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40화 (140/189)

엘폰 아카데미

"너는 조금도 늙지를 않았구나, 에인델."

엘폰 아카데미의 교장, 나인베르크는 몇 년 만에 보게 된 벗의 얼굴을 바라보며 반갑게 웃었다.

용사, 에인델 역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너는 얼굴에 주름이 많이 늘었다, 나인베르크."

"누구 놀리나? 한번 성검에게 물어봐다오. 회춘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이 팔자 주름만 어떻게 좀 없애줄 수는 없냐고."

두 사람은 자리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잠시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나인베르크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성동에서는 언제 나왔나?"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세상에 나와있을 생각인가?"

"그렇지."

"몸은 어떻지?"

"좋지 않아. 아마 10년도 버티기 힘들 거야."

태연한 대꾸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올곧기 그지없는 벗은 사소한 것 하나에도 짖궂은 농을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성검의 신력으로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인가?"

에인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베르크는 뭐라고 더 묻지 않았다. 잠시 교장실에 침묵이 흘렀다.

"올테로어로 향하기 전에 작별이라도 고하러 온 거라면 관둬라. 설령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너의 그런 마지막을 바라지 않아."

"너도 말투가 제법 순해지긴 했구나. 그래도 교장을 하니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이봐, 에인델."

에인델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언젠간 그래야 할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나도 내 목숨을 허망하게 내던질 생각은 없다. 시간이 남은 한 끝까지 발악할 것이지."

나인베르크가 한숨을 내쉬며 쇼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럼 왜 이곳에 찾아왔나? 설마 정말로 얼굴만 보려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음, 그게 말이지."

이어진 에인델의 말에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추천 입학?"

"그래. 아카데미에 두 아이를 입학시키고 싶은데, 내 존재는 숨기고 네 권한으로 어떻게 해줄 수 있나?"

"물론 가능이야 하지. 그런데 왜? 몹시 당황스러운 요구를 하는군. 혹시 내가 모르는 새에 자식이라도 생겼었나? 어느 놈팽이지?"

"실없는 농은 말고. 어쨌든 가능하다는 거군."

나인베르크가 재촉하듯 말했다.

"됐으니 제대로 된 설명을 해봐라. 네 존재를 숨기라는 걸 보니 설마하니 후계를 양성할 마음이 든 것도 아닐 테고, 대체 뭐냐?"

에인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인베르크, 이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네게 이유는 설명해줄 수 없어."

"······어째서?"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나인베르크는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성검과 관련된 건가. 알았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해해줘서 고맙다."

"내가 해줘야 될 일은 그것뿐인가?"

"그래. 그저 입학만 시켜주면 된다. 다른 건 특별히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다."

나인베르크는 에인델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몹시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만큼 절대적인 신뢰였다. 바란다면 목숨조차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줄 수 있는.

찻잔을 전부 비운 에인델이 물었다.

"그보다 나인베르크, 아직 보인 건 아무것도 없나?"

나인베르크가 고개를 저었다.

"없다. 그날 이후로 아무것도. 암운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곧 뭔가 보일지도 모르지."

***

리곤은 성의 기사들을 호위로 대동시켜 진작 먼저 세인테아로 보냈다. 마차로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띠용이를 타고 가도 되긴 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괜히 여러모로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저기 있군.'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출발한 나는 라피드 시 인근의 숲에 내려섰다.

숲 한가운데에 한 여인이 로브를 걸친 채 서있었다. 용사였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계승자는?"

내 물음에 용사가 대답했다.

"카앤은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새학기 시작 전에 기숙사에 먼저 들어가야 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들여보냈군.

입학일 전, 그러니까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신입생들은 미리 아카데미 내에 위치한 기숙사에 들어가서 생활해야 했다. 교내 분위기에 적응하고, 학생으로서 필요한 물품들도 제공받기 위해.

아마 지금쯤 리곤도 아카데미 내에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 지체할 건 없지. 나도 바로 들어가겠다. 달리 숙지해야 할 사항은 있나?"

"특별히 없다. 전부 이야기했던 대로다. 아, 하나 사소하지만 바뀐 게 있긴 한데······."

"뭐지?"

"그대와 카앤은 검술학부가 아니라 마법학부의 학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게 전부다."

용사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전에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는 분명 검술학부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카앤이 마음을 바꿔서 말이다. 이왕이면 익숙하지 않은 마법을 배우고 싶다더군."

"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내 반응에 용사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

뭐, 괜찮겠지.

내 마법 실력이 좀 처참하긴 해도 퇴학 당할 정도만 아니면 되니까.

검술 학부가 아니라 마법 학부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러면 리곤과는 학부부터 완전히 갈라지게 생겼네.'

리곤의 존재에 대해서는 특별히 용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계승자와 리곤이 쉽게 친해지려면 리곤에 대해서도 용사에게 말해두는 게 맞았다.

그러면 용사가 아카데미의 교장에게 부탁해서 셋을 같은 반으로 묶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최대한 조심하기 위해서.

용사는 교장을 신뢰하는 동료라고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용사가 계승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진 않았겠지만, 괜히 칼데릭의 군주가 추천한 인물과 용사의 추천한 이들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걸 제3의 인물이 괜히 인지하고 싶게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가 용사를 배신하고 그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도 제로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내 안일함 때문에 용사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산에서 만난 그 교수까지는 별 수 없지만.'

그런데 이러면 반은 고사하고 학부가 나뉘었으니 리곤과는 좀 멀리 떨어지게 된 셈이었다.

살짝 꼬인 느낌이 들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같은 학년 학생인데 어떻게든 만나서 친해지게 할 방법은 있겠지.

"어쨌든,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제······."

내가 끝말을 흐리자 용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허공에 손을 뻗었다.

찬란한 황금빛이 모여들며 성검이 나타났다.

"원하는 외모가 있다면 되도록 맞춰보겠다."

"딱히 없다. 머리칼과 눈동자 색은 바꾸고, 나머지는 무난하게 하지."

이제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으로 내 외형을 바꿀 차례였다.

내가 지금 이 얼굴 그대로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니까.

참고로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은 쓸데없이 너무 뛰어나서 성별의 전환조차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용사가 아예 여자가 되는 건 어떻겠냐고 전에 내게 진지하게 물었을 땐 기겁했었다.

물론 용사의 입장에서야 최대한 계승자의 안전을 신경 써야 하기에 제안한 것일 터였다.

내가 계승자와 동성이라면 기숙사까지 한 방을 쓸 수 있을 테고, 그러면 항시 옆에 붙어서 지킬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별까지 바꾸는 건 좀.'

그랬다간 제왕의 혼으로도 버티지 못할 자괴감이 몰려올 것 같았기에 거절했다.

아무리 계승자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런 건 내가 못 버텼다.

화아악.

성검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뿜어져나오더니 내 전신을 뒤덮었다.

온몸에 차오르는 이질감에 불쑥 메스꺼움이 차올랐지만 찰나였다.

이내 빛이 사라지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내 손을 내려다봤다.

"······끝난 건가?"

용사가 성검의 힘으로 내 앞의 허공에 거울을 만들어주었다.

갈색 머리칼에 벽안을 가진, 평범하디 평범한 소년의 얼굴.

나는 얼굴 이곳저곳을 더듬거리며 완전히 뒤바뀐 외모를 확인했다.

크게 신기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는 일인 데다가, 나는 애당초 기존의 얼굴에도 아직까지 그닥 적응이 안 된 상태였었기 때문이다.

체격 역시 아직 미성숙한 소년 정도의 나이에 맞게 조금 작아졌다.

용사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어떤가?"

"괜찮은 것 같다. 음."

아, 목소리까지 어려졌군.

나는 조금 헐렁해진 로브를 다시 올려입었다.

갑자기 변한 몸에 이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야 금방 적응될 것이었다.

"혹시라도 폴리모프가 풀리거나 들킬 일은 없겠지?"

"없다. 대마법사가 오더라도 꿰뚫어보거나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용사가 저렇게 확언한다면 걱정할 일은 없겠지.

나는 띠용이에게 다가갔다.

"성으로 돌아가라, 띠용아. 왔던 길 그대로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이제 한동안은 못 만날 거다."

띠용이는 아쉬운 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 손에 머리를 부벼대다가, 이내 날갯짓을 하며 떠올랐다.

하늘 저편으로 순식간에 멀어지는 녀석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가보겠다."

용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엘폰 아카데미의 문양이 새겨진 배지. 신분 증명에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럼 믿고 맡기겠다, 7군주."

그렇게 용사도 떠나고, 홀로 숲에 남은 나는 잠시 가만히 서있다가 몸을 돌렸다.

라피드 시, 엘폰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으로.

***

"우와."

엘폰의 정문을 통과한 카앤은 아카데미의 내부 전경을 구경하며 탄성을 뱉었다.

산맥에서 나와 델을 따라다니며 여러 도시들을 구경했지만, 이렇게나 크고 높은 건물들은 처음 봤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안내인이 멈춰선 그녀를 재촉했다.

"이쪽입니다, 카앤 학생."

"아, 네."

카앤은 어서 기숙사로 가서 자신이 머물 방부터 구경하고 싶었으나, 바로 입실할 수는 없었다.

아까부터 뭘 이리 묻고 확인할 게 많은지 또 관계자들과 한참을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델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기에 카앤은 얌전히 말에 따랐다.

그렇게 입학 절차를 전부 마친 다음에야 기숙사로 이동할 수 있었다.

카앤의 방은 220호로 복도 끝쪽에 위치해있었다.

그녀는 받은 룸키를 꺼내들고 어설프게 문고리에 밀어넣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고 깔끔한 방 내부가 펼쳐졌다.

가구들은 책상과 침상 등 기본적인 것들이 전부였다.

카앤은 잠시 방을 둘러보다가 방 한편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층 침상의 위층 침대로 올라가서 냅다 드러누웠다.

'2명이 한 방을 같이 쓴다고 했었지.'

방을 같이 쓰게 될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그녀는 선잠에 들었다.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난 건 잠시 뒤였다.

몸을 일으킨 카앤은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방 현관에 어색하게 서있었다.

"저기······."

카앤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안녕?"

"어? 어. 안녕."

"나 여기 방인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깜빡 잠들었어. 너도 이 방이지?"

소녀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에스카라고 해. 에스카 마리올즈. 너는?"

"난 카앤."

"카앤이구나. 성은?"

"성? 그런 건 딱히 없는데. 그냥 카앤이야."

소녀, 에스카가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카앤. 룸메이트가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해."

훌쩍 침대에서 뛰어내린 카앤이 그녀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나도 반가워! 잘 지내보자!"

***

라피드 시 안으로 들어온 나는 곧장 아카데미로 향했다.

정문에서 경비들과 함께 서있던 안내인의 안내에 따라서 이동했다.

전에 신비를 찾을 때도 한 번 온 적이 있던 장소였지만, 제대로 다시 보니 넓기는 엄청 넓었다.

본관 같은 건물의 카운터에서 신분 증명과 물품 지급 등 필요한 절차들을 마쳤다.

지급받은 물건은 교복이나 학생 수첩 등, 앞으로 필요한 용품들이었다.

그렇게 정식 입학 절차를 전부 마친 다음 곧장 기숙사로 이동했다.

기숙사는 남자와 여자 기숙사로 나뉘어있었는데, 두 건물은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있었다.

'계승자는 220호 방에 배정받을 거라고 했었지.'

나는 잠시 기숙사 건물 앞에 멈춰섰다.

초감각을 끌어올린 채 계승자가 있을 곳을 헤아려봤다. 2층의 방이니까······.

'······찾았다.'

2층에서 왼쪽 끝 방.

방 안에서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는데, 들어보니 한쪽은 계승자인 카앤이 맞았다.

벌써 룸메이트와 친해진 건가 생각하며 나는 남자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 건물이고, 위치는 파악했으니 방에서도 그녀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205호.'

내가 배정받은 방은 205호였다.

방문 앞에 선 나는 방 안에서 기척을 느꼈다. 내 룸메이트는 나보다 먼저 들어온 모양이었다.

철컥.

별 생각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룸메이트의 얼굴을 확인하고 움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듯했던 리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뭐지?

이런 우연이 있다고?

방 배정은 학부가 아니라 학년별로만 나뉘는 거라고 했으니, 검술학부인 리곤이 나와 같은 방으로 배정받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했지만······.

"안녕."

리곤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물론 녀석이 내 정체를 알아볼 리는 없었다.

나도 황당함을 숨기고 인사했다.

"안녕."

"너도 이 방에 배정받은 거지? 둘이서 한 방을 쓰는 거라고 하더라."

"어, 알고 있어."

"나는 리곤이야. 너는?"

나는 새로운 이름을 입에 담았다.

"랜. 앞으로 잘 지내보자."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리곤과도 가까운 관계가 돼야 했는데, 운 좋게 같은 방이 됐으니 금방 친해질 수 있으리라.

***

개학일, 그러니까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는 날짜는 내가 기숙사에 들어온 시점으로부터 일주일 정도 뒤였다.

그동안 나는 아카데미 내에서 무난하게 시간을 보냈다.

리곤과는 빠르게 친해졌다. 군주성에서도 굉장히 스스럼없는 성격이었던 리곤이었기에 친해지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계승자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신경 써서 살폈다.

길을 오가며 종종 마주치기는 했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개학하면 같은 반이 될 테고, 특별한 접점도 없는 지금 애써 무리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산맥에서 봤던 계승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다고 해서 경계를 사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공용 도서관에도 한 차례 방문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이전에 몰래 잠입했을 때는 아직 신비가 생성되지 않은 건지 허탕만 쳤었던 그 책장을.

'없네.'

하지만 여전히 신비는 없었다.

언제 생성될지 모르는 거니까 기회가 될 때마다 틈틈이 와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개학일 바로 하루 앞까지 다가왔다.

개학일 전날에는 신입생 입학식이 있었기에 강당 같은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입학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이곳에서 개인의 길과 적성을 찾아 성장할 수 있도록······."

우글우글 모인 학생들 가운데 섞여 앉아, 나는 강단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바라봤다.

아카데미의 교장. 용사의 동료이자, 우리가 순조롭게 입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인물.

그는 짧은 환영사를 마치고서 금방 한쪽으로 물러섰다.

교장을 포함해 몇몇 인사들이 연설을 마친 다음으로는, 신입생 대표의 선서였다.

판타지 세계의 학교라고 해도 지구 학교의 입학식과 별다를 건 없었다.

"레아 헤리윈, 바이온 렉시오. 두 신입생 대표는 강단 위로 올라오십시오."

강단 위로 두 학생이 올라와서 나란히 섰다.

다른 학생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남학생과, 눈에 띄는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여학생.

나는 그중 한 명의 레벨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Lv. 36】

남학생도 높은 편이었지만, 여학생 쪽의 레벨은 무려 30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리곤보다도 1레벨이 높은 레벨.

이 자리에 있는 신입생들 대부분이 20레벨도 안되는 걸 생각하면 압도적이다 못해 그냥 수준이 달랐다.

'헤리윈이라면 분명······.'

두 사람은 동시에 선서문을 또박또박 읽은 다음 도로 강단에서 내려왔다.

그 다음으로는 1학년을 맡은 교수들 소개를 간략히 하고 입학식은 곧 마쳐졌다.

하루가 지나고 개학일이 되었다.

수업은 오전 8시부터 시작이었기에 나와 리곤은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기 바빴다.

"수업 잘 들어. 이따가 점심 때 보자!"

"그래."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뒤 리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리곤과 나는 학부가 달랐기에 아예 수업을 받는 건물부터가 달랐다.

'이스릴 반.'

마법학부의 1학년은 총 3개의 반이 존재했는데, 그중에 내 반은 '이스릴'이라는 이름의 반이었다.

반에 도착한 나는 활짝 열려있는 앞문으로 들어갔다.

반 내부는 지구의 대학교 강의실처럼 넓었는데, 구조도 대충 비슷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잠시 몰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적당히 빈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음.'

이제부터 정말 학생 신분으로 수업을 받아야 한다 생각하니 기분이 복잡 생소해지는 와중, 학생들은 계속해서 반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내 기억에 있는 인물도 있었다.

'쟤는······.'

어제 입학식의 신입생 대표였던 여학생.

그녀가 반에 들어서자 주위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녀는 창가 쪽에 위치한 뒷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쟤도 같은 반이 됐나.

잠시 뒤에 소곤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쟤가 걔지? 헤리윈 가의 천재."

"마탑의 정식 마법사랑도 겨뤄서 이긴 적이 있다더라."

"와, 혼자 다른 세계에 사네······."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인 모양이었다.

헤리윈 후작가는 세인테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마법 명가였다. 어제 입학식에서 이름을 들었을 때도 떠올렸었다.

'레아 헤리윈.'

게임상에서는 간접적으로도 등장한 적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기억상으로는.

물론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천재라고 한들 아직은 애송이일 뿐이고, 고작 몇 년 만에 스토리에서 빠질 수가 없을 정도로 거물로 성장했을 리도 없으니까. 아니면 뭐 참변에 죽었을 수도 있고.

"여기야? 엄청 넓네."

책상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잡념을 이어가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계승자가 떠들석하게 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옆의 여학생은······ 룸메이트군.

몰린 주위의 시선에 그녀가 눈치를 보며 계승자에게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활기차네.'

벌써 가까운 친구가 한 명 생긴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계승자가 갑자기 이쪽을 쳐다봤기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에스카, 저기 가운데 자리에 앉자."

"어? 저쪽에 빈자리 많은데······."

"나는 가운데가 좋아."

계승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내 앞자리로 다가왔다.

묘한 자리 선정이다 싶어 바라보는데, 나와 다시 눈이 마주친 그녀가 난데없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 안녕."

물론 계승자와 나는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 사이다.

두 사람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계승자의 친구가 그녀에게 소곤거리며 묻는 게 들렸다.

"아는 사이야?"

"아니? 모르는 사이인데."

하여간 붙임성 하나는 좋은 녀석이었다.

앞으로 이 녀석이 어떻게 성검의 계승 조건을 만족시키게 해야 할까······.

슬슬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고 더 이상 들어오는 학생이 없을 즈음, 교수가 들어왔다.

앞에서 아까부터 쉬지 않고 떠들고 있던 계승자도 그제야 조금 얌전해졌다.

"저 사람이 교수인가봐, 에스카."

"카앤, 이제 조금만 조용······."

교수는 어딘가 차가운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교실이 완전히 정숙해진 가운데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강단 한가운데의 교탁으로 다가가서 선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1년간 이 반의 담임을 맡을 로켈이라고 한다. 전공은 역장계 마법, 담당 과목은 마법 구성과 대인 전투다."

그 이상 짧을 수 없는 소개를 마친 로켈 교수가 학생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서 말했다.

"1교시가 내 수업이니 조례는 생략이다. 바로 수업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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