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22화 (121/189)

계승자 (1)

세인테아 동부, 라몬 대산맥.

푸르른 수풀이 우거진 숲길을 한 명의 사람이 걷고 있다.

나무 막대를 어깨에 걸친 채 툭툭 두드리며 어슬렁 걸음을 옮기고 있는 소녀.

"······."

조금은 나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옆쪽의 수풀을 돌아봤다.

수풀이 부스럭거리더니 그곳에서 튀어나온 건 작은 다람쥐였다.

조심스레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는 다람쥐에게 소녀가 자연스레 쭈그리고서 앉았다.

그녀는 주머니를 뒫적거려 도토리 몇 알을 꺼내들고는 다람쥐에게 내밀었다. 다람쥐는 그것을 냉큼 받아들고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

쿠웅.

소녀가 한창 다람쥐를 쓰다듬고 있을 때 갑작스레 땅에 진동이 울렸다.

그에 화들짝 놀란 다람쥐가 먹고 있던 도토리까지 내팽개친 채 도망쳤다.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소리가 가까워지며 나타난 건 거대한 곰이었다. 단순한 짐승이 아닌 몬스터에 가까운 생물.

이미 어디선가 한 차례 사냥을 마쳤는지 곰의 입가에는 시뻘건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섬뜩하기 그지없는 포식자의 시선에도 소녀는 두려움에 질리기는 커녕 무덤덤했다.

단지 손에 쥐고 있는 나무 막대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점심은 고기 먹을 생각 없었는데."

크헝!

곧 포효와 함께 곰이 소녀를 향해서 거칠게 달려들었다.

소녀가 막대를 치켜들었다. 막대를 감싸고 푸른빛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코앞까지 다가온 곰의 정수리를 향해서 막대를 내리쳤다.

그 일련의 행동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지만 벌어진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곰의 몸체가 푹 꺼지며 땅바닥에 쿵 쓰러졌다.

소녀는 일격에 즉사한 곰을 빤히 바라보다가 근처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서 주저앉았다.

다시 좀 전의 나른한 얼굴로 돌아온 소녀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음."

***

군주성으로 무사히 귀환하고서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은 아셸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실종돼있을 동안 여간 안위를 걱정했었는지 내 모습을 보자마자 경악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걱정을 끼쳤구나. 나는 멀쩡하니 안심해라."

"예, 예······ 한데 대체 무슨 일이······."

아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좀처럼 차분함을 되찾지 못하고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아셸이 마지막으로 본 내 모습은 디트로데미얀의 공격에 당해 사라진 광경일 테니 이런 격한 반응도 이해는 됐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자."

성의 복도 한가운데였기에 나는 우선 아셸을 데리고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해주었다.

디트로데미얀의 능력에 당해 세인테아의 변방에 강제 텔레포트된 것,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원마들과 조우한 것까지.

딱히 숨겨야 할 부분은 용사의 존재에 대한 것 말고는 없었다.

사실 용사에 대한 것도 아셸이라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빼고 설명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그러셨군요. 그 마족의 공간계 능력에 휩쓸리셔서 그런 일이······."

설명을 모두 들은 아셸이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용케도 띠용이를 데리고 군주성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싶었다.

띠용이는 와이번의 종족 특석상 나와 함께 타는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등에 태우지 않으니까.

아셸이 나름의 인정을 받은 건지, 아니면 영리한 녀석이라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안 건지는 모르겠다.

"내가 사라지고 난 뒤의 상황은 어땠느냐?"

"예, 그러니까······ 숲 이곳저곳을 하루 정도 더 살피다가, 곧바로 군주성으로 귀환했습니다."

"그 대군주 측의 정보원은?"

"그 자와는 따로 갈라져서 이동했습니다. 아마 대군주성으로 복귀했을 겁니다."

아셸이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빨리 론 님의 행방을 확인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아니다. 네 판단은 적절했다."

아까 집사장에게 대충 이야기는 전해들었다. 아셸이 대군주에게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는 걸.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겼으면 그나마 기대볼 수 있는 인물은 대군주뿐이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으니 대군주에게 소식은 이미 닿았을 듯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디트로데미얀과 관련된 건은 숨길 수 없었을 테고, 확실하게 감추면 될 건 용사의 존재뿐이었으니.

만약 내가 용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대군주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만큼은 조금도 예상이 안 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게임에서의 대군주는 용사에게 묘한 호감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칼데릭이 세인테아를 치지 못 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 속을 알 수 없는 괴물에게 용사에 대한 걸 들켜서 좋을 건 일절 없을 것이었다.

"······."

나는 아셸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드디어 계승자 찾기였다.

나는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여정을 아셸과 함께 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셸."

"예."

"이전에 내가 고대 유적에서, 내 목표에 대해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아셸이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예, 대륙의 평화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가 그 본격적인 시작점이다. 네 의지는 그때 들려줬던 대답과 여전히 변함이 없느냐?"

아셸은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기꺼이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었다.

아셸이 당연하다는 듯 굳센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론 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함께하겠습니다."

성검의 계승에 관한 사실은 이 대륙의 명운이 걸린 일인 만큼 극비 중의 극비.

사실 굳이 아셸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하고 직접적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언제나처럼 내 명령에 순순히 따라줄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하고 있는 일을 숨긴 채 이용하듯 힘만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아셸을 절대적인 아군으로서, 소중한 동료이자 부하로서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내 궁극적인 목표를 확실히 밝혀도 되지 않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셸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이동할 곳이 있다. 따라오거라."

***

외출용 로브를 뒤집어쓰고, 군주성에서 나와 아셸과 함께 향한 곳은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고급 여관이었다.

내일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이곳으로 찾아오겠다고 용사와 말을 해두었다.

찾을 것도 없이 용사는 여관의 1층 홀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찾아왔군."

용사가 수프를 뜨던 스푼을 내려놓고 내 뒤쪽에 선 아셸을 힐끗 바라봤다. 아셸도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용사를 바라봤다.

나는 여관 홀을 한 차례 슥 둘러보고서 말했다.

"마저 식사부터 하지."

"아니, 괜찮다. 방은 잡아뒀으니 위로 올라가지."

아직 음식이 남았지만 용사는 바로 식사를 마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기로 용사는 딱히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몸일 것이다. 성검의 힘을 빌린 용사는 반쯤 초월자나 다름없다.

다만, 게임의 대사에서 그녀가 이런 자잘한 일에 권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곧장 위층의 방으로 올라가서 용사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방 주위에 용사의 마력이 퍼지는 게 느껴졌는데,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는 걸 차단한 듯했다.

"너도 여기 앉아라, 아셸."

아셸이 자리에 앉지 않고 뒤쪽에 서려고 하길래 옆자리에 앉혔다.

나는 본론을 꺼내기 전에 우선 아셸부터 소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용사가 먼저 물었다.

"그 자는 누구인가?"

의아함과 경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계승자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인데, 말한 적 없는 낯선 인물을 데려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셸 그론힐트, 내 호위다."

나는 용사에게 말했다.

"앞으로 할 일들은 그녀 또한 함께할 것이다. 큰 도움이 될 인물이다."

"······협력자는 7군주 그대뿐이 아니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만 염려할 건 없다. 내가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이니까. 그리고 계승에 대해서 알 자는 이걸로 이제 끝이다."

용사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 아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으로 날 돌아봤다.

나는 그녀에게도 용사의 정체를 밝혔다.

"아셸, 이 자는 세인테아의 용사다."

"······예, 예?"

아셸이 방금 전보다 훨씬 놀란 기색으로 용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짜고짜 이렇게 소개해도 상황 이해가 전혀 되지 않을 거란 건 알았다.

"아셸,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나는 아셸에게 미뤄뒀던 설명을 그제야 해주었다.

성검에 대한 것, 성검의 계승에 대한 것, 그리고 용사와의 협력 관계를 맺은 것까지.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할수록 아셸의 표정은 다양하게 변했다.

"······."

모든 설명을 듣고 난 뒤, 아셸은 맞은편의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혼란스러움이 담겨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이······ 정말 세인테아의 용사입니까?"

어딘가 묘하게 적의가 느껴지는 음성.

나는 이내 그런 아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면 아셸에게 있어서 세인테아 소속의 인물은, 특히 용사라면 호의적일 수가 없었으니까.

용사 역시도 그것을 느꼈는지 의아한 기색으로 아셸을 바라봤다.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던 아셸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백월족의 생존자입니다. 세인테아에 의해 멸족당한."

"······!"

그 말에 용사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용사 역시도 황실이 저지른 그 끔찍한 만행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이야기에 끼어들어야 되나 생각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이것도 풀고 가야 할 문제이기는 했다.

"항상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용사, 당신은 세인테아 황실이 저지른 백월족 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아셸은 순간 울컥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아셸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알고서도 황실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는 거군요. 맞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당시의 나는 세간과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 있었습니다. 하여 그 참변에 대해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

"아셸 그론힐트 경, 이게 당신에게 있어선 분명 경멸스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가 아셸을 향해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용사는 단지 그렇게 사과의 말을 전할 뿐이었다.

그건 어떤 말을 더 하기도 죄스럽기에 그 한마디만을 건넨 것처럼 보였다.

아셸이 아무 말도 없자,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든 용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일족을 학살한 배후는 황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데 당신도 그걸 안다면 어째서."

그걸 알고 있다면 어째서 황제를 가만히 놔두냐는 뜻이었다.

그에 용사가 면목이 없다는 듯한,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은, 나는 황제에게 그가 저지른 악행들에 대해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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