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35화 (135/189)

요즘 카앤은 하루하루가 꽤나 즐거웠다.

반복되기만 하던 일상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산맥 바깥에서 온 사람들은 그녀에게 활기를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떠났고 지금은 한 사람만 남았지만, 카앤은 그녀와 어울리는 게 제법 즐거웠다. 바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검술을 배우거나, 아니면 같이 사냥을 나가거나 하며.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던 벤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코를 킁킁대더니 물었다.

"바깥에서 고기를 구웠냐?"

"어. 델하고 같이 먹었어."

"그런데 아비한테는 한 점 가져오지도 않고, 쯧쯔."

"먹고 싶으면 아버지가 나왔으면 되잖아? 셋이 먹기에는 좀 부족하긴 했지만."

벤의 반대편에 털썩 앉은 카앤이 컵에 차를 따라서 마셨다.

잠시 말없이 차만 마시는데, 벤이 그런 그녀에게 일상적인 투로 물었다.

"딸아, 산맥 밖으로 나가고 싶냐?"

"······?"

뜬금없는 물음에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까지 또 뭔 소리야?"

"그 델이라는 여인이 내게 묻더구나. 네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음······ 그래서 뭐라 했는데?"

"나야 아무렴 상관없지. 중요한 건 네 의지 아니겠느냐."

카앤이 그를 게슴츠레 보다가 물었다.

"진짜 상관없는 거 맞아?"

"그래. 그럼 넌 언제까지고 산맥에서만 박혀 살 생각이었느냐? 나갈 때가 되면 나가야지."

카앤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바깥세상에 대한 걸 물을 때마다 이야기를 은근히 피했던 게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언제까지 산맥에서 살 생각이었냐 말하고 있으니.

"뭐, 어쨌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아카데미에 가서 또래 친구들을 사귀어도 좋고, 아니면 세상을 떠돌며 모험을 해도 좋고. 너한테 가르친 것들이 있으니 어디든 가서 재주가 부족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무모하게 행동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

카앤은 컵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물었다.

"있잖아, 아버지."

"왜."

"평소에는 깊게 생각 안 했는데, 바깥에 대해 말하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어."

"뭐냐?"

"난 왜 어릴 적의 기억이 없지? 나랑 아버지는 어쩌다 여기서 살게 된 거야?"

그에 벤은 잠시 침묵하다가, 먼산을 바라보며 짧게 대꾸했다.

"원래 사람은 다 어릴 때 기억이 없다."

"뭔 아기 때를 묻는 게 아니잖아. 한 대여섯 살쯤 기억도 완전히 없다고."

"글쎄다. 그럼 언제 한 번 머리를 크게 다쳤나."

"말이 돼? 그런 식으로 말 돌리지 말고."

"딸아, 쓸데없는 걸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거라. 네 어릴 때야 별 거 없었다고 말했었잖냐? 네 어미가 살아있을 때는 평범하게 도시에서 지냈었고, 그러다 이 산맥으로 이사를 온 거라고."

"사람 하나 없고 몬스터들만 득실거리는 이 산에?"

"······공기는 맑고 좋지 않냐? 내 개인적인 취향도 조금은 있었다."

카앤은 황당해져서 더 묻기를 그만두었다.

벤이 능청스럽게 화제를 되돌렸다.

"아무튼,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면 된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거라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다."

"딱히 아버지가 신경 쓰여서 그런 건 아닌데."

"쯧, 고얀 녀석이. 빨리 다 마시고 일어나기나 해라. 혼자 마저 사색이나 떨게."

카앤은 콧방귀를 뀌고서 남은 차를 쭉 마셔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침대에 누운 카앤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깥세상······.'

산맥 바깥으로 나간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난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한다.

분명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평생을 살아온 장소를 떠난다는 것에 대한 불안, 두려움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그 이상으로 델이 해준 이야기들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만나본 바깥세상의 사람이었다. 또한 델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 수 있었다.

이 거슬림 때문에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잠에 들지 않고 한참 뜬눈만 깜박이던 카앤은, 침대에서 일어나 오두막 바깥으로 나섰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그녀는 하늘에 떠오른 만월을 바라보고서 마당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다.

저멀리 불이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에인델의 모습이 보였다.

에인델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니?"

"좀 앉아도 될까요?"

"얼마든지. 차라도 타줄까?"

"네."

카앤이 맞은편에 앉자 에인델은 컵을 꺼내서 찻잎과 물을 넣었다.

불에 올려서 데울 필요도 없었다. 컵 안의 찻물은 그녀의 손에서 그대로 부글부글 끓더니 김을 풍겼다.

카앤은 받아든 차를 홀짝이다가 입을 열었다.

"델은 내가 산맥 바깥으로 나가서, 그 아카데미란 곳에 입학하기를 바라는 거죠?"

에인델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안 물어봤는데, 왜요?"

"그건······ 네 재능이 아깝기 때문이야."

에인델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자질은 세간에서는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단다. 그걸 산속에서만 썩히는 걸 보고 있다면 누구든 아까워하겠지."

"흐응······ 정말로 그것뿐이에요?"

"그래."

"델한테는 왠지 그 이상으로 심각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내가 더 강해지면 델의 검을 나한테 물려주려는 건 아니에요?"

"응?"

그녀는 순간 흠칫 놀랐다가, 이내 카앤의 말을 이해하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성검을 쥐어보게 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그런 핑계를 댔었지. 이 검은 주인을 가리는 명검이니 뭐니.

의도치 않게 핵심을 정확히 꿰뚫는 말을 한 카앤이었다.

"뭐, 근데 뭐든 좋아요. 내 재능이 어떻고 그것도 별로 관심 없고요. 그냥······."

카앤이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게 맞는 것 같아요, 델."

***

며칠에 걸쳐 산맥으로 돌아오자, 저멀리 계승자와 용사의 모습이 보였다.

"내려가자, 띠용아."

나는 두 사람의 앞에 내려서서 띠용이의 등 위에서 내려왔다.

계승자는 검을 휘두르고 용사는 그 옆에 서있었는데, 아무래도 검술을 지도하고 있던 듯했다.

검을 내린 계승자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다시 돌아오셨네요? 떠난 줄 알았는데."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궁색해서 손을 한 번 들어 인사했다.

용사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은 잘 해결하고 돌아왔나."

"그래."

"무슨 일이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계승자가 보는 앞에서 설명하기는 뭔가 그래서 힐끗 쳐다봤는데,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아버지가 식사 준비하고 계실 텐데 제가 가서 4인분으로 차리라고 할게요. 저 먼저 오두막으로 돌아갈 테니까 두 사람은 천천히 와요. 밥부터 먹고 마저 가르쳐주세요, 델."

그렇게 말하고는 오두막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용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델?"

"아, 그녀에게 내 이름을 그렇게 밝혔다."

본명 대신 가명을 알려줬다는 말이었다. 원래 이름이 에인델이니 델인가.

계승자와 꽤 친해진 건가 싶어 진전이 있었나 물어보려다가, 일단 그녀의 질문에 먼저 답해주었다.

"카숄이 어스힐의 영토를 침공해서 그것을 막고 왔다."

"······뭐라고?"

깜짝 놀란 용사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중립국 회담에서의 일부터, 흑해 여제의 개입까지.

설명을 모두 들은 그녀는 침음만을 흘렸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에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전쟁을 막아줘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7군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용사가 조금 새삼스런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같은 군주와 부딪힌 건 그대도 큰 부담을 감수한 것이 아닌가."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계승자에 대해서 말인데, 뭐라도 진전은 있었나?"

나는 계승자에 대한 걸로 화제를 돌렸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물은 건데, 용사는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의외의 답을 했다.

"카앤이 마음을 정했다. 산맥 바깥으로 나가기로."

"······뭐? 설득에 성공했다고?"

"설득에 성공했다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군.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뿐이니까."

나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계승자의 설득에 성공했다면 일단 첫 번째 큰 난관은 넘은 셈이었다.

"그녀의 부친 쪽은 어떻지?"

"부정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의 뜻대로 하게 두겠다고 하더군."

"음······."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래서, 그럼 정말로 저번에 꺼냈던 이야기대로 할 생각인가?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겠다는."

"이미 그녀에게는 말을 그렇게 해두기는 했다만······."

용사가 말끝을 흐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겠지. 그대가 떠나있을 동안 생각을 계속 해봤지만, 달리 떠오르는 건 없더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맞나 싶어서였다.

"다만, 만약 아카데미에 입학시킨다면 근처에서 그녀를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

"그렇겠지. 입학만 시킨 다음에 손을 놓고 방치할 수는 없으니."

"그에 대해서도 생각한 게 있다."

"뭐지?"

"나도 그녀와 함께 학생으로 입학하거나, 아니면 가르치는 교직원 측으로 아카데미의 관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별 문제 없이 바로 근처에서 지켜볼 수 있겠지."

"뭐? 그게 가능한······ 아."

나는 말을 하다가 깨달았다.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이라면 방금 말대로 하는 것에 별 어려움은 없을 테니까.

'······어? 잠깐만.'

갑자기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용사에게 물었다.

"혹시 그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 타인에게도 가능한가?"

"가능하다. 왜 그러지?"

용사가 의아한 기색으로 날 바라봤다.

······잘 생각해보니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서 용사에게 말했다.

"계승자를 아카데미에 입학시킬 거라면, 당신이 아닌 내가 보호자 역으로 함께 입학하는 건 어떻겠나?"

성검의 계승. 그를 위한 네 가지 조건.

소중한 이의 죽음. 배신. 인간의 추악함. 정의에 대한 회의감.

용사는 그 조건의 충족을 위해 계승자를 모질게 몰아붙일 수 없는 인간이며, 또한 그것을 결코 허용치도 않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고.

한마디로 용사에게 계승 문제를 맡긴다면······ 솔직히 진전이 있을 거라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어떻게든 성검의 계승을 성공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오로지 목적의 달성만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짓은 나도 못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인위적인 상황을 구성할 마음은 있었다.

'가령, 계승자와 최대한 친해진 다음에 일부러 내 죽음을 가장하거나.'

그 정도는 성검의 계승을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니, 그 정도도 하지 못할 거라면 계승은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게 맞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아카데미도 여러모로 적합한 무대라는 판단이 들었다.

만약 내가 계승자와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

용사의 시야와 간섭을 차단하면서 상황의 주도권을 내가 가질 수 있다.

계승자에게 친구로서 접근하기도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나 대신 그대가? 어째서······."

의문을 비치는 용사에게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으니까. 마의 씨앗들도 찾아야 하고, 원마들도 견제해야 하고, 그리고 잠적하고 있던 동안 발생한 문제들도 해결해야 하고, 많은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안 그런가?"

"······."

"아무리 계승 문제가 중요하다고 한들 그것들 전부를 손을 놔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희미한 침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무책임하게 그대에게 모든 일을 떠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주인 그대 또한 할 일이 많은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나는 남는 게 시간이다. 내가 자리를 비우고 있어도 군주령은 알아서 돌아가고, 대군주의 명령이 아닌 이상에야 딱히 맡고 처리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하고 보니 뭔가 굉장히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일단 전부 사실이었다.

용사는 뭔가 애매모호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 계승자에 대한 건 내게 맡기는 게 어떤가. 어차피 당신과 나 둘 중 하나가 맡아야만 할 일이다. 성검의 계승에 대한 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으니."

그에 용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심중을 짐작하고 말을 이었다.

"비록 협력 관계이긴 해도 우리 사이에는 아직 충분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지."

"그런 것이 아니다. 7군주 그대를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아니, 당신의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맹세하겠다."

나는 용사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서 말했다.

"나는 언제나 계승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행동할 것이다. 또한 성검의 계승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그를 위해 계승자의 의지와 인격을 내 마음대로 주무르고 짓밟는 짓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용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대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 그러니 일단은······ 알겠다."

"내 제안에 따르겠나?"

"그래. 입학이 확실히 정해지면 그대의 뜻에 따르기로 하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도록 하지."

좋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었다.

"그런데 입학을 시킨다면 어떤 식으로 시킬 생각이지? 방법이 있나?"

나는 그쪽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게임에서도 엘폰 아카데미에 대한 건 거의 비중이 없었기에 설정을 자세히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입학 시험 같은 걸 치뤄야 되나?

용사가 대답했다.

"아카데미 측에 지인이 있다. 그쪽에 부탁하면 아마 입학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군. 고위 인사인가?"

"아카데미의 교장이다."

교장?

그건 또 의외였기에 무슨 연줄인가 싶었다.

용사가 내 의아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조금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족과의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였다. 지금은 은퇴하고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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