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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21화 (120/189)

귀환

용사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건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해냈다. 첫걸음은 나아간 셈이다.

당장은 용사도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일단은 인연을 만들었다는 게 중요하니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그녀와 함께 성검을 계승할 계승자를 찾는 것.

나는 계승자가 위치해있는 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세인테아 동부의 라몬 대산맥.'

그 산맥의 아주 깊숙한 곳, 어딘가.

게임에서의, 그러니까 몇 년 뒤 미래의 스토리의 중반쯤부터 우연한 계기로 유저와 만나서 모험을 함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료로서 계승자와 가까워지며 자연스레 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것들을 알게 됐고, 그중에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껴있었다.

그 정보들을 토대로 추측하면, 현시점에서의 계승자는 라몬 대산맥 어딘가에서 세간과 동떨어져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맞다고 해도 찾으려 든다면 산맥 전체를 뒤져야 하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내야만 했다.

이 세상의 명운이, 미래의 내 안위와 목숨이 달려있는데 이것저것 가릴 게 있겠나?

용사는 찾았으니 이제 계승자만 찾아내면 종말을 막기 위한 한걸음을 다시 한 번 크게 나아갈 수 있다.

그래도 용사의 도움을 받는다면 나 혼자 찾는 것보다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계승자를 찾아도 가장 큰 관문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용사와 성검 계승의 조건에 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네.

뭐, 그건 계승자를 찾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부상은 어떤가?"

수도원 뒷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용사였다.

카고스에게 입은 부상은 용사가 치유해주었다. 이 수도원에서 머물게 된 디트로데미얀에게 입었던 내상까지도 말끔히.

그녀의 치유 능력은 엘릭서와 비교하더라도 그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었다. 전부 성검의 힘이었다.

"덕분에 전부 회복되었다."

내게 이야기를 모두 듣고 제안을 받아들인 용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어딘가로 사라져있다가 지금 나타난 참이었다.

용사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대체 왜 이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었던 거지? 듣기로는 이미 부상으로 신세를 지고 있었다는데."

나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칼데릭의 군주가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는 그녀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대는 그 엘리카라는 소녀가 마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건가?"

자연스러운 추측이었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나는 어쩔까 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숨길 것도 없으니.

"내가 이 수도원에 온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엘리카가 마의 씨앗이라는 건 원마들의 습격으로 알게 됐지."

"부상을 입었다는 건 뭐지?"

"일전에 디트로데미얀과 접전이 있었다."

"······디트로데미얀?"

"그래, 놈과 전투를 벌이다가 입은 부상이다. 그 과정에서 놈의 공간 능력에 휩쓸려 이곳에 떨어지게 된 거고."

용사가 조금 놀란 듯한 기색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디트로데미얀은 어떻게 됐지?"

"죽었다."

"그렇군."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디트로데미얀과 싸운 건지까지 캐물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 수도원은 어떻게 할 건가?"

뒷처리에 대한 문제를 묻자 용사는 순순히 대답했다.

"우선 교황령에 알리고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계속 이곳에 남아서 생활하게 할 수는 없으니."

이미 이 수도원은 마족들, 그것도 원마들에게 인지되었다.

당장 마의 씨앗을 탈취하기 위해 습격한 놈들은 물리쳤지만 이미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용사가 수도원의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처사였다.

"엘리카는?"

"그 아이가 품고 있던 씨앗은 이미 처리했지만, 혹시 모르니 더 안전에 신경을 써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전부 해결되면 바로 계승자를 찾아서 떠나도록 하지."

그 뒤로 나는 바로 떠나지 않고 더 수도원에서 머물렀다.

사람들을 보호할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는 용사는 계속 이곳에 남아있을 거라 했기 때문이다.

섣불리 떠났다가 다른 마족들이 또 수도원에 찾아오기라도 하면 끔찍한 대참사였으니까.

물론 서열 3위 원마인 카고스까지 당한 마당에 또 다른 원마들이 섣불리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놈들이 만약 카고스의 죽음을 인지했다면 그건 아주 높은 확률로 용사에게 당한 거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용사가 그 혹시 모를 가능성까지 결코 가볍게 넘길 리가 없었다.

용사를 두고 나 혼자서 먼저 떠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나도 그때까지 더 수도원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수도원 사람들을 데려갈 병력이 온 건 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80레벨대의 광휘의 기사 몇 명과 그 밖의 고레벨의 성기사들 수십.

그리고 교황령뿐만 아니었다.

'검성 세리오드······.'

나는 용사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건물 창가에서 바라봤다.

권성이나 창성과 더불어 세인테아 오성의 일인, 검성. 저 자가 직접 왔나?

검성은 오성 중 유일하게 황실에 부정적이고 용사에게 친밀한 인물이었다.

"그럼 맡기겠습니다, 세리오드 공. 경들께서도 수고해주십시오."

"예, 용사님."

교단의 병력뿐 아니라, 검성에 더해 황실의 병력까지 오며 상상 이상의 엄청난 병력이 수도원에 집결되었다.

원마에 관련된 문제고 용사가 직접 지원을 요청했을 테니 놀랄 것도 없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당분간은 이들이 조사를 겸해 이곳 로자리엘 수도원과 인근 마을의 보호를 맡는다고 했다.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앞으로의 처사가 아직 결정되지는 않은 듯했다.

대피가 최선이라면 최선이었지만 이 수많은 사람들을 무턱대고 대피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니까.

애초에 마족의 습격을 인지한 사람들도 극소수고, 앞으로의 상황을 더 지켜보며 결정할 듯했다.

다만, 엘리카만큼은 철저한 호위 아래 교황령으로 이송하기로 했다.

용사가 마의 씨앗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그녀만큼은 어정쩡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으니까.

엘리카 역시 설명을 듣고 순순히 수도원을 떠나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제르엘 경의 제자가 되기로 했어요."

"그러냐. 잘 됐군."

엘리카는 떠나기 전 나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결국 제르엘의 제자가 되기로 한 거나, 다른 두 친구들까지도 어떻게 함께 교황령으로 가기로 한 거나.

"정말로 감사했어요. 저와 제 친구들을 지켜주셔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사 인사였다.

엘리카는 나에 대한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담백한 감사만을 전했다.

제르엘이나 엘리카나 그녀의 친구들이나, 내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함구를 부탁해두기는 했다.

어쨌든 짧은 인연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앞길이 더는 이런 일에 휩쓸리지 않고 순탄하길 빌어주었다.

상황이 정리된 후에는 나도 곧바로 용사와 수도원을 떠났다.

용사가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를 한 차례 둘러보고서 입을 열었다.

"우선 엔록으로 향하겠다고 했었지."

"그래."

일단 아셸을 만나는 게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설마 디트로데미얀과 일전을 벌인 장소에 아직까지 남아있지는 않겠지.

그녀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파악할 수가 없으니 일단 군주성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대군주한테만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 장소에는 마탑주에게 쫓기던 대군주의 수하도 함께 있었으니 아셸이 아니더라도 알려지는 건 별 수 없나?

대군주가 연결 고리를 찾아내서 이곳 수도원의 일까지 파악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성검에는 텔레포트 능력도 존재했지."

내 물음에 용사가 나를 돌아봤다.

용사는 성검의 권능으로 마법으로도 힘든 대부분의 일들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텔레포트라거나, 폴리모프라거나.

"그렇다."

"여기서 엔록으로 바로 이동할 수는 없나?"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힘들 것 같군. 내가 설정해둔 지점이 아니면 텔레포트는 할 수 없다."

음, 성검의 권능에도 텔레포트 마법처럼 제한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난감해져서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지금의 내게는 엔록까지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니까. 띠용이도 없고.

용사라면 맨몸으로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슬쩍 용사의 눈치를 보고서 말했다.

"여기서 엔록까지 지체하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다."

"동의한다.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게는 당신만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용사가 두 눈을 깜박였다.

왜 갑자기 초재생을 찾으러 갔을 때 아셸에게 업혀서 절벽을 올랐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상황이 비슷하긴 했다.

"그런가. 알겠다."

용사는 바로 내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어쩌려는 걸까 하는데 그녀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황금빛의 기운이 뭉쳐지더니 내 주위에 장막을 생성했다. 그리고 공중에 내 몸을 저절로 띄웠다.

"이대로 비행해서 이동하겠다. 엔록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

나는 장막 안에 둥둥 뜬 채 발밑을 내려다봤다.

뭔가 모양새가 좀 이상하기는 한데······ 뭐, 이게 업히는 것보다야 나은가.

이어서 공중에 떠오른 용사가 하늘 높이 쏘아지듯 날아올랐다. 내 몸도 자석에 끌어당겨지듯 저절로 그 뒤를 따라갔다.

비행 속도는 띠용이를 탄 것보다도 훨씬 빨랐다. 말한 대로 이대로면 엔록까지는 금방일 듯했다.

***

엔록에 무사히 도착했다.

용사는 굳이 군주성까지 따라올 이유가 없었기에 다시 만날 때를 정하고 도시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내 물음에 용사는 곧바로 외모를 바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머리칼과 눈동자의 색이 뒤바뀌고 이목구비나 안면의 형태도 바뀌었다.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이었다.

그렇게 나는 도시에 들어간 뒤 용사와 헤어지고 홀로 군주성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집사장이 나와서 나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군주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가 어째서인지 굉장히 놀란 기색이었기에 물었다.

집사장이 대답했다.

"예, 그게······ 아셸 님께서 얼마 전에 성으로 홀로 귀환하셨는데, 말씀하시길······."

그 말에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셸이 다행히 군주성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집사장에게는 대충이나마 사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냥 완전히 숨겼다면 좋았겠지만 위치가 엇갈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나는 곧바로 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의 기척이 가까워지더니 성 입구의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반가운 얼굴을 보고서 걸음을 멈췄다.

아셸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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