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36화 (136/189)

준비 (1)

나는 산맥에서 곧바로 다시 떠나기로 했다.

계획이 세워진 마당에 내가 계속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군주성으로 돌아가서 아카데미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고, 이것저것 필요한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용사는 일단 계속 이곳에서 머무르다가 적당한 때에 계승자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라 했다.

그때가 되면 곧바로 소식을 전해받기로 했는데, 나는 이 부분이 난감하다 싶어 물었다.

"성검에 대한 내용을 위험하게 전서구로 주고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접선 장소를 정해두면 어떤가?"

이 판타지 세계는 쓸데없이 현실적이게도 즉발적인 장거리 통신 수단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없었다.

마법의 장거리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각각의 마전석에 같은 성질의 마력이 녹아있어야 했다. 대군주성 지하에 있는 참모장 전용 텔레포트 마법진처럼.

하지만 마전석은 더럽게 희귀했고, 얼마나 먼 거리에서든 통신이 가능하려면 터무니없는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애당초 그런 초장거리 마법은 그쪽 자질을 타고난 마법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성검의 능력에도 장거리 통신 수단은 없었다.

용사가 계승자를 데리고 있는 채로 군주성에 찾아오기도 번거로울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내 쪽에서 찾아가는 게 수월하겠지.

"아, 그건 방법이 있다."

그런데 용사는 갑자기 아공간 같은 것에서 무언가를 쑥 꺼내더니,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둘둘 말린 낡은 두루마리 종이였다. 펼쳐셔 보자 아무것도 써있지 않은 백지였다.

"이게 뭐지?"

"통신 기능이 있는 고대 마도구다."

용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똑같이 생긴 걸 하나 더 꺼내서 손에 들고 펼쳤다.

"이 종이에 마력을 조작해서 글씨를 쓰면, 보시다시피······."

용사가 손가락에 마력을 불어넣고 종이에 글씨를 쓰자, 내게 건네준 종이에도 똑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얼마나 먼 거리에 있든 다른 종이에도 문자가 새겨진다. 이걸로 연락을 주고받도록 하지."

"호오······."

나는 신기해서 종이를 살펴봤다. 진짜로 별 마도구가 다 있군.

"그럼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다."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뒤, 용사와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띠용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녀와는 머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

군주성으로 돌아와서 나는 엘폰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를 알아봤다.

일반적인 입학 방식이나, 수업 방식이나, 교칙이나, 주요 인사들의 신상 같은 것들을 이것저것.

용사가 말했던 교장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그는 그녀의 말대로 마족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마법사였는데, 또한 용사의 친우로도 유명한 자였다.

마지막 마왕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은퇴한 뒤 지금은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이 세계의 웬만한 주조연들은 다 파악하고 있다 자부하는 나였지만, 이런 걸 보면 역시 모르는 것들도 많았다.

또 알아보다 보니 의외의 사실을 하나 알았는데, 바로 칼데릭에도 입학 추천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각 군주에게 매년 추천서가 주어지는데 인재를 추천해서 엘폰 아카데미로 보내는 게 가능했다.

이런 시답잖은 권한이 왜 있는 건가 생각하니, 일단 두 국가는 표면상 동맹 관계니 그에 대한 보여주기식 제도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권한을 잘 써먹는 군주가 있다고 한다.

다른 군주들과 달리 2군주 뇌후의 가문은 일정한 주기로 아카데미에 가문원을 보내 세인테아 쪽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도 힘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문득 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리곤.'

바로 리곤에 대해서였다.

리곤은 계승자에 못지 않은 천재고, 나이도 대충 그 또래다.

그렇다면 계승자와 친해져서 동료가 된다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최대한 많은 변수였다. 나쁜 의미로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의.

계승자가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많은 경험과, 많은 교류가 필요했다.

그건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일단 계승자에게 사람을 붙여주면 좋은 것이고.

딱히 리곤이 계승에 기여가 되지 않더라도 그냥 계승자와 동료가 되는 것 자체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리곤도 아카데미에 입학을 시킬까?'

마침 나한테도 입학 권한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중요한 건 리곤의 의지였다.

나는 의견을 묻기 위해 곧바로 리곤 남매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현재 리프 경께서는 엔록 변경의 마즈락 협곡에 출진을 나가계십니다."

"······출진? 왜?"

"철혈 기사단에 갓 입단한 기사들은 훈련 과정으로 엔록의 험지들에 출진을 나가게 되서······."

그런가. 열심히 하고 있나 보네.

"명하시면 당장 군주성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전하겠습니다."

"됐다. 그럴 필요는 없다."

성에 없는 리프는 놔두고, 일단 리곤만 부르기로 했다.

【Lv. 29】

"부르셨습니까, 군주님?"

부름을 받고 온 리곤이 반가운 기색으로 내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29레벨?'

저번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1레벨인가 아니었나?

그새 또 폭풍 성장을 해서 30레벨을 코앞에 둔 리곤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

"군주님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너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간단한 근황 이야기를 듣고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리곤, 혹시 세인테아의 엘폰 아카데미를 알고 있느냐?"

리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뭔가요?"

리곤 남매는 애초에 출신이 칼데릭이니 세인테아에 대해선 잘 모를 만도 했다.

나는 아카데미란 기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리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있군요.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장소라. 신기하네요."

"혹시 관심이 가느냐?"

"네? 네. 조금은요."

"그래. 그럼 혹시 아카데미에 입학해볼 생각은 없느냐?"

"······네?"

리곤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말했다시피 엘폰 아카데미는 대륙 최고의 교육 기관이다. 아셸에게 계속 검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거기서 네가 더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구나."

"하지만 저는 누나, 아니, 누님처럼 성의 기사가······."

"나는 네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다. 너와 네 누이에게 기사가 돼라고 했던 건 그저 길을 하나 제시해준 것일 뿐이지."

나는 팔짱을 끼고서 말을 이었다.

"네게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 그중에 얼마든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누이를 따라서 기사가 되어도 좋고, 방금 말한대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도 좋고, 아니면 다른 길을 생각해봐도 좋다."

"······."

"누이와 상관없이, 기사가 되려 하는 건 온전히 네 의지가 맞느냐? 아니라면 내가 방금 한 말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리곤도 기사가 되는 것에 진심이지는 않았던 듯했다.

내가 먼저 꺼냈던 말이고, 리프도 기사가 됐으니 별 생각 없이 자신도 당연히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겠지.

며칠이 흐른 뒤, 리곤은 다시 나를 찾아와서 대답을 들려주었다.

"잘 생각해봤는데, 말씀하신 대로 그 아카데미라는 곳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냐?"

"네. 군주님께서 절 생각해주셔서 좋은 기회를 주시는 거니까요. 제 또래 애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다함께 배우는 장소라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요."

잘됐다 생각하는데, 리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만약 누님이 반대하면 그냥 성에 남고 싶습니다. 누님 마음을 언짢게 하면서까지 먼 곳으로 떠나는 건 제게도 너무 불편할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에게 있어선 무엇보다도 중요한 동생 일이니 당연히 그녀에게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근데 멀리 나가있다고 하니······.'

언제 용사에게 연락이 올지 모르니 빨리 결정하고 준비를 마쳐둬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성으로 복귀할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부르자니 그것도 괜히 번거롭고 오래 걸리고.

'내가 가면 그만이지.'

변경이라고 해봐야 엔록 안이면 띠용이를 타고 하루도 안 걸릴 것이다.

그냥 내가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곧장 떠날 채비를 했다.

"리곤, 네 누이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함께 가겠느냐?"

그에 리곤이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호, 혹시 와이번을 타고 가나요?"

"그래."

"가겠습니다! 무조건 데려가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이전부터 와이번을 타고 싶어했었나.

띠용이는 익숙한 아셸 외에 다른 사람을 태우는 게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크게 투정을 부리진 않았다.

그렇게 들뜬 리곤을 태우고서 곧장 리프가 있다는 마즈락 협곡으로 떠났다.

***

마즈락 협곡의 런켈시드 기지.

이곳에 주둔 중인 기사들은 매일같이 협곡을 수색하고 조사하는 것이 일이었다.

마즈락 협곡에는 많은 종의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고, 그중에는 웨이브를 일으키는 종도 있었다. 그것들에 대한 동향 조사를 꼬박꼬박 해두지 않으면 어느 사이에 협곡 아래로 재앙이 몰아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 오늘도 힘내보실까."

한 사내가 흥얼거리며 몸에 걸친 장비들을 점검했다.

"넌 항상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알 수가 없네."

그의 옆에 서있던 여인이 벌써부터 피곤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사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요즘은 좀 편하지 않냐? 신입들 들어와서 우리도 할 일 줄고. 이것저것 가르치는 맛도 있고."

"가르치는 맛은 무슨. 어리버리한 놈들 때문에 언제 한 번 사고나 안 터지면 다행이지."

"걔들이 경험이 좀 부족할 뿐이지 우리보다 실력이 없진 않아, 마멜라스. 본성에서 온 인재들이신데. 저번 조사에서도 큰일날 뻔한 거 리프 덕분에 사고 막았던 거 못 들었어? 케드 그 녀석도 목숨 건지고."

리프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여인, 마멜라스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사내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7군주님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말이야. 진짜일까."

런켈시드의 기사들 사이에는 근래 하나의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바로 본성에서 온 기사인 리프가 뒷배경에 7군주를 두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헛소문으로 여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군주가 일개 기사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그녀가 7군주의 정말 총애를 받는 인물이라면 이런 변경으로 출진을 왔을 리가 없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딴 헛소문을 믿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마멜라스를 보며 사내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녀가 리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누가 봐도 그저 열등감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은 몇 달 뒤면 훈련을 끝내고 다시 본성으로 귀환해 탄탄한 엘리트 코스를 걷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철혈 기사단의 단원과 친분이라도 쌓아두면 나쁠 게 전혀 없는데, 쓸데없이 저런 감정 소모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 리프 경."

와이번도 제 말하면 튀어나온다고, 저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에게 사내가 손을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리프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준비는 다 마쳤나?"

"예."

"그래. 그럼 슬슬 나가지. 오늘도 열심히 일해보자고."

사내가 리프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서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마멜라스도 그녀를 흘겨보고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퍽.

어깨를 부딪힌 리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멀어져가는 마멜라스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실 리프에 대한 건 군주성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이곳에서는 출처도 불분명한 헛소문 정도로 그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리프가 이곳으로 오기 전 직접 인사 책임자에게 자신에 대해 함구를 부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7군주의 이름에 비호를 받으며 훈련을 편하게 하기라도 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자신과 동생에게 새 삶을 준 그분을 조금이라도 실망시키는 일은 싫다고 그녀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 정도 시비야 악티폴의 노예 검투사 시절에 비하면 시비라고도 할 수 없었다.

리프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