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자 (3)
"이쪽입니다."
카숄의 국왕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안내원을 뒤따라 성의 입구를 통과했다.
소문으로만 무성히 들어온 8군주성의 풍경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괴이하고 기괴했다.
성 곳곳에 쌓인 거대한 흑탑들. 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건 석재나 목재 따위가 아니다.
키이이.
살덩이, 갑각, 그것들이 난잡하게 뭉친 가운데 삐져나와 꿈틀거리는 다리와 더듬이들.
탑을 구성하고 있는 건 다름이 아닌 무수히 많은 벌레 떼였다. 개체 하나하나가 인간보다도 훨씬 큰 괴충들이.
8군주 흑해 여제, 그녀가 거느리고 지배하는 벌레 군단. 이곳 8군주성은 그 본진이자 둥지와 다름없다.
성 곳곳에서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몬스터들의 사체를 옮기고 있었다. 벌레들이 먹을 식량이었다.
하인들이 탑에다가 사체를 던지면 그것은 순식간에 탑 안으로 빨려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순히 흉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광경에 카숄 국왕은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나······.'
그는 성 한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다른 탑들처럼 벌레들이 떼거지로 뭉쳐있는 게 아닌, 하나의 개체였다.
성의 건물들보다도 거대한 그 괴충은 하인들이 가져온 식량을 몇 갈래로 갈라진 입으로 게걸스레 씹어삼키고 있다.
다만 놈이 먹고 있는 식량은 몬스터 사체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들.
앞서서 걸어가던 안내원도 그 광경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했다.
"편식이 심한 녀석이라 인간 말고는 잘 먹으려고 들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보기 불편하셔도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놀림이 섞인 듯한 말투에도 카숄 국왕은 침묵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8군주의 수하라도 일국의 국왕을 대할 태도가 전혀 아니었으나, 이곳은 카숄도 세인테아도 아닌 칼데릭.
아쉬운 것이 있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쪽은 그였다. 안내원의 태도가 어떻든 따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성 내부는 그나마 바깥에 비하면 평범했다.
복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한 대문 앞에서 멈춰선 안내원이 손을 내밀었다.
"이곳으로 들어가십시오."
카숄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안내원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부디 위대하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언행에 신중을 기하시길. 이곳에서는 그 무엇도 당신의 신변을 책임져줄 수 없습니다."
"······."
안내원이 씩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손짓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은 차갑고 어두운, 그리고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자줏빛으로 빛나는 발광석 하나가 천장에 박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카숄 국왕은 곧 흠칫 놀라서 굳었다.
마치 고치처럼 천장에 얽혀있는 거대한 실타래, 그 실타래 안쪽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카숄 국왕, 날 만나고 싶다고 했나요."
나른하고도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심장을 옥죄듯 울려퍼졌다.
카숄 국왕은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슬쩍 내리깔고 말았다.
칼데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국이라도 그 역시 일국의 국왕, 아무리 상대가 군주라도 시선도 못 마주할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공간의 분위기가, 그리고 벌레보다도 하찮은 존재를 보는 듯한 흑해 여제의 눈빛이 그를 그러도록 압박했다.
······이것이 진짜 군주의 위압감인가?
카숄 국왕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중립국 회담에서 봐온 대군주, 그리고 저번 회담에서 본 새로운 7군주는 굉장히 점잖은 태도를 내보였던 거라는 걸.
"이렇게 8군주를 뵙게 되어······."
"빈말은 집어치우고 용건을 말해요. 뭐, 듣지 않아도 뻔하긴 하다만."
카숄 국왕은 온몸에 올라온 소름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어스힐을 압도할 수 있는 병력을 지원해주십시오."
흑해 여제의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뱉었다.
"세인테아는 이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더라죠. 당신들을 돕지 않았으니 칼데릭에 도움을 받을 명분이 있다는 건가요?"
"······."
"그런데 그건 둘째치고, 더 큰 문제가 하나 더 있잖아요?"
한순간에 웃음기를 싹 지운 흑해 여제가 보란 듯이 정색하며 말했다.
"우리 7군주가 이미 어스힐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을 했는데, 지금 나더러 7군주와 대립해서 어스힐을 침공하는 걸 도우라는 뜻인가요?"
어둠 속에서 흑해 여제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다음 순간 카숄 국왕이 품에서 꺼내든 것은 혼탁한 붉은빛으로 빛나는 자그마한 진주였다.
그것을 본 흑해 여제의 눈이 슬며시 크게 떠졌다. 그리고 입가에 괴기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 어디서 얻었죠?"
"먼 선조께서 마경에서 발견하신 걸로 기록된 카숄 왕가의 보물입니다."
카숄 국왕이 진주를 내밀었다.
"만약 군주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이것을 이 자리에서 바로 드리겠습니다."
"흐응······."
흑해 여제가 콧소리를 내뱉으며 진주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기에 뭔가 했는데, 설마 그걸 거래의 대가로 가지고 올 줄은 몰랐네요."
"······."
"근데 국왕, 이런 생각은 안 했나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물건만 날름 삼켜버리면 어쩌려고? 아니면······."
그녀가 눈웃음을 띤 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카숄 국왕을 가리켰다.
"굳이 약속할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당신을 치워버리거나. 설마 그러지는 못 할 거라고 믿고 내 둥지에 찾아온 건 아니죠?"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이 농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카숄 국왕은 알았다.
칼데릭의 군주는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존재였다. 이곳에서 일국의 국왕이라는 직위 따위는 그를 조금도 보호해주지 못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하나뿐이 아닙니다."
"······?"
"지금 가지고 온 것 말고 2개를 더 보유하고 있습니다."
흑해 여제는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나머지 2개는 약속을 지킨 뒤에 주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으니 내가 굳이 당신과 거래할 이유가 있을까요? 카숄의 왕성에 직접 찾아가서 물건을 앗아오면 되는데?"
그 말에는 카숄의 국왕도 인상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입을 우물거리는 그를 보며 흑해 여제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렇게까지 막 나갔다간 감수해야 할 것이 많을 거다, 하나는 챙겨도 나머지 둘은 뜻대로 얻을 수 없을 거다, 뭐 이런 말이 하고 싶죠?"
"······."
"나도 알아요. 그냥 농으로 해본 소리니까 그리 정색하지 말라고요. 안 그래도 보기 추한 얼굴이 더 역겨워지잖아요."
흑해 여제는 좌우로 더듬이를 까닥거리며 잠시 말이 없었다.
카숄 국왕은 그 숨 막히는 침묵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내 흑해 여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좋아요. 더 할 말이 없으면 그건 놔두고 나가봐요. 내가 다시 그쪽에 수하를 보낼 테니."
카숄 국왕은 일단 고비는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불안 또한 치밀었다.
만일 세인테아의 황제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서줬더라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시 어스힐을 삼킬 기회가 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감사드립니다. 그럼······."
카숄의 국왕이 방 밖으로 나가고, 흑해 여제는 바닥에 놓인 진주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뿜어져나온 가느다란 실타래가 진주를 낚아채서 손으로 가져왔다.
"재밌네, 재밌어."
진주를 살펴보며 연신 웃음을 흘리던 흑해 여제가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금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카숄 국왕을 데리고 온 안내원이었다.
"지금 7군주는 다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목적지는?"
"언제나 그랬듯 따로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성을 비울 듯합니다."
흑해 여제가 더듬이를 까닥였다.
자세한 건 몰라도 최근에 7군주가 대군주와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마 저번 6군주 때의 일로 대군주와 약속한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건 분명한데, 뭐 그거야 아무래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과연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걸."
마침 타이밍이 적절하기는 했다.
7군주, 그 오만한 인간이 자리를 비운 틈에 카숄을 지원해서 어스힐을 밟아버린다면?
대군주 또한 이 일에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안다. 그러니 걸릴 만한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7군주는 이미 6군주 때의 일로 한 번의 선을 넘었다. 그래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대군주와도 맹세했었고.
이미 일이 벌어진 뒤에는 아무리 격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더라도 자신을 죽이려 들 수 없을 것이다.
놈이 또 한 번 같은 군주를 죽인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대가를 치뤄야 할 테니까.
***
산골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다.
맥없이 하늘이나 수풀을 둘러보며 산책하거나, 아니면 짐승이나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서거나.
라온 산맥은 수많은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대산맥이다.
카앤은 오늘도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산맥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몬스터를 찾아서 집에서 멀리 나섰다.
버릇처럼 나무 막대로 어깨를 두드리며 산길은 걷던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흐음······."
거대한 늑대 발자국. 그리고 이족보행인 것으로 보아 웨어울프의 흔적이다.
새로운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발자국의 길이가 몇 뼘은 될 정도로 거대했다. 이 정도로 거대한 놈은 처음이었다.
웨어울프는 웬만큼 난 모험가들도 상대하는 걸 피할 정도로 사납고 흉포한 몬스터.
하지만 카앤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발자국의 자취를 쫓기 시작했다.
한참의 추적 뒤, 카앤은 수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있는 웨어울프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웨어울프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거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웨어울프의 주변 바닥에 쓰러져있는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
로브를 걸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의 남성.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맥의 깊은 곳이다.
카앤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웨어울프에게로 신경을 옮겼다.
웨어울프 역시 쓰러진 사람에게서 카앤에게로 관심을 옮기고 그녀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크허엉!
성난 포효와 함께 돌진해오는 웨어울프를 향해서, 그녀는 침착하게 막대 대신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검날에 푸른빛의 기운이 감돌며 웨어울프와 그녀가 서로 교차했다.
동시에 웨어울프의 가슴팍이 쩍 갈라지며 선혈이 튀어올랐다.
"좀 얕았나?"
상처에도 아랑곳않고 다시 몸을 돌려 돌진하는 웨어울프를 보며, 카앤은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계속 몸을 움직였다.
웨어울프의 발톱은 나무조차 찢어발길 정도로 강력했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
카앤은 유연하기 그지없는 몸놀림으로 웨어울프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모두 피하며 검격을 이었다.
촤아악!
몇 번 더 검격에 몸을 베인 웨어울프는 결국 힘이 다해 땅바닥에 몸을 뉘였다.
카앤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쓰러진 사람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
상태를 살피니 숨은 붙어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외상은 없으나 안색이 완전히 새파랬는데, 아무리 봐도 웨어울프에게 당해서 쓰러진 건 아닌 듯 보였다.
카앤은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가 중년을 번쩍 들고서 어깨에 짊어졌다.
쓰러진 사람을 가만히 둘 수는 없으니 일단은 집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아버지가 치료해주든가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