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자 (11)
어느새 해가 저물고 산맥에 밤이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데, 한동안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머물러도 되겠나?"
계승자 문제를 일단락 짓기 전까진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벤에게 양해를 구했다.
명분은 딱히 없었지만 만들면 그만이었다. 놈에게 힘을 준 마족의 흔적을 더 찾아보기 위해서라는 걸로.
벤은 딱히 따지고 들 생각은 없는지 흔쾌히 허락했다.
"좋을대로 하시오. 한데 오두막에 세 분이 전부 머물 방은 없소만······."
"오두막 바깥에서 머무를 것이니 상관없다."
노숙이야 여기까지 오면서 질리도록 했으니 별 문제도 없었다.
우리는 오두막의 마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용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계승자를 어떻게 데리고 갈지는 생각했나?"
타오르는 모닥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알고 있다."
"일단 전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나? 달리 방법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어차피 언젠간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계승자가 아무런 사실도 모른 채 성검을 계승할 수는 없었으니.
"정말 방법이 없다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건 한 번 말하면 되돌릴 수 없다. 일단 다른 방법을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군."
용사의 말도 맞았다. 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거의 없다시피 한 그녀에게, 다짜고짜 성검이니 계승자니 이야기를 꺼내봐야 뭔 반응이 돌아올지 감도 안 잡혔고.
"그럼 그건 미뤄두고, 계승의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지는 계획이 있나?"
"아니······ 없다. 그건 설득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지."
나는 슬쩍 용사의 눈치를 보고 물었다.
"인위적으로 상황을 구성하여 계승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어떻게 생각하지?"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런 짓을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용사가 단호하게 잘라 대답했다.
곧바로 답이 돌아온 걸 보니 역시 그녀도 그에 대해서 생각은 해본 모양이었다.
인위적으로 상황을 구성하여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
그건 즉 그런 것이다.
계승자에게 억지로 동료를 만들어주고, 그들과 유대를 쌓게 하고, 희생시키고, 균열을 일으키고, 마음과 감정을 짓밟고, 절망을 안겨주고······.
그야말로 계승자의 삶을 멋대로 주무르고 망가뜨리는 거나 다름없다.
계승자에게는 많은 경험과 모험이 필요했지만, 우리가 그것을 억지로 채워줄 수는 없었다.
"마족의 침공이, 마왕의 부활이 코앞까지 다가오더라도 말이냐?"
"그래."
최악의 미래를 입에 담아 내뱉어도, 용사의 올곧은 눈빛에는 흔들림 한 점 없었다.
"그때가 온다면 계승 따윈 아무래도 좋다. 내가 직접 모든 걸 끝내러 올테로어로 향할 테니."
"······."
올테로어, 마족들의 땅.
봉인된 마왕과 그를 지키는 원마들, 그 밖의 수많은 고위 마족과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복마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현재의 용사를 붙잡고 있는 건 '계승'이라는 희망이다.
그 희망마저 사그라든다면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는 분명 방금의 말대로, 마족들의 영역으로 넘어가 끝장을 보려 하겠지.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결국 그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으니.
잠시 침묵이 내려앉고, 용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화를 나눠 보니 계승자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그런가?"
아까 용사가 계승자와 대화를 나누던 건 나도 멀리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별 내용은 없었던 것 같다. 산맥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 계승자가 신나게 떠들지 않았었나.
"그 아이는 바깥세상에 대해서 흥미가 있는 모양이더군. 특히 친구를 원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겠지. 어렸을 적부터 이 산속에서만 지낸 모양이니."
용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이 있기는 한데······."
"뭐지?"
"······그 아이가 계승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많은 감정과 깨달음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산맥에서 나가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유대를 구축해야겠지."
"그렇지."
"그에 그나마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아카데미가 어떨지 생각해봤다."
······아카데미?
다소 뜬금없는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승자와 대화를 나눠보니 아카데미에 유달리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그 로디븐이라는 자에게 들은 이야기겠지."
"그래. 어쨌든 계승자도 스스로 원하는 것이라면 그녀를 설득하기도 더 쉬울 테니까."
"아니, 잠깐······."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계승자를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그곳에서 성검의 조건을 충족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해봤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계승자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있다. 친구들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확실히 아카데미야 학교나 다름없는 장소니 용사의 말이 틀리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승 조건을 충족하길 기대하기엔 좀 많이 무리이지 않나?
"그러면 그대가 생각한 다른 방안이 있나? 7군주."
"······."
물론 없지.
나는 짧은 고민에 잠겼다.
생각해보니 용사의 의견도 나름의 일리가 있기는 했다.
계승으로 향하는 길을 단계적으로 생각해보면, 최우선 과제는 계승자가 동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동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집단에 들어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도 맞고.
그럼 그 집단이 어디냐가 문제인데······ 확실히 달리 떠오르는 선택지는 없었다.
'진짜 아카데미가 그나마 최선인가?'
정말 계승자가 원한다면, 그녀를 산맥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에도 좋은 구실이기도 하고.
나는 왠지 어이가 없어져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곳에서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거라고는 기대하기 힘들겠지. 그래도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 생각해보니 일리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있었다.
고작 아카데미 같은 장소에서 성검의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큰 이벤트가 발생하기는 할까?
그리고 그 이전에 계승자가 그곳에서 그만큼 깊은 유대를 쌓은 친구를 만들 수는 있을까.
근데 그 불확실성은 아카데미가 아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이긴 했다.
용사도 그걸 알기에 저렇게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말대로 아카데미를 구실로 계승자를 설득해보는 건 어떤가?"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일단 계승자를 산맥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뒷일은 시간을 두고 좀 더 고민해보도록 하고······."
용사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승자뿐 아니라 그녀의 부친 역시 설득해야지. 그와도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그래, 그쪽도 문제지.
그는 지금까지 바깥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한 이 산속에서 홀로 계승자를 키워왔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아마 그 이유부터 알아야 하리라. 그런 자가 딸을 순순히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
날이 밝고, 나는 용사와 함께 곧장 계승자를 찾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요?"
마당을 쓸고 있던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입학이 뭔데요?"
"네가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는 거다. 그곳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여러가지 것들을 배워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거란다."
용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갑자기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건데요?"
"계속 이런 산속에서만 지내기엔 네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네 재능은 몹시 뛰어나.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것들을 배우면 네가 품은 능력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 용사는 계승자를 설득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밋밋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글쎄요, 관심은 있는데······ 그래도 집을 떠나기는 좀."
기대 이하의 반응에 나는 왠지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너는 계속 이 산맥에서만 지내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닌데, 잘 모르겠네요."
계승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바깥으로 나간다는 건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
"그래도 지금 당장 마음이 크게 내키진 않는 것 같아요. 아버지도 있고. 그러니까 거절할게요."
그렇게 설득에 실패한 뒤 도로 돌아왔다.
나와 용사는 말없이 나란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쪽부터 설득해야 하나?'
한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산맥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데에는 아버지의 존재도 비중이 있는 듯했다.
원래라면 계승자를 먼저 설득한 뒤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순서를 바꾸는 편이 좋을까?
"일단 그녀의 부친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보는 게 어떤가."
용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럼······."
그때였다.
손목에 차둔 팔찌에서 반짝이는 빛에 나는 고개를 내렸다.
"······?"
이 팔찌는 이번에 산맥으로 떠나기 전에 집사에게 명령해서 챙겨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자리를 비우게 될지 모르니 그동안 군주성에 시급한 일이 생긴다면 신호를 받기 위해서.
'뭐지?'
이렇게 신호가 온 건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딱히 짐작이 가는 건 없었다. 대군주와 관련된 일인가? 아니면 마족들과 관련된 일?
'하필 이런 때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시점에 계승자를 두고 군주성으로 돌아가기는 내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설마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신호를 보냈을 리는 없으니,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왜 그러지?"
나는 용사를 바라봤다.
계승자의 신변에 대해선 그녀가 있으니 걱정할 건 없긴 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믿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뒤통수를 치려고 하진 않겠지. 그러려면 진작에 그럴 수 있었으니까.
"잠시 군주성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엔록으로? 급한 일이 생겼나?"
"그래."
내 말에 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계승자는 염려할 것 없으니 다녀와라. 내가 그대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뢰라.
용사가 직접 저렇게 말하니 확실히 그녀도 나를 어느 정도 동료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와 아셸은 군주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띠용이 위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자."
***
최대한 빠르게 군주성으로 돌아왔다.
군주성의 분위기는 평소와 별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습격을 당했다거나,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이 찾아왔다거나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성에 내려서자 집사장이 곧바로 나와서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군주님."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인지 용건부터 묻자 집사장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대군주도, 마족과도 관련된 게 아닌 의외의 말이었다.
"어스힐 왕국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
"보름 전에 카숄이 어스힐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8군주께서 카숄에 전력을 지원하셨습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