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감히 나와 맞서려고 하지 마."
"······."
"다시 한 번 이딴 짓을 벌이면 그때는 대군주고 뭐고 상관없다. 바로 폭왕의 곁으로 보내주마."
흑해 여제는 그저 몸을 한 번 움찔 떨고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 그녀도 힘의 차이는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내버려두고서 요새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론 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수고했다."
요새로 걸어가는 길에 한쪽에 몰려있는 패잔병들이 보였다. 카숄 군이었다.
일부러 그들 쪽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길을 열었다.
그 한가운데에 카숄의 국왕이 보였다.
그의 앞에서 멈춰서자 그는 허망함과 절망이 섞인 표정으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7군주."
나는 그를 무시하고서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카숄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어스힐에 결정을 맡길 생각이었다.
이윽고 요새 앞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부서진 성문 앞에 나와서 몰려있었다.
다 죽어가는 처참한 꼴의 어스힐의 군사들. 그중에 피를 뒤집어쓰지 않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어스힐의 국왕, 그리고 테이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고 선언했다.
"전쟁은 끝이다."
······와아아아아!
정적이 흐른 뒤, 그들에게서 찢어지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결단
나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요새 안쪽에서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부상자들을 옮기는 한편, 바깥에서는 어스힐 국왕이 군사들을 데리고 투항한 카숄 군을 제압하고 있었다.
흑해 여제는 어느새인가 돌아간 듯 보였고, 대지에는 무수한 벌레 사체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띠용이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벌레 사체들을 뒤적거렸는데, 먹을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러다가 말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상황이 얼추 정리된 뒤, 나는 어스힐 국왕과 성벽 위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카숄의 왕은 어떻게 처리할 건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카숄이 먼저 일으킨 전쟁이라고 한들 일국의 군주니, 신중할 만도 했다.
처형을 결정하든 포로로 잡아 카숄에게 배상을 받아내든 그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8군주는 두 국가의 일에 더 간섭하지 못할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 뜻대로 하도록."
"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군주님."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셸에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 뒷정리가 끝날 때까지 너는 이곳에 남아있어라, 아셸."
"알겠습니다."
그에 어스힐 국왕은 놀란 기색이었다.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는 건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왕성으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내 전사를 요새에 남겨두겠다."
요새의 전력이 처참히 깎인 마당에 상황을 파악 못 한 카숄 군이 뒤늦게 더 몰려오기라도 하면 괜한 트러블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런 경우를 염려하고는 있었는지 롱포드의 옆에 서있던 1왕자의 표정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나는 테이르와도 한 번 눈을 마주치고서, 몸을 돌렸다.
아셸이 물었다.
"지금 바로 떠나십니까?"
"그래. 산맥으로 돌아가야겠다."
나까지 정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계승자를 놔두고 급하게 온 마당이었으니까. 용사가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띠용이에 등 위에 올라타자 어스힐 국왕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7군주님께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군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선의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훗날 기회가 닿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테이르와 1왕자도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테이르를 불렀다.
"테이르."
"예? 예."
"그보다 내 말을 무시했구나. 분명 어려움이 닥치면 내게 도움을 구하라고 했을 텐데."
"예에? 아, 아닙니다! 그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는데,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
농담으로 건넨 말에 테이르는 몹시 당황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제 계속 왕성에서 지내는 것이냐?"
"······예, 앞으로는 그럴 생각입니다."
"잘됐구나."
나는 어스힐 국왕과 1왕자를 차례로 바라보고서, 띠용이의 목을 툭 두드렸다.
"기회가 되면 또 만나지.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해줄 테니 군주성으로 찾아와도 좋고."
녀석이 힘찬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셸과 세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다.
나는 용사와 계승자가 있는 산맥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가며 생각했다.
'대군주가 어떻게 나오려나.'
하지만 그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번 건 명백히 흑해 여제가 먼저 내게 걸어온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저번 회담에서 분명 내 뜻이 어떤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개무시하고 어스힐을 친 거니까.
애당초 대군주도 두 국가의 전쟁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흑해 여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카숄을 지원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흑해 여제를 저지한 것도 내 자유다.
그것에 대해 대군주가 책임을 묻는다면 애초에 흑해 여제가 이번 전쟁에 개입한 것부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느 쪽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인 군단인 흑해 여제가 거의 모든 여왕체를 잃은 건, 칼데릭에 있어 꽤 큰 전력 손실이기도 했으니.
대군주가 과한 대응이었다고 질책하려 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에 하나의 경우에도 비장의 카드는 있었다. 바로 용사.
이번에 카숄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용사의 부재가 컸다.
어차피 용사도 곧 공식으로 다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라고 했다.
그녀가 성동에 있는 동안 황실에서 벌인 짓들도 있을 테고, 이것저것 정리할 일들이 많을 테니.
만약 대군주가 내게 책임을 물으면 그녀를 조금 팔아먹으면 됐다.
먼저 용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흑해 여제의 미친 짓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된다.
용사가 멀쩡히 있는데 한 국가를 쓸어버렸다면 그건 칼데릭에 큰 독이 되는 행동이었으니까.
내가 숨겨야 할 건 용사와 나의 관계지, 그녀에 대해서 말도 못 꺼낼 이유는 없었다.
생각 정리를 마친 나는 다른 고민으로 넘어갔다.
지금은 대군주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래서 계승자는 대체 어떻게 해야 될까?
'지금쯤 용사가 설득······ 하지는 못했겠지.'
나는 가능성 적은 기대는 접었다.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진전되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
카앤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였음에도 검날에 부딪힌 바위가 굉음과 함께 반쯤 쪼개졌다.
"이렇게요?"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옆쪽에 서있는 여인에게 묻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금방 감각을 익히는구나."
용사, 에인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앤을 바라봤다.
현재 에인델은 카앤에게 자신의 마력 운용법의 근간을 조금이나마 가르치고 있었다.
방금 것은 단순한 동작일 뿐이지만 체내에서는 난해한 기운의 흐름을 동반한 일검이었다.
이미 기초가 튼튼히 잡혀있는 데다가 재능까지 뛰어난 그녀는 뭘 가르치든 금방금방 성장할 것 같았다.
성검의 계승자기에 이만큼 자질이 뛰어난 것인가, 아니면 자질이 뛰어나기에 계승자로 선택받은 것인가.
에인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디븐은 진작 떠났고, 7군주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엔록으로 돌아갔다.
현재 이곳에 있는 건 그녀와 카앤 부녀뿐이었다.
에인델은 그동안 설득을 위해서 벤과도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딸아이가 정말 밖으로 나가길 원한다면 나는 간섭할 생각이 없소. 녀석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시오.'
분명히 갈등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친 쪽의 문제가 해결됐어도 여전히 카앤 본인을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해서 은근히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카앤은 애매모호한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애당초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닌 에인델이었기에 이런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원마들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후우."
한창 검을 반복해서 휘두르던 카앤이 지쳤는지 털썩 바닥에 드러누웠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재밌는 건가 싶어 에인델이 물었다.
"왜 그러니?"
"아뇨, 그냥. 바깥에서 사람들이 찾아온 적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냥 이러는 게 즐거워서요."
"······."
"슬슬 점심 때인데 또 같이 사냥하러 가요, 델. 숲 깊은 곳에 들어가면 분홍색 토끼가 나오거든요? 찾기 좀 힘들긴 한데 그 녀석이 맛 하나는 기가 막혀서······."
에인델은 말이 나온 김에 다시 산맥 바깥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다가, 관두었다.
카앤은 순수한 소녀였다.
처음 만난 낯선 이들에게 경계 대신 호의와 호기심을 품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에인델이 카앤을 산맥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려는 이유는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이 거짓은 아니더라도 결국 핑계에 불과한 이유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대신해 마족을 막아낼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평생을 산속에서 산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기 위해서다.
문득 에인델은 회의감을 느꼈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성검의 계승,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뜻은 아니었다.
성검에게 초월적인 힘을 받았지만 그녀는 항상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했다.
애초에 성검은 힘만 주었을 뿐, 방향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마족들과 싸운 것도, 마왕을 봉인시킨 것도 전부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확실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시킨 적이 없던 성검이 처음으로 내비춘 뜻이었으니까. 계승자를 찾아라.
물론 에인델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대로 자신이 죽고, 성검의 힘이 세상에서 사라진 채 마왕이 부활하면 미래는 암담했다.
그녀는 마왕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성검의 신력이 아니라면 무엇으로도 그 악의 화신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래요?"
우두커니 서있는 에인델을 카앤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에인델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7군주가 돌아오기 전까지 카앤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