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자 (9)
성검에서 뿜어져나온 빛이 시야를 온통 밝게 뒤덮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광채였다.
깜짝 놀란 계승자가 손에 쥔 성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제야 광채도 서서히 사라지며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뭐예요, 방금? 나한테 뭘 시킨 거예요?"
계승자가 용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용사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석상처럼 굳기라도 한 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용사를 대신해서 당혹스러운 기색을 띠고 있는 계승자를 진정시켰다.
"네게 해를 끼치려고 한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그 검의 특별한 능력일 뿐이니."
"······능력이요?"
"그래. 사용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어울리는지를 판별하는 능력이 있는 검이다. 명검들 중에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 있다."
대충 둘러대자 계승자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고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검을 사용하기에 어울리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음······ 그래."
계승자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용사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는 없던 경계심도 약간 묻어나오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다짜고짜 건네준 검을 자신이 쥐자마자 눈이 멀 정도의 빛이 뿜어져나왔으니.
성격은 아직은 순진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기만 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제 어쩔 거지?'
어쨌든 그녀가 성검의 계승자라는 건 이로써 용사도 확인했다.
나는 용사를 힐끗 바라보며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다.
성검의 계승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이 다음부터의 일은 용사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용사는 어쩔 것인가.
계승자에게 사정을 숨김 없이 설명하고 협력을 구할 건가? 아니면 일단은 더 지켜볼까.
나는 용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용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가능하다면 그녀도 당장이라도 계승자를 설득하여 성검을 계승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계승자의 현재 역량도 역량이지만 그 전에 절대적인 문제가 있었다.
왜냐면, 성검의 계승에는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하는 '조건'들이 존재했으니까.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용사는 계승자에게 한마디 사과를 건네고서, 성검을 도로 회수한 뒤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는 아셸에게 계승자를 상대해주고 있으라고 속삭여 말한 뒤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
"그녀는 계승자가 맞나?"
땅바닥에 성검을 꽂아두고서, 생각에 잠긴 듯 나무 앞에 서있는 용사에게 물었다.
용사는 올려다보고 있는 잎가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7군주, 그대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덕분에 정말로 이렇게 계승자를 찾게 되었으니."
"말과는 다르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그제야 용사가 내게로 시선을 옮겨 눈을 마누치고서 물었다.
"그대는, 성검의 계승에 필요한 조건이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나?"
계승자에 대한 정보도 내가 전부 제공한 마당이다. 이거라고 굳이 눈치를 볼 건 없었다.
"네 가지 시련."
"······."
내 말에 용사는 도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알고 있었군."
성검을 계승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그것은 계승자가 겪어야 할 4가지의 시련이었다.
그것은 검술이나 마법 등 무력적인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닌, 내면의 번뇌에 관한 것이었다.
[소중한 이를 상실하는 슬픔을.]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는 절망을.]
[인간의 이기심에서 추악함을.]
[옳다 여겨온 정의에서 회의를 느껴야 할 것이다.]
나는 게임에서 성검이 용사에게 내렸던 계시를 떠올렸다.
계승자가 성검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련들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
"······."
새삼 생각하지만, 정말 더럽게 막막한 문제였다.
신비를 찾느니, 허세를 부려서 주변을 속이느니, 지금까지 헤쳐온 난관들과는 결이 다른 까다로움이었다.
라사의 메인 스토리, 그것은 요약하면 계승자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하는 모험 이야기다.
유저와 계승자가 처음으로 만난 장소는 로그나르 왕국의 마커 시, 모험가 길드 건물.
퀘스트를 수행하던 유저는 마침 이해관계가 일치하던 계승자와 함께 하나의 의뢰를 맡게 된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인연은 하나둘씩 여러 동료들을 만나며 장대한 모험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계승자는 많은 일들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계승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게 된다.
계승자에게 성검을 계승시키는 것.
그것을 이루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그러한 게임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지금까지의 내 행동으로 이미 게임상의 메인 스토리는 꼬일 대로 꼬여버렸으니까.
본래라면 계승자와의 모험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도 이미 몇몇 해결했고, 지금만 해도 없었어야 할 만남이 이루어졌다.
만약 게임의 스토리를 그대로 재현하려면 지금의 시점에 계승자를 찾아온 것부터가 단단히 어긋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내게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임에 빙의하고, 살아남기 위해 별 수 없이 7군주가 되고, 신비들을 모은 것부터가 이 세계에 너무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약 그 나비효과로 인해 계승자가 유저와 처음 만났던 시점과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러면 영영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게임의 스토리를 그대로 재현하려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억지로라도 다시 그녀의 동료들까지 찾아내 모험을 떠나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유저와 계승자, 그리고 그 뒤에 만난 동료들과의 유대.
그것은 수많은 우연과, 계기와, 사건들로 쌓이고 얽힌 복잡하고 끈끈한 관계다.
또한 계승자의 마음은 내가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도, 조종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게임의 그 많은 에피소드들을 그대로 따라가도 변수가 넘쳐날 판에, 신이라도 되지 않은 이상 지금 상황에서 메인 스토리를 그대로 재현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더해서 다른 동료들을 찾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들 또한 지금 시점에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으니.
그렇기에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게임의 메인 스토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계승자가 성검의 계승 조건을 만족시킬 새로운 계기들을 만들어야 한다.
'······대체 어떻게?'
지금 용사가 나와 똑같은 심정일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니, 배신이니, 인간의 이기심이니, 정의니······.
현재의 용사는 아버지와 산속에서만 자라온 평범한 소녀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수로 그런 고통들을 겪고, 극복하게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쭉 생각해왔지만 명확한 방도가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인위적으로 무대를 마련하고 계승자를 그 위에 올려놓기라도 해야 할까? 마치 연극처럼?
과연 그런 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었지만,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 이전에 인간으로서 못 할 짓이기도 했다.
문득 영화가 하나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세트장에 갇힌 주인공이 그 세트장이 진짜 세상인 것처럼 살고, 모두가 주인공을 속이는······.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다시 용사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 뒤에야 용사는 입을 열었다.
"계승의 문제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계승자를 찾아내는 것부터가 지금껏 내게는 막막한 문제였으니까."
"······."
"그렇기에 알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은 떠오르는 방법이 없군."
용사 또한 내가 생각한 걸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건 그녀에게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는 수겠지. 조금의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승자를 찾아낸 지금, 어쩌면 성검에서 새로운 계시가 내려올지도 모른다.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다."
용사는 그렇게 말하며 성검의 자루를 슬며시 쥐었다.
그녀의 기대대로 성검에서 계시가 더 내려올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용사나 나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으니.
그동안은 계속 여기서 머물며 계승자와 가능한 한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게 좋을 것이었다.
***
"이상한 사람들이야."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카앤은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맞은편에는 로디븐이 앉아서 아직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로디븐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갔어요?"
"좀 전에 위층으로 올라갔단다."
현관문을 슬쩍 바라본 로디븐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런데, 혹시 밖에서 그들과 더 이야기를 나눈 거냐?"
"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별 거 없어요. 그냥 악수 나누면서 인사 좀 했는데요."
7군주와 악수를 나눴다는 말에 로디븐은 허, 탄식을 내뱉었다. 무언가 형용하기 힘든 괴리감을 느끼며.
그의 상식에서의 군주들의 이미지와 실제로 본 7군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적어도 함께 차를 나누거나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로디븐은 좀 전의 대화를 상기하며 7군주의 저의를 짐작했다.
그는 단순히 마족의 계약자를 쫓아 이곳에 왔다고 했지만 로디븐은 물론 순순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로디븐은 7군주의 온화한 태도가 자신보다는 이들 부녀에게 향해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7군주의 진정한 목적은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한들 로디븐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가 다시 고민에 잠기려고 할 때였다.
"아저씨, 산맥 바깥에 대한 이야기 좀 더 해줄 수 있어요?"
"······음?"
"칼데릭이니 뭐니 무슨 큰 세력들이 있다면서요. 그거에 대해서 자세히요."
그녀의 요구에 로디븐은 맥빠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칼데릭과 세인테아를 포함한 대륙의 4대 세력, 그들의 수뇌, 마족들에 대해서 로디븐은 차례로 설명해주었다.
카앤은 흥미가 가득한 기색이 되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7군주라는 자는 최근에 군주의 자리에 새롭게 오른 자다. 같은 군주인 6군주 폭왕을 살해한 것으로도 유명하지."
"왜 죽인 건데요?"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렇다고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매우 좋지 않은 생각 같구나."
호기심에 찬 카앤의 눈빛에 로디븐은 이건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며 뒷말을 덧붙였다.
"카앤, 너는 바깥세상에 대해 잘 모르기에 그 자를 편하게 대하지만 말이다, 칼데릭의 군주는 정말로 위험한 자들이다. 일신의 힘으로도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괴물들이지."
"엄청나게 강하다는 거네요."
카앤이 헤에, 감탄사를 흘렸다.
물론 나라라는 개념조차 흐릿한 그녀에게 크게 와닿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던데요. 갑자기 검이나 쥐게 시켜본 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검?"
카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보다 아저씨는 무슨 아카더미의 교수라고 했잖아요?"
"아카더미가 아니라 아카데미다."
"네, 아카데미. 그건 뭐 하는 곳인데요? 교수는 또 뭘 하는 거고요?"
로디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대답했다.
"아카데미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곳이란다. 검술이든, 마법이든, 지식이든 말이다. 그리고 교수는 가르치는 입장의 사람이지."
카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가 가르치는 사람이면 배우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데요?"
"학생이라고 한다. 네 또래의 아이들 몇천 명이 여러 교수들에게 배우고, 서로 배움을 공유하기도 하지."
그 말에 그녀의 눈에 자그마한 흥미가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