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자 (8)
슈우우우!
황금빛의 기운이 마치 혜성처럼 긴 꼬리를 그리며 가공할 속도로 날아왔다.
나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왔나.'
분명 나랑은 산맥의 정반대쪽으로 향했을 텐데 어떻게 벌써 알고 왔을까.
어쨌든 마침 좋은 타이밍이었다. 찾을 수고를 덜었으니까.
이내 순식간에 이곳까지 도달한 용사가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설마 광채의 정체가 사람이 날아오는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세 사람은 경악한 기색이었다. 방금까지 재잘거리던 계승자도 눈만 휘둥그레 뜬 채 용사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
용사 또한 그들과 아셸에게 제압당한 마족을 차례로 훑어보고는, 설명을 바라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계승자를 슬쩍 쳐다보고서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그녀인 것 같다.'
성검의 계승자.
용사의 남은 삶의 마지막 목적이자, 희망.
"······!"
계승자를 바라보는 용사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복잡한 순간일 것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계승자를 드디어 찾은 것이었으니까.
용사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말리지 않으면 당장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성검을 소환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녀를 불렀다.
"이봐."
용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다시 이성을 찾은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용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맞나? 따로 확인이 필요한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게임에서 용사와 계승자의 만남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계승자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은 용사는 성검을 소환하여 계승자에게 쥐어주었고, 오직 용사에게만 반응해야 할 성검의 기운이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계승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과정은 용사가 저 소녀에게 성검을 쥐어주고, 그녀가 바로 계승자임을 확신하기만 하면 된다.
용사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직접 성검을 꺼내서 확인해야 한다."
"그런가. 그럼 그건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군."
용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다짜고짜 성검을 꺼내서 계승자에게 쥐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계승자 외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 둘.
계승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단둘이 산맥에서 살았다고 했었다.
그러니 둘 중 한 명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는데, 어느 쪽인지는 이내 알 수 있었다.
계승자가 왼쪽에 서있던 남자의 곁에 가까이 붙으며 속삭여 말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또 늘어났는데, 아버지."
나는 계승자의 아버지가 아닌, 내 정체를 먼저 입에 담은 남자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이쪽은 뭐? 아카데미 교수?
계승자가 방금 남자를 산맥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한 말이다.
아카데미라면 세인테아의 엘폰을 말하는 건가? 그런 작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될 듯 싶었다. 모일 사람이 전부 모였으니.
"적의는 없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 이게 첫 만남이니 계승자와 그녀와 관련된 인물에게는 나쁘지 않은 첫인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계승자는 내게 있어 용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 세계의 최종 보스인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카드. 그녀와는 최대한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야만 했다.
내 정체는 먼저 밝힐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들켰다.
그렇기에 경계를 거두게 하려면 우선 이곳에 온 그럴듯한 목적을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마침 좋은 연막이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저 마족의 계약자 때문이다. 그대들과는 관련이 없으니 안심하도록."
"······예, 예. 그렇습니까."
가장 긴장한 채 있던 교수라는 남자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내 정체까지는 알아챘지만 용사까지는 알아보지 못 한 듯했다.
당연했다. 나야 소문이 난 게 많으니 알아볼 요소가 충분했지만, 용사는 현재 성검의 능력으로 폴리모프까지 한 상태였으니까.
그때 아무 말도 없이 나와 용사, 그리고 아셸을 둘러보고 있던 계승자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큰 도움을 받았소.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소."
의외로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감사 인사였다.
"들어오시겠소? 바로 떠날 것 같지는 않은데,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리리다."
남자가 등 뒤에 있는 오두막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떠날 것 같지 않다니······ 무슨 소리지? 관련이 없다고 했는데 뭘 눈치채기라도 했나?
계승자의 아버지는 게임에서도 거의 나온 정보가 없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무언가를 느끼며 용사를 바라봤다.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이야기도 듣고 싶으니."
***
차를 대접받으며 나눈 대화는 별 것 없었다.
우선 계승자의 이름은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카앤이 맞았다. 그것으로 그녀가 계승자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교수 쪽의 이름은 로디븐, 그는 정말로 엘폰 아카데미에서 온 교수라고 했다.
연구에 필요한 몬스터 표본을 얻기 위해 이곳 라몬 산맥에 왔다가 우연히 이들과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한마디로 계승자와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니 마족의 계약자는 아무래도 계승자와 별다른 관련이 없는 듯했다.
놈과 처음 마주친 건 교수 쪽이고, 그 때문에 계승자 부녀까지 휘말리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교전 중이었던 거로군.'
계승자의 아버지 쪽의 이름은 벤이라고 했다.
되도록이면 그의 정보도 알고 싶었기에 마족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 은근히 화제를 돌려보려 했으나······.
"나는 그저 평범한 나무꾼일 뿐이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것 같던데."
"젊었을 적에는 떠돌이 마법사였지. 군주께서 듣기엔 별 재미없는 이야기일 것이오."
대놓고 그가 자신과 계승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캐묻는 것은 실패했다.
다만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레벨도 그렇고, 그는 계승자처럼 세간의 지식에 어두운 것도 아닌 듯한데 내게 조금도 긴장한 기색 따위가 없었으니까.
보통 군주쯤 되는 거물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교수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일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용사와 오두막의 앞마당에 나란히 서서 따로 말을 나눴다.
"이건 사소한 거다만."
"······?"
"그 벤이라는 남자의 이름, 진짜 본명이 아닐 것이다."
용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사에게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다. 그 능력으로 판단한 사실일 것이었다.
"우리를 경계해서 그런 건가."
"그보다는 다른 쪽일 것이다."
"······음?"
"진실과 거짓에는 흑백처럼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 게 아니다. 그 남자의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름에는 절대성이 없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버리고 오랜 세월을 다른 이름으로 살아왔다면, 그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지."
나는 용사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 벤이라는 남자가 살아온 삶에서 여러 이름을 사용해왔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그중 벤이 현재의 이름이고.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용사의 말마따나 사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고.
"그보다 이제 확인을 해봐야겠지."
"그래. 근데 그 전에 저것부터 처리하는 게 어떻겠나?"
나는 오두막과 떨어진 곳에서 아직까지 아셸에게 제압당한 채 있는 계약자를 바라봤다.
"계승자와는 전혀 무관한 놈인 것 같지만, 만에 하나 모르는 일이니 확실히 확인을 하지."
용사와 함께 놈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용사가 차가운 눈길로 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해라."
항거할 수 없는 기운에 놈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어대다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놈의 이야기는 별 것 없었다. 놈은 특별할 것 없는 마족의 계약자였고, 이 산맥에 다다른 건 우연일 뿐이었다.
용사가 놈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다. 역시 놈은 계승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7군주······ 제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 할 테니······."
나는 애원하듯 말하는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원하는 건 모두 들었으니 더 볼일은 없었다. 마족과 놈들의 계약자는 살려둘 이유가 하등 없는 해악이었다.
투욱.
즉살을 사용하자 놈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용사가 조금 놀란 듯한 기색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방금 그건 마력이 아니군. 신비인가?"
나는 용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뒤쪽을 돌아봤다.
때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두막에서 나온 계승자, 카앤이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 죽인 건가요?"
바로 근처로 다가온 그녀가 쓰러진 계약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오해를 샀을까 싶어서 물었다.
"그래. 불쌍한가?"
"아뇨. 그놈 때문에 아버지가 죽을 뻔했는데 그럴 리가요."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릴게요. 어, 그러니까······ 군주님 덕분에 저도 아버지도 무사하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
악수?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되나 하다가 얼떨결에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로디븐 아저씨한테 방금 좀 들었어요. 그러니까, 칼데릭의 군주라는 게 북대륙 전체를 다스리는 왕들 중 한 명이라고. 엄청 대단한 분이라고요."
"······그래."
옆의 아셸이 어딘가 안절부절한 기색으로 끼어들려고 했다.
어쩐지 이 상황이 웃기게 느껴져셔, 나는 피식 웃으며 아셸에게 손을 저었다.
계승자는 어릴 적부터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고 했으니 세간의 지식에 어두울 거란 건 알았다. 이 정도일 줄 몰랐을 뿐이지.
또한 내가 게임에서 알고 있는 계승자보다 지금의 그녀는 훨씬 성격이 활달해 보였다.
"그럼 이 엄청 강한 사람들은 군주님의 부하인가요?"
"부하기도 하고, 동료기도 하지."
카앤이 타겟을 바꿔 용사와 아셸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녀들도 조금 얼떨떨한 기색으로 악수를 받아주었다.
'이제 슬슬······.'
나는 저멀리 떨어진 오두막을 바라봤다. 아직 오두막 안쪽에 있는 로디븐과 벤은 밖으로 나올 기색이 없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다.
나와 눈짓을 주고받은 용사가 계승자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럼 카앤, 부탁을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이요?"
"그래. 간단한 일이야. 내 검을 한번 쥐어보기만 하면 된다."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뭐. 그게 뭐 대수라구요. 근데 검이 어디에 있는데요?"
사아아아.
용사가 허공에 손을 뻗자 황금빛이 모이며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검에 카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자, 쥐어보렴."
용사가 허공에 둥둥 뜬 성검을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카앤은 물끄러미 성검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을 검자루로 가져갔다. 그리고······.
번쩍!
그녀의 손이 닿은 순간, 성검에서 찬란한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