장에 계산식을 나눠적어서 척 봐도 가장 어려워 보이는 식은 자신이 가져가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해석이 끝났으니 각자 계산만 해서 합치면 문제 풀이는 끝이었다.

"······."

나는 종이에 펜을 끄적거리며 내 몫을 열심히 계산했다.

하지만 썩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런 단순 계산조차도 입문자인 내게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부호 해석이 헷갈려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계산하고, 기댓값이 안 나와서 했던 계산을 몇 번이나 다시 하고······.

그렇게 버벅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다른 조원들은 전부 다 계산을 끝내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좀 민망한데?'

순간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집중된 시선 속에 나는 묵묵히 계산을 계속했다.

"5분 남았습니다. 슬슬 정리하세요."

교수의 말에 레아가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아직도 안 끝났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데 5분 안에는 못 끝낼 것 같네."

그녀가 내 종이를 들여다봤다.

종이에 적힌 처참한 풀이 흔적들을 슥 훑어보고는, 경멸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입학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네."

그녀는 고맙게도 내 종이를 낚아채가서 자신이 마저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버리더니 나머지 종이들까지 모아서 한 데에 장문의 해설을 써내려갔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좋네.'

이런 녀석과 같은 조가 됐으니, 앞으로도 이론 수업은 적당히 얹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이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하루의 수업은 점심 시간인 정오를 기준으로 오전에 두 수업, 그리고 오후에 한두 수업이 존재했다.

생각보다 빡세지는 않았지만 수업 시간이 90분이었기에 그렇게 널널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음.'

나는 친구와 함께 반에서 나가는 계승자를 바라보며 아는 척을 할까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어째 열대여섯 살짜리 애랑 친구 먹는 게 흑해 여제랑 싸울 때보다 까다로운 것 같은 기분일까.

이건 내가 필요 이상으로 신중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계승자와 친분을 쌓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에, 시작부터 망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으니까.

일단 점심은 넘기기로 하고 오후 수업이 끝나고 한번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식당으로 이동한 나는 리곤과 만났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는 학비에 전부 포함되는 것이었기에 사비는 따로 들지 않는다.

"수업은 어땠어? 마법이면 이것저것 배울 게 많을 것 같은데."

"글쎄. 그냥저냥 들을 만한 것 같네."

그러고 보니 리곤 얘는 검술뿐만 아니라 마법도 배웠던가.

줄을 선 채 잡담을 떨다가 식사를 받고서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는데······.

'어.'

문득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계승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데 마침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리곤에게 물었다.

"리곤, 저기 가서 앉을래?"

"어? 아는 사람이야?"

"나랑 같은 반 애들인데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계승자와 연결고리를 만드는 건 나보다도 리곤이 더 문제였는데, 마침 좋은 기회였다.

리곤은 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자 계승자의 친구가 먼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고기를 써는 데에 열중하고 있던 계승자도 이내 우릴 쳐다봤다.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안녕. 혹시 나 누군지 기억해?"

계승자의 친구는 알아보는 눈치였다.

"아까 수업 때 뒷자리에 앉은······?"

"맞아. 혹시 합석해도 될까? 앉을 자리 찾는데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말이야."

그녀가 눈을 깜빡이다가 계승자를 돌아봤다.

계승자가 입에 한가득 담고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같이 앉고 싶다는 거야? 상관없어."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한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랜이라고 해. 그리고 이쪽은 리곤. 마법학부는 아니고 검술학부인데, 내 룸메이트야."

"으응, 반가워. 난 에스카 마리올즈야. 우리 둘도 룸메이트라서 금방 친해졌어."

계승자의 친구, 에스카가 서먹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난 카앤이야. 그런데 너희들도 이름에 성이 없네?"

계승자가 껴들어서 왜인지 반가운 기색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우리 둘 다 평민이니까."

"평민, 그거 귀족이 아니라는 뜻이지?"

나는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상하게 내가 말 거는 애들마다 말이야, 내 이름을 알려주면 꼭 성이 뭐냐고 물어보고, 성이 없다 하면 왠지 그냥 무시해버리거든. 에스카만 빼고."

"······."

"혹시 너희도 그래? 왜 그런 건지 알아?"

천진한 질문에 나는 볼을 긁적였다.

에스카는 몰랐던 이야기인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계승자는 아직 세간의 상식이 부족하다. 당연히 계층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것이었다.

막 수프를 뜨던 리곤이 그걸 왜 모르나 싶은 기색으로 말해주었다.

"보통 평민이라면 무시하는 귀족들이 많아서 그래."

"그래? 왜?"

"그야 신분이 낮으니까?"

계승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신분이 낮다고 무시한다고? 어째서?"

"어째서냐니······ 그냥 귀족은 원래 그래. 자기보다 가진 게 없으니까 무시하는 거지. 에스카라고 했나? 네 친구처럼 평민이라고 무시하지 않는 귀족은 드물걸. 굳이 귀족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잖아?"

아무렇지 않게 냉소적인 이야기를 하는 리곤을 보며 나는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긴, 얘는 계승자처럼 산속에서만 산 것도 아니고 리프와 함께 겪은 일들이 많을 테니.

계승자는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대충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갑자기 에스카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에스카, 너 진짜 좋은 녀석이었구나? 귀족인데도 나랑 어울려주고."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하하······."

에스카가 조금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겠어. 나도 명색만 귀족일 뿐인데."

"응? 그건 무슨 소리야?"

"그냥 너희들이랑 다를 것 하나 없다는 소리야. 우리 가문은 변방의 작은 가문이거든.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귀족이 아니야."

약소 귀족이라는 거군.

당연히 귀족이라고 해서 잘 사는 귀족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음,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에스카 넌 좋은 녀석이야."

"그래, 그래."

에스카는 계승자에게 이미 익숙한지 막무가내식 말에도 적당히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아, 그런데 나도 내 출신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 안 말하면 왠지 속이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때 리곤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난 세인테아가 아니라 칼데릭 출신이야. 칼데릭에서 7군주님께 추천을 받고 엘폰에 입학하게 됐어."

내게는 이미 꺼낸 적이 있는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그걸 왜 말하나 싶었다.

계승자는 별 반응 없었다.

그래서 뭐? 라는 얼굴로 리곤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어? 7군주라면······ 아."

무언가 생각난 듯 말하려던 계승자가 아차 싶은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약간 안도했다.

전에 나와 만났던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용사에게 언질을 받았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 꺼내지 않고 잘 멈췄다.

"카, 칼데릭?"

리곤의 말에 에스카는 몹시 놀란 기색이었다.

격한 반응에 계승자가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봤고, 리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 애들한텐 칼데릭 출신의 사람이 썩 달갑지는 않은가봐. 반에서도 어쩌다 이야기를 꺼냈는데 다들 날 피하더라고."

"그래? 왜 그러지?"

아, 그런 거였나.

상황을 이해한 나는 이야기에 껴들었다.

"세인테아 사람들에겐 칼데릭의 인식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래.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리곤은 좋은 녀석이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오해 같은 거 안 하는데? 애초에 왜 인식이 나쁘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난 칼데릭 출신이라고 피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전혀 아무렇지 않은 계승자의 반응에 리곤도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렇지, 에스카?"

"어? 어······ 미안. 그냥 조금 놀라서."

에스카가 리곤의 눈치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저게 보통의 반응이기는 할 터였다.

"그런데 리곤, 7군주와는 무슨 사이야? 칼데릭의 군주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던데, 그럼 너도 대단한 가문 사람인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그분께 우연히 목숨을 구원받아서······."

계승자도 나와 만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리곤의 이야기에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다.

내 앞에서 나에 대한 걸 주제로 떠드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약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쨌든 공통 분모가 생긴 건가?'

뭐가 됐든, 두 사람이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게 될 것 같았기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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