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자 (10)
계승자가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어렵기 그지없는 과제였지만, 그보다도 가장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계승자를 데려가야 할까.'
일단 계승자를 산맥 바깥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가야 뭐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계승자만 설득해서 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매한 건 계승자의 아버지인 벤의 존재였다.
'게임에서도 계승자는 분명히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는 걸 굉장히 꺼려했지.'
그건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현재에서 몇 년 뒤 시점까지, 그 사이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뭐라도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아닌 이상에야 그녀가 산맥 바깥으로 나갈 이유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려할 이유도, 미래에는 성격이 지금보다 더 어두워 보였던 이유도 딱히 없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정말로 맞다면 그 변고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나와 용사의 개입으로 막은 마족 계약자의 습격.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근거들로 생각해보면 현재로서는 가장 합당한 추측이었다.
그 부분은 미뤄두고, 어쨌든 계승자에게 있어 아버지는 하나뿐인 가족이다.
계승자가 그런 아버지를 두고 홀로 산맥 바깥으로 쉽사리 나가려 할 것 같지도 않았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계승자를 강제로 납치라도 할 게 아닌 이상에야 단지 그녀뿐 아니라, 그 역시도 설득이 필요한 대상이었다.
'용사도 지금쯤 골머리를 싸매고 있겠지.'
나는 뒤쪽에 서있는 아셸에게 물었다.
"아셸."
"예."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성검의 계승에 대해서."
성검과 계승자에 대한 정보는 아셸과도 진작 모두 공유한 상태였기에, 그녀 역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셸이 조금 머쓱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한번 물어본 거다."
나도 떠오르는 게 없는데 아셸이라고 뭔가 아이디어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풀밭에 털썩 드러누웠다.
팔로 머리를 베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시야 한편에 아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묘하게 그늘이 진 것처럼 느껴지는 표정.
"······."
언제부터였지? 아셸이 저렇게 이상한 기색을 보이던 게.
용사와 동행을 시작한 지 중간쯤부터였을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용사의 존재가 불편하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어렴풋이 느낌이 들 뿐.
이참에 그녀에 대한 문제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셸."
"예."
"네 상태가 얼마 전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인가?"
빙빙 돌려 말하면 흐지부지 넘어갈 것 같았기에 대놓고 물었다.
자그맣게 헛숨을 들이킨 아셸이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역시 뭔가가 있기는 있군.
"아닙니다, 론 님. 저는······."
"네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어영부영 넘어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나는 너를 믿으니, 그렇게 여겨도 문제는 없는 거겠지."
아셸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만 알아둬라. 너는 내 앞에서 언제나 냉정할 필요도, 흔들리지 않을 필요도 없다.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터놓지 않으면 별 수 없지. 굳이 무리해서 억지로 캐묻고 싶지는 않으니.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아셸이 꾹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한심한 이유라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을 뿐입니다."
"······?"
한심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무슨. 네 한심한 모습이야 지금껏 많이 봤는데."
"예?"
"스튜 끓이는데 소금 넣는 걸 까먹거나, 몰래 띠용이를 쓰다듬으며 입꼬릴 씰룩이거나, 아니면······."
"······예, 예?"
아셸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농담이다."
너무 축 처진 기색이길래 한번 농담해본 건데 반응이 격했다.
내가 이런 농담을 한 게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운지 그녀는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채였다.
"어떤 이유라도 네게 실망할 일은 결코 없으니 말해봐라."
진정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온 아셸이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앞으로의 여정에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회의감이 들었는지까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용사, 그렇지 않아도 일족의 일로 불편한 존재인 그녀가 협력자로서 함께하고 있었으니.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용사와의 대화, 내가 당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당신뿐이라고 그녀에게 위로차 말을 건넸을 때.
아셸은 아무래도 그 대화를 듣고 회의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거라면 이 녀석은 정말로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마법사의 던전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나?"
"······?"
"나는 네게 내가 바라는 바와 목적에 대해서 말했고, 너는 기꺼이 그를 돕겠다고 했었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아셸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뱉은,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던 내 진실된 속내였다."
"······."
"알겠나? 아셸. 네가 처음이었다는 거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런 한심한 생각은 이제 관둬라."
무력과는 관계가 없다.
이 외로운 세계에서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셸일 것이다.
아셸은 한참을 굳은 듯 멍하니 서있다가, 곧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심각한 건가 했더니 별 것도 아니었구만. 하여간.
나는 옷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용사가 계승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게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용사, 에인델은 마당 한편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카앤을 바라봤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어느새 다시 마당으로 나와서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
검이 차례로 그리는 검로도, 몸의 균형도, 근육의 움직임도.
무엇 하나 모난 것 없이 완벽하다.
그녀는 현재 그녀의 수준에서 펼칠 수 있는 완벽한 검을 펼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이 피나는 노력의 결실인지, 아니면 하늘이 내린 타고난 재능인지.
'천재.'
카앤은 성검의 계승자다. 그러니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후자였다. 오히려 평범했다면 놀랐을 것이다.
"되게 유심히 보시네요."
카앤이 검을 휘두르던 걸 멈추고 에인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저 마당에 있던 건 에인델이고 그녀의 앞에서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건 카앤이었지만, 에인델은 사과를 건넸다.
"실례라면 미안하구나."
"딱히 실례는 아니고요."
목검을 어깨에 걸친 카앤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에인델이라고 했죠. 당신도 검사 맞죠? 보기에 내 검술은 어땠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진짜요? 빈말 아니죠?"
"진심이다. 내가 빈말을 할 이유는 없다."
흐응, 콧김을 내뿜은 카앤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에인델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그런데요, 결국 그 이상한 검은 왜 나한테 쥐어보라고 했던 거예요? 그 검이 나한테 어울리는지 아닌지 확인해서 뭐 하게요?"
에인델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검의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서다."
"새로운 주인······? 왜요?"
"나는 이제 그 검을 쥘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내 무덤에 같이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명검이니."
그 말에 카앤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 무슨 불치병이라도 걸리셨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병이라면 제 아버지가 이것저것 잘 고치시는데, 한번 말씀드려볼까요?"
"안타깝지만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병이 아니라서 말이다. 마음만 고맙게 받으마."
"아니, 그래도."
카앤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에인델에게서 알 수 없는 단호함을 느끼고, 관두었다.
"······그래서 저는 그 검의 주인으로 적합했나요? 뭔가 요란하게 빛이 나기는 했는데."
에인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구나."
"유감이네요."
카앤은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가능하면 들어드릴게요."
에인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네게 궁금한 걸 몇 가지 묻고 싶은데."
"그쯤이야 얼마든지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왜 아버지와 이런 깊은 산속에서 단둘이 살고 있는 거니?"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목덜미를 긁적이던 카앤이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딱히 이유랄 건 없는데요. 제 기억이 남아있는 어린 시절부터 전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었으니까요."
"······."
"그나마 산맥 바깥에서 있었던 유일한 기억이라면, 다 죽어가던 저를 아버지가 구해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는 것밖에 없어요. 그조차도 희미해서 잘 기억은 안 나고요. 아버지한테 물어도 항상 대답을 피하고."
에인델이 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럼 친부가 아니었다는 건가?
"산맥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니?"
에인델은 카앤이 떨떠름해한다는 걸 알고 질문을 바꿨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소녀를 산맥 바깥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다음에 성검의 계승도 어떻게든 시도해볼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억지로 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만에 하나 상황이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치닫더라도 말이다.
현실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뼈져리게 겪고, 또한 이해하고 있는 에인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승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성검의 주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 책임을 결코 떠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용사인 이유였다.
"음······ 그것도 글쎄요. 그래도 바깥세상에 대한 흥미는 있어요."
카앤이 조금 들뜬 기색으로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으로 보거나 아버지한테 이야기로만 들었어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도시라는 장소, 온갖 마법사들이 모여서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는 세인테아의 마탑, 온 대륙을 떠돌며 고대의 유적을 찾는 모험단들."
"그래. 바깥에는 그런 것들이 있지."
"그리고 당신들이 왔다는 칼데릭도 참 재밌는 곳인 것 같아요. 지배자인 군주들도 종족이 전부 다르다면서요?"
에인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래도 바깥세상에 대한 흥미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아예 관심도 없었다면 설득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테니.
"가장 흥미로운 건 로디븐이 이야기해준 아카데미라는 곳이에요."
"아카데미······?"
"네, 아카데미요. 아케데미랬나? 아무튼 저랑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서 온갖 것들을 배우는 장소래요. 검술도 배우고, 마법도 배우고, 그리고 모여서 연구도 하고."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카앤을 에인델이 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잘 들어보니,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전부 장소 그 자체보다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