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28화 (128/189)

계승자 (7)

[······내 어렸을 때? 뜬금없이 뭐 그런 걸 물어봐?]

[산속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어. 세인테아 동쪽에 산맥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검술이나 마법도 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다른 건 대답해주겠는데, 아버지에 대해선 더 묻지 마.]

게임 스토리 진행 중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화의 일부였다.

유저, 그리고 동료들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게 된 계승자가 들려준 자신의 과거 이야기.

시간상으로 따지면 계승자는 분명 이 라몬 산맥에 있다. 거짓말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다만 문제는 계승자가 이곳에 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띠용이를 탔다고 해도, 이 넓은 산맥 전체를 샅샅이 뒤지는 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막막한 일이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좀 쉬운 정도.

산맥에 도착하고 약 반나절의 시간이 흘렀다.

용사와 반대편으로 향한 나는 끝없이 펼쳐진 수풀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더 둘러보고 쉬자."

띠용이의 목을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녀석이 대답하듯 그르렁거렸다.

녀석뿐만 아니라 나 역시 감각을 아까부터 최대로 끌어올린 채였기에 정신이 피곤했다.

"······!"

감각에 미세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감지된 건 그 순간이었다.

하나는 마족의 마력을 연상케 하는 불길한 마력,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마력.

앞서 몇 번이나 만나본 마족이었기에 불길한 마력 쪽의 주인이 마족이라는 걸 확신했다.

'또 마족이라고?'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곳에서까지 마족의 마력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기에.

설마, 하는 불길한 가정이 머릿속에 스쳤다.

계승자가 위치한 이 산맥에 마족이 있다면 그건 우연인가? 설마 계승자를 노리고 찾아오기라도 한 건 아닌가?

지금 시점에 계승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마족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계승자의 존재는 용사가 성검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알게 된 사실. 나와 용사 외에는 누구도 알아서 안 되는 비밀.

아무리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이 이 세상에 크고 작은 영향들을 미쳤다고 해도 그건······.

"론 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아셸도 기운을 느낀 듯 나를 불렀다.

"속도를 최대로 높여라, 띠용아. 지금 가고 있는 쪽으로."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을 노려봤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될 것이다.

***

'와이번······?'

로디븐은 하늘 저편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물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가 와이번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온갖 몬스터에 대해 박식한 그조차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크기의 블랙 와이번.

와이번은 대륙의 몇몇 장소를 제외하면 서식하지 않는 희귀하기 그지없는 생물이다.

설마 이곳 라몬 산맥에서도 서식하는 와이번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등 위에 누군가가 타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저 괴물은?"

카앤 역시 당황하며 와이번을 바라봤다. 그녀에게 있어 와이번은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그리고 날개가 달린 몬스터였다.

후우우웅!

돌풍과 함께 와이번이 지상으로 착지했다.

이어 와이번의 등에서 내린 건 두 명의 남녀였다.

괴인은 방어막을 펼치고 있던 마법사에게서 그들에게로 신경을 옮겼다. 두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리를 두고 마주한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가공할 기운.

이번에 마족을 사냥하여 한 차원 더 높은 격으로 성장한 괴인은 알 수 있었다. 여인이 은연 중에 뿜어내고 있는 마력의 격을.

방어막을 펼친 마법사에게는 격의 차이에 모호함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단번에 직감했다.

'내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여인이 보좌하듯 곁에 서있는 남자.

그에게서는 마치 벌레라도 보듯 일말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더 이질적이었다.

더군다나 저만한 강자를 수하로 둔 이가 당연히 보통 존재일 리가 없다. 지극히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잠깐, 블랙 와이번?'

괴인은 머릿속에 번뜩 스쳐간 정보에 순간 오싹함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는 본래 평범한 인간이었고, 지금도 세인테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세간의 소문에 밝다. 근래 대륙을 떠들석하게 하고 있는 한 존재에 대해서도 당연히 흘려들은 것들이 있었다.

흑발의 인간 남성, 백월족 호위기사 여인, 블랙 와이번······.

'칼데릭의 7군주.'

같은 군주인 6군주 폭왕을 살해하고, 중립국 회담에서도 세인테아 황실 측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새로운 칼데릭의 군주.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외관적 특징은 소문으로 들은 것들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섣부른 짐작이 아니었다. 대륙에서도 길들인 인물이 몇 없다는 블랙 와이번까지 있는 걸 보니 분명 확실했다.

'7군주가 대체 왜 이곳에?'

칼데릭의 군주, 그에게 힘을 준 마족초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자.

그들은 마족의 정점인 원마들과 비교해야 이치에 맞는 괴물들이다.

괴인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숨을 죽인 채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 7군주는 이쪽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방어막 너머에 있는 세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괴인은 7군주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서 도주하기 위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마족은 아니고, 계약자인가?"

7군주의 입이 열렸다.

괴인은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타인의 손에 쥐어진 감각, 이 불쾌감은 오랜만이었다.

괴인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하며 7군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7군주가 수하인 여인에게 곧장 명령했다.

"목숨은 붙여서 제압해라, 아셸."

***

기운이 느껴지는 근원지에 도착하자 펼쳐진 풍경은 선뜻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많은 괴물들을 부리고 있는 마족, 그리고 그에 대치하여 방어하고 있는 듯한 세 인물.

"······!"

나는 그중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리칼의 색도, 눈의 색도, 어렸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계승자와 정확히 일치하는 외관.

'계승자!'

분명히 계승자가 맞다.

나는 온몸에 찌릿 전율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아셸에게 명령했다.

"목숨은 붙여서 제압해라, 아셸."

괴인 쪽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느껴지는 마력으로 보아 마족은 아니고 계약자인 듯했다.

때마침 계승자를 습격하고 있는 상황이 공교로웠기에 설마 정말로 마족들이 계승자의 정체에 대해서 안 건가 싶었으나······.

'모르겠네.'

【Lv. 73】

그렇다기엔 너무 피라미였다.

일단 마족들이 계승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정말로 알았다면 이런 피라미를 보낼 게 아니라 최소한 원마급이 직접 움직이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용사는 그들에게 있어 마왕의 부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인데 말이다.

놈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일단 제압해서 용사에게 심문이라도 시키면 될 것이었다.

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검을 뽑아든 아셸이 괴인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콰과과과광!

그녀가 휘두른 일검에 괴인의 주위에 있던 괴물들이 먼저 우수수 쓸려나갔다.

괴인이 기겁하며 요란하게 마력을 일으켰으나 덧없는 발악이었다. 90레벨이 넘는 아셸과 놈 사이의 격 차이는 아득했다.

순식간에 괴인의 뒤를 점한 아셸이 놈의 뒷머리를 붙잡고서 그대로 지면에 내리찍었다.

"끄으윽······!"

"얌전히 있어라. 저항하면 머리를 터뜨리겠다."

아셸의 경고에 괴인은 체념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다시 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그들은 펼치고 있던 방어막을 거두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저 사람들이 다 쓸어버렸는데, 아버지······?"

카앤이 얼떨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등장해서는 수많은 괴물 무리와 괴인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해버린 여인.

슬슬 마력에 한계가 왔던 남자는 방어막을 거두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

한편 로디븐은 경악을 숨기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남자 쪽을.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 박자 늦게야 짐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칼데릭의 7군주?'

외모도 그렇고, 블랙 와이번도 그렇고, 전부 소문으로 들어온 것과 일치하는 인물.

산 넘어 산이었다. 마족의 계약자에 이어서, 칼데릭의 7군주는 또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저 마법 연구를 위해 찾아온 산맥에서, 로디븐은 자신이 무언가 어마무시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괴인을 제압한 7군주가 이쪽을 향해서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멈춰선 그가 세 사람을 슥 훑어봤다.

로디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칼데릭의 7군주······ 이십니까?"

로디븐은 말하고서 곧바로 후회했다.

그가 이곳에 어째서 모습을 드러낸 건지 이유도 모르는 상황에, 너무 섣불른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칼데릭의 군주?"

로디븐의 말에, 괴인의 공세에도 태연하기만 했던 남자의 얼굴에도 자그마한 놀라움이 일었다.

카앤은 알아듣지 못 했기에 멀뚱히 세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그녀는 칼데릭과 군주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무런 대답도 없던 7군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대는?"

긍정이나 다름없는 반문, 그러나 예상 외로 온화한 태도에 로디븐은 저도 모르게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곧 다시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대답을 고민했다.

상대는 적국이나 다름없는 진영의 군주, 엘폰의 교수라는 신분을 솔직하게 밝혀도 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목적이 무엇이지? 괴인 쪽인가? 아니,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어째서인지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로디븐의 머리가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때 카앤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저는 카앤이에요."

그에 7군주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녀가 말을 건 순간, 로디븐은 왜인지 7군주가 조금 놀란 것 같다는 기색을 느꼈다.

"이쪽은 제 아버지고, 이쪽은 산맥 바깥에서 온 사람이에요. 무슨 아카데미니 교수니 했던 것 같은데 저도 잘은 몰라요."

갑자기 자신의 정체까지 다 까발려버리는 카앤의 언사에 로디븐은 당황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저기 저 엄청 강한 사람도 그렇고, 분위기를 보니까 좀 대단하신 분인가요? 칼데릭의 군주?"

"······."

7군주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로디븐은 속으로 아우성을 지르며 7군주의 분위기를 살폈다.

좀 대단하신 분? 아무리 세상사에 무지하다고 한들 칼데릭에 대해서도 몰랐단 말인가?

감히 어느 누가 칼데릭의 군주의 바로 앞에서 이딴 망발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이, 이 아이는 산속에서만 살아 세상에 무지해 그런 것이니······."

혹여 7군주의 언짢음을 사기라도 했다면 아무도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지 못 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흐를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로디븐이 대신 설명하려던 때였다.

쿠우우우!

찢어지는 파공음과 함께, 또 다시 하늘 저편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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