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암······."
경계를 서던 병사가 지루함에 쩍 하품을 했다.
런켈시드 기지는 지리적 특성상 몬스터들이 기지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렇기에 처음에 근무를 시작하게 됐을 때는 불안감에 덜덜 떨며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져서 마음만 먹으면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빠져있지 말고 제대로 서. 슬슬 기사님들 돌아올 때잖아."
"하품 좀 한 것 가지고 깐깐하게 굴지 마. 니가 내 마누라냐?"
동료의 말에 병사가 입맛을 쩝 다시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
저멀리 하늘 저편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작은 점에, 병사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야, 저게 뭐냐?"
"뭐가?"
"저기 하늘에 저거 안 보이······ 어, 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병사들은 모두 창백하게 질렸다.
거대한 와이번 한 마리가 기지를 향해서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비, 비상! 비상!"
병사들이 혼비백산해서 비상 신호를 울렸다.
이내 기지 안쪽에서 나온 몰려나온 기사들도 와이번을 발견하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뭐야?"
왜 와이번이 여기에 있어?
런켈시드의 총지휘관 역시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지척까지 다가온 와이번을 바라봤다.
그러다 와이번의 등 위에 누군가 타고 있는 걸 발견하고 아, 탄성을 내뱉었다.
"정지! 공격하지 마라! 모두 무기를 거둬라!"
한편에서 요격 준비까지 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취소했다.
이내 하늘에서 내려온 와이번이 기지 한편에 천천히 착지했다.
이어 와이번의 등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며 총지휘관은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
······정말로 7군주다.
소문으로만 듣던 새로운 7군주가 이곳 런켈시드 기지에 직접 걸음한 것이었다.
총지휘관은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의 곁으로 다급히 달려가서 넙죽 고개를 숙였다.
"런켈시드 기지에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7군주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기사와 병사들도 그제야 기겁해서 고개를 숙였다.
남자, 7군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런켈시드의 총지휘관인 사크란입니다!"
"지휘관이었군. 변경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네. 별 건 아니고 누굴 좀 만나러 온 것뿐이니 긴장 풀도록."
그 말에 총지휘관은 안도감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한마디 말뿐이라도 어느 누가 평생에 군주에게 노고를 직접 치하받을 기회가 있겠는가?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의문이었다.
군주께서 누굴 만나기 위해 이런 변방까지 친히 행차하셨다고? 대체 누구를······ 아.
"리프가 지금 기지에 있나?"
총지휘관의 깨달음과 동시에 7군주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기사들은 몰라도 기지의 총책임자인 그는 아주 조금은 사정을 알고 있었다.
본성 측의 인물로부터, 그것도 철혈 기사단의 단장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전언이 있었으니까.
이번에 런켈시드로 출진을 오는 신입들 중, 리프라는 기사를 특히 신경 쓰고 살피도록 하라고. 티가 나지 않도록.
그 이유에 대해서 총지휘관은 그저 그녀가 7군주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라는 말만 전달자에게 들었을 뿐이었다.
'······정말 사실이었구나.'
총지휘관은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뒤에 선 기사를 쳐다봤다.
눈짓을 받은 기사가 말했다.
"리, 리프 경은 지금 마즈락 협곡에 수색을 나간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 타이밍이 안 좋았군."
총지휘관이 다급히 말했다.
"지금 즉시 복귀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군주님."
"됐다. 그냥 내가 직접 가지. 마즈락 협곡이라는 게 저쪽인가?"
그러고 7군주는 데리고 있던 소년과 함께 와이번에 도로 올라탔다.
펄럭!
육중한 날갯짓과 함께 와이번이 협곡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총지휘관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주위에 명령했다.
당장 기지 정리를 시작해라. 지금 기지에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도 전부 나서라고 해라. 7군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최대한 눈에 거슬리는 것 없도록 깔끔하게 청소해야 할 것이다."
"예!"
"그리고 경계병들도 외벽에 더 촘촘히 배치시켜라. 죽기 싫으면 정신들 바짝 차리고 있으라고 해."
그야말로 폭풍처럼 왔다 간 7군주의 방문에 기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
"가르가리의 흔적이군."
지면에 흩뿌린 푸른 체액을 살펴보던 부단장이 중얼거렸다.
현재 기사들은 협곡의 초입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별로 굳지 않은 걸 보니 가까운 곳에 있겠군요."
"그래. 서둘러 찾아서 처리하지."
"쯥, 오늘은 좀 수색이 길어지겠습니다."
가르가리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두꺼비 형태의 몬스터였다.
놈은 서식지로 정한 곳 일대에 계속해서 독무를 퍼뜨리는 습성이 있었기에, 흔적을 발견했을 때 빨리빨리 처리해두지 않으면 모르는 새에 민가까지 내려와 끔찍한 참사를 낼 수도 있었다.
기사들은 2인 1조로 나뉘어 곧장 수색에 나섰다.
리프는 마멜라스와 같은 조가 되어 숲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후방을 잘 살펴봐라. 사소한 흔적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전부 보고해."
"예."
마멜라스는 바로 즉답하는 리프를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침묵 속에 꽤 한참을 이동했을 때였다.
"······!"
마멜라스는 수풀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두꺼비를 발견하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가르가리였다.
가르가리 또한 둘을 발견하고 눈을 뒤룩거리며 낮게 깔린 울음소리를 냈다.
'찾았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놈을 응시하다가, 뒤쪽의 리프를 힐끗 돌아보고는 말했다.
"넌 여기에 그대로 가만히 있어."
"혼자서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문제 있나?"
리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혼자서는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 위험? 네가 어설프게 껴들어봐야 방해만 된다. 주위나 엄호하고 있어."
순 억지인 말에 리프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둘씩 페어를 짜서 수색에 나선 게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멜라스는 검을 뽑아들고서 홀로 가르가리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는 리프에게는 아주 조금이라도 공을 세우거나 활약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마멜라스가 가르가리를 향해서 돌진했다.
입을 쩍 벌린 가르가리가 혓바닥을 쭉 늘려서 공격했다.
마멜라스는 몸을 틀어 피하며 측면으로 접근했다. 그녀의 검이 가르가리의 옆구리를 갈랐다.
독무를 퍼뜨리기 시작하면 성가시기에 최대한 빨리 처리하기 위해 그녀는 전력을 다했다.
몰아치는 검격에 가르가리는 사방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발악을 했다.
마멜라스가 속으로 조소를 지으며 마무리 일격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리프가 소리쳤다.
"경!"
순간 마멜라스도 아차 했다.
쏘아진 뒤 되돌아오는 가르가리의 혀가 방심한 그녀의 다리를 기습적으로 휘감았다.
"꺄악······!"
마멜라스는 꼴사납게 공중에 붕 떴다가 도로 땅에 처박혔다.
쓰러진 그녀를 향해서 혀가 다시금 아래로 내리쳐졌다.
촤아악!
순식간에 달려온 리프가 혀를 베어버린 뒤, 가르가리의 머리를 베어 숨까지 확실하게 끊어놓았다.
검에 묻은 체액을 털어낸 리프가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끙끙거리던 마멜리아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수치심과 쪽팔림이 가득한 표정으로 리프를 노려봤다.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리프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락대는 그녀를 쳐다봤다.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알아서 처리했어! 명령 불복종이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경께선 제 선배시지만 규율상 제게 정식으로 명령할 권한은 없습니다."
순간 화를 못 이긴 마멜라스는 검까지 바닥애 패대기치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짜악!
리프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난데없이 뺨을 후려맞은 리프는 아무 말도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마멜라스를 바라봤다.
그에 움찔한 마멜라스가 이를 까득 갈며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이 건방진 년이 진짜······!"
슈우우우우!
갑자기 귓가에 들려온 거대한 파공음에 그녀는 깜짝 놀라서 동작을 멈췄다.
소리의 근원지는 하늘이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본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날개를 가진 거대한 괴물이 이쪽을 향해서 쏜살같이 낙하해오고 있었다.
'······와이번?!'
나즈락 협곡에는 다양한 몬스터들이 서식하지만, 그렇다고 와이번이 살지는 않았다.
말로만 들어봤지 생전 처음 본 아룡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마멜라스는 한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
리프도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마멜라스가 다급히 수풀이 있는 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리프가 그 팔을 붙잡았다.
"뭐, 뭐야? 미쳤어?! 이거 놔!"
"7군주님이십니다."
마멜라스는 순간 그녀가 뭔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멈칫했다. 7군주?
그러는 사이 와이번은 어느새 지면까지 내려와 착지하고 있었다.
그제야 와이번의 등 위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완전히 얼이 빠진 채 등에서 내려온 남자를 바라봤다. 흑발의 인간이었다.
"군주님."
고개를 숙여 인사한 리프가 7군주의 옆에 서있는 리곤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리곤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구나, 리프."
"예. 한데 어쩌신 일로 이곳까지······."
7군주가 가르가리의 사체와, 얼어붙어있는 마멜라스를 힐끗 바라봤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마멜라스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7, 7군주님을 뵙습니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리프의 뒷배경에는 정말로 7군주가 있었던 것이다.
마멜라느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바로 방금 전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렸기에.
어쩐지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7군주가 그제야 리프의 뺨이 붉은 것을 발견하고, 리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리프가 마멜라스를 한 번 내려다봤다.
마멜라스는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벌벌 떨며 속으로 기도했다.
'사, 살려줘. 제발······.'
리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군주님."
그에 마멜라스는 온몸에 탈력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리프의 동료 기사를 내려다봤다.
정도 이상으로 격한 반응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리프가 그냥 넘기려는 것 같으니 굳이 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리프에게 말했다.
"리곤과 관련한 일로 네게 물을 것이 있어서 말이다. 바람도 쐴 겸 직접 온 것이다."
"아······."
"일단 기지로 돌아가지. 와이번에 타거라."
다시 리곤과 함께 와이번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사람을 더 태우려고 해서 그런지 띠용이가 콧김을 내뿜으며 심기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지만, 목을 쓰다듬어서 달랬다.
그런데 리프가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와이번에 처음 타는 게 낯설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군주님. 송구스럽지만 급한 용무가 아니시라면 저는 따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
"수색 임무는 이제 끝났습니다. 뒷정리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기지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함께 돌아가면 될 걸 왜 굳이?
'아.'
그러다 당연한 사실 하나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현재 그녀는 이 협곡에서 다른 기사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와중에 난데없이 나타나서 그녀를 쏙 빼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고.
물론 내가 군주인데 그러든 말든 뭐가 문제겠냐만, 이런 행동이 다른 기사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춰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리프의 마음가짐이 어떨지는 나도 안다.
내가 했던 말대로 군주성의 기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겠지.
지금의 내 행동은 그런 그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나도 조금 물들었나.'
비록 아주 사소한 일일 뿐이었지만, 나는 새삼 스스로에게 놀랐다.
너무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그런 걸까. 내가 언제부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 하나에 신경을 못 썼지?
그 사소함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폭왕이나 흑해 여제 같은 미친놈은 안 된다고 해도 말이다.
남들 모르게 세상을 구하려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해도, 이 남매의 목숨을 구한 게 나라고 해도.
그것들이 내가 주위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방패는 되지 않았다.
애당초 별 것도 아니었던 놈이 우연히 얻게 된 군주위.
이깟 건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허상일 뿐이다.
앞으로는 마음에 조금은 경계심을 가지는 편이 좋겠다.
"리프."
"······예."
내가 이름을 부르자 리프가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혹여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이 괜히 가엽게 느껴져 나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너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군주님."
"그럼 기지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네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에 리프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이런 말을 내게 들을 거라곤 예상 못한 얼굴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리곤도 가능하면 남아서 리프와 함께 돌아가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게 보여도 이런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그렇게 리프를 남겨두고서 띠용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리프까지 안 태워도 되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녀석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아셸은 나 없이도 잘 따르는 녀석이 웃기지도 않는다. 괜히 부끄러워서 싫어하는 척하는 거냐?"
캬아악!
그 말에 녀석이 드물게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성질을 부렸다.
하여튼 말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네.
"농담이다, 농담."
***
기지로 돌아간 뒤, 몇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리프과 기사들과 함께 복귀했다.
나는 환복을 하고 온 리프와 리곤을 데리고서 조용한 방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일단 오랜만에 만나는 두 남매가 회포를 풀 시간을 준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세인테아의 아카데미에 입학을 말입니까?"
이야기를 모두 들은 리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물론 예상한 반응이었다.
동생을 난데없이 먼 타지로, 그것도 칼데릭을 넘어 세인테아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묻고 있는 건데.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 군주들에게는 매년 엘폰 아카데미의 입학 추천서가 한 장씩 주어진다. 실제로 2군주 뇌후도 잘 써먹고 있는 권한이지."
리프는 더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워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리프."
"예, 군주님."
"혼란스러워 할 것 없다. 편하게 네 생각을 들려주면 된다."
나는 리곤을 힐끗 쳐다보고서 말했다.
"리곤은 네가 반대한다면 아카데미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네가 반대한다면 나 또한 이를 강요하거나 설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제야 리프는 좀 침착해진 기색으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솔직히 그녀가 반대할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들었던 이야기대로면, 그녀는 언제 또 동생의 광혈병이 재발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내 곁에서 떨어뜨려놓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고 했었으니.
지금은 그 강박이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다만, 뭐가 됐든 리프에게 있어 리곤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단순히 멀기만 한 곳도 아니고, 칼데릭과 사실상 적대 관계인 세인테아로 보내고 싶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리프가 이윽고 입을 열고 물었다. 내가 아닌 리곤에게.
"리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리곤이 말했다.
"군주님께서 말씀하셨잖아. 나는 누나가 반대하면 안 간다고."
"그게 아니라 네 마음을 묻는 거야. 나나 군주님은 상관하지 말고 온전한 네 마음을. 정말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니까 그러네."
"어째서?"
리곤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특별하거나 거창한 이유는 없어. 그냥 궁금해서. 그리고 계속 성에서만 하루하루 성에서 검만 휘두르며 지내는 지금보다는······ 뭐라도 더 많은 걸 겪어보면 내가 정말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리프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에 시간이 필요하다면 좀 더 고민해보라고 말하려는 때였다.
"저도 제 동생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의외로 시원스러운 결정에 나는 조금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로 괜찮겠나?"
"예. 물론 걱정은 되지만, 리곤이 원하는 거니까요. 반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생이 원하니까. 간단한 이유였다.
하지만 마음을 정하기까지는 짧은 순간 수많은 고뇌가 스쳤을 것이었다.
그녀가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나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리프의 대답에 리곤의 표정도 환해졌다.
사실 리곤에게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알 턱이 없지만, 리곤은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 붙어있게 될 테니까.
어쨌든 이것으로 리곤의 엘폰 아카데미 입학도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