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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23화 (122/189)

계승자 (2)

죄를 물을 수 없다.

용사의 말에 아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건 당연했다.

한 차례 대륙을 구한 영웅, 마왕의 목조차 베어버린 정의의 화신.

그런 존재가 어째서 늙고 노쇠한 황제 하나를 처단할 수 없다고 단언하듯 말하는 것인지.

"······어째서입니까? 만인에게 영웅이라 칭송받는 당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축 늘어진 아셸의 목소리 한편에는 날이 서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못했다. 용사는 자신의 명예 따위를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용사가 황제를 처단한다고 해도 명분만 갖춘다면 용사의 명성에 크게 흠이 갈 일은 없다.

세인테아에 있어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그녀는,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든 그를 행할 능력이 충분히 있을 것이었다.

단지 이유는 하나.

"현재 상황으로는, 황제를 처단한 뒤 세인테아에 미칠 혼돈을 걷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잠자코 용사의 대답을 곱씹었다.

용사의 행동 원리는 언제나 일관적이다. 세상의 평화.

하지만 또한 그녀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동화 속의 영웅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제는 영리하고 교활한 자다.

놈은 이런 용사의 성정을 잘 파악하고 있고, 이미 용사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준비해뒀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황위를 이을 자격이 있는 자식들에게 오히려 더욱 더럽고 잔인한 쟁투를 부추기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폐위나 죽음이 제국에 되도록 큰 혼란과 파장을 미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족의 재침공이 얼마 남지 않은, 모두가 단합되어야 할 시기.

그렇기에 용사는 황제를 심판할 수 없다.

누구보다도 할 일과 짊어진 책임이 많은 그녀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세인테아의 국정까지 모조리 뿌리뽑고 다시금 바로잡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당장은 황제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기에 눈엣가시라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용사는 그 복잡한 사정까지 굳이 덧붙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을 변명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셸은 그런 용사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끼어들어서 말했다.

"괜찮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부 하거라."

용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셸이 입을 우물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당신을 탓하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건 압니다."

"······."

"이것은 제 일족의 일일 뿐이고, 이제 세상에서 잊혀진 약소 종족의 사정 따위 당신의 관심 밖이었다고 해도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에게는 내게 책임을 물을 자격이 있습니다. 원망하고 증오하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건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는 걸 거다.

내가 용사를 만난 뒤 저 무표정한 얼굴에 가장 동요가 드러난 것을 본 게 바로 지금이었으니까.

아셸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저는 론 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녀였다.

"귀인께 결례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셸은 정중하지만 더없이 무감정한 투로 용사에게 사과했다.

용사는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눈빛으로 그런 아셸을 바라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대화였지만 아셸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어 보였기에 이만 이야기를 끝내기로 했다.

"아셸, 말했다시피 이제부터는 용사와 함께 계승자를 찾기 위해 이동할 것이다."

나는 용사에게 말했다.

"계승자의 위치는 세인테아 동부의 라몬 대산맥."

"······!"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곳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라몬 대산맥······."

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물었다.

"지금 바로 이동할 것인가?"

"그래. 질질 끌 이유가 없지."

라몬 대산맥까지는 띠용이를 타고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용사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고쳤다.

"아니, 내일 아침에 이동하기로 하지."

자리를 앞으로 또 한동안 비울 예정이니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면 정리하고 떠나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용사와 출발한 시간을 정한 뒤 여관에서 나왔다.

용사에 대한 아셸의 감정은······ 반감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행히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아셸."

"예."

"용사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려줬으면 한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셸에게 물었다.

아셸은 꽤 한참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좋은 감정은 들지 않습니다."

"그녀가 원망스럽느냐?"

"원망까지는······ 아닙니다. 황제의 처단은 당사자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남을 탓할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심정은 이해됐다.

백월족의 참사는 분명히 용사와 완전히 무관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용사가 막았을 수도 있었을 일.

또한 용사는 황제의 악행을 심판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있다.

아무리 용사에게도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해도 아셸에게 있어선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었다. 이성과 감정은 다르니.

그때 아셸이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론 님.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잠깐 심란해졌던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

어쨌든 당장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이왕이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긴 하겠지만, 용사와 아셸의 관계가 앞으로의 일에 중요한 건 아니니.

***

성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다른 손님을 맞이해야만 했다.

"······참모장?"

내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참모장 데이폰이 찾아온 것이었다.

성의 입구에 서있던 참모장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7군주님."

참모장이 성에 직접 찾아온 건 저번 6군주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니 그가 바로 방문 의사를 밝혔다.

"마탑주 건과 관련하여 군주님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인데, 이렇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

하긴, 그거 말고는 없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기에 참모장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왔나?"

마주 보고 앉아서 묻자 참모장이 집사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내 성격을 아는 참모장이었기에 곧바로 본 용건을 꺼냈다.

"현장에서 군주님께서 구해주신 정보원을 기억하십니까?"

"그래."

"그 정보원에게 플라베로스 마탑주가 원마 디트로데미얀과 계약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습니다. 또한 군주님께서 디트로데미얀을 그 현장에서 바로 처단하셨다는 것과, 그 뒤에 한동안 종적을 감추셨다는 것까지도."

나는 그래서 뭐 어쩌라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솔직히 디트로데미얀의 등장에 대군주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섞였는지에 대해선 완전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의도를 읽기 위해 빤히 쳐다보는 게 압박으로 느껴졌는지, 참모장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군주님께 직접 이야기를 전해듣고자 합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되나.

나는 고민에 잠겼다.

수도원에 대한 걸 조금이라도 말할 생각은 없었다.

로벨지오 수도원에 용사가 출현했다는 정보를 대군주가 지금쯤 알았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알게 될 정보였고, 그렇다면 나와 용사의 연결점을 들켜선 안 됐으니까.

"7군주님께선 대군주님과 약속하신 게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탑주 건과 관련된 것이라면 대군주님께 정보를······."

내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참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플라베로스 마탑주 암살, 그것이 대군주와 약속한 것. 그러니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 또한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조금 과장되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 참모장은 말을 멈추었다.

'좀 짜증나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 때문에 내가 뭔 일을 겪었는가?

디트로데미얀과 싸우고, 세인테아 변방에 덩그러니 떨어져서 다른 원마들까지 줄줄이 만나고, 대체 몇 번을 죽을 뻔한 건지 모르겠다. 물론 덕분에 용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아무튼 대군주 때문에 그런 개고생을 했는데 참모장의 말은 내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대답하기 난감하면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지금은 충분히 그럴 명분이 내게도 있었다.

"참모장."

"······."

"디트로데미얀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우연인가?"

나는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았는지 참모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해······ 이십니다. 디트로데미얀의 등장은 대군주님의 뜻과 조금의 관계도."

"그렇군. 하필 플라베로스의 마탑주가 원마의 계약자였고, 내가 마탑주를 처리하려던 그 순간에 놈이 등장한 게 전부 짖궂은 우연이란 말이지."

"······."

"대군주에게 전하도록. 이번 일에 대해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해명이 필요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참모장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대군주님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참모장도 더 묻지 못 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세게 나가면 어떻게든 대충 얼버무려서 넘길 수 있겠지. 어쨌든 약속대로 마탑주는 처리한 게 맞으니까.

***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특별히 생긴 문제는 없었다.

리프 남매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물어보니 리프는 북부 도시로 단원들 몇몇과 함께 임무를 나갔고, 리곤도 그를 따라갔다고 했다.

리프 남매는 어느새 성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서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하루 동안 여유를 가지고 휴식을 취한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아셸과 함께 띠용이를 데리고서 성을 나섰다.

집사장에게는 다시 한동안 자리를 비우겠다 말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도록 잘 관리할 것이었다.

용사는 도시 밖에 위치한 숲에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용사가 띠용이에게 흥미가 깃든 눈길을 주었다.

"7군주 그대의 와이번인가?"

"그래."

"블랙 와이번은 교감이 쉽지 않을 텐데, 좋은 동반자가 있었군."

용사가 슬며시 띠용이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나 이외 인물의 손길을 격하게 싫어하는 녀석이었지만, 묘하게도 용사에게는 특별히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그르렁거리며 내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사에게도 원래 와이번이 있었던가?'

기억하기로 용사의 와이번은 아마 마족과의 전쟁에서 죽었을 것이다.

용사를 보조해서 곁에서 전투를 치루다가 원마의 손에 죽임을 당했던가.

"같이 와이번을 탈 텐가?"

내 물음에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옆에서 비행하겠다."

어차피 도시들을 경유해서 목적지까지 이동할 건 아니었기에 눈에 띌 문제는 없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이걸로 준비는 다 끝났다.

크오오!

띠용이가 우렁찬 포효와 함께 먼저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 뒤를 용사가 날아서 따라붙었다.

가자, 성검의 계승자를 찾아서 라몬 산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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