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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20화 (119/189)

용사 (2)

용사는 경악하다 못해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성검의 가장 거대한 비밀이 남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으니까.

계승과 관련된 사실은 칼데릭의 대군주도, 마족 원마들도, 용사를 제외한 대륙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 하는 사실이었다.

"······!"

갑작스레 용사에게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살의는 아니지만 적의에 가까운 위압감.

제왕의 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살이 떨릴 정도의 가공할 기운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아무리 9성급 스킬인 제왕의 혼이라도 99레벨인 용사를 상대로는 완전히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 건가?

"어떻게······."

용사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격양된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설명해라, 7군주. 어떻게 그대가 계승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질 듯한 오싹한 기세가 공간을 짓눌렀다.

마치 사방이 칼날로 둘러싸인 심판대에 오른 듯한 기분이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왜냐면 내 목적은 순수히 용사에게 조력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용사와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답하기 곤란할 질문에 답하지 않을지언정 나는 진실만을 말할 것이고, 용사는 권능으로 그 사실을 알 것이다.

"우선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말해두지."

나는 팔짱을 끼고서 용사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어떻게 당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성검의 비밀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지, 그 의문에만큼은 답해줄 수 없다."

"······."

"하나 내 모든 걸 걸고 맹세컨대, 의문에 답해줄 수 없는 이유는 별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말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고, 어차피 당신은 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용사의 눈매가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뭔 헛소리를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일단 내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건 알겠지.

"납득하기 힘든 소리를 하는군. 제대로 질문에 답해라. 이건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일단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겠나?"

"······."

"이 자리의 주도권은 온전히 당신에게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대로 내 목을 베어버리면 돼. 그건 이야기를 듣고서 해도 늦지 않는 일 아닌가?"

나는 일부러 내 목숨까지 들먹이며 세게 말했다.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지만 용사의 성정이 어떤지 알기에 할 수 있는 허세였다.

그녀는 결코 무고한 이에게 함부로 해를 가하지 못 한다. 그렇기에 용사였다.

내가 끝까지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목숨으로 협박하거나 목을 베어버리려고 들지는 않으리라.

"······."

용사는 고뇌 깊은 기색으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이야기를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여기까지는 순조롭다.

용사와의 이 대화는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작점.

그녀를 설득하냐 설득 못 하냐에 따라서 미래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말했다시피, 나는 성검의 계승에 대해서 알고 있다."

"······."

"그리고 마왕과의 전투의 후유증으로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계승자를 찾아내서 성검의 힘을 계승해야만 하지."

용사의 표정이 아주 조금 더 굳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있어 치명적인 비밀들을 속속들이 밝히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입을 열지는 않고 가만히 경청하기만 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단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겠다는 태도였다.

질질 끌 것도 없었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계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내 폭탄 선언에 용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한 그대로다. 나는 당신이 찾고 있는 성검의 계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성검의 계승자.

계승자에 대해 현시점에서 용사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종족도, 성별도, 나이도, 그 무엇도.

단지 성검으로부터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계승자를 찾으라는 계시만을 받았을 뿐.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라사를 플레이한 나는 계승자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

그 정보가 바로 이 대화에서 용사를 설득할 절대적인 카드였다.

그녀는 지금도 시간에 쫓기며 초조함 속에 계승자를 하염없이 찾고 있는 처지였으니.

"믿을 수 없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용사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성검의 계승자가 누구인지를, 그대가 알고 있다고?"

그러면서도 용사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기색이었다.

왜냐면 이 말이 진실이라는 걸 그녀는 알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다."

"대체 어떻게······."

"그에 대해서만큼은 답해줄 수 없다고 이미 말했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나에게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으라는 건가?"

"당신은 믿을 수밖에 없을 텐데. 내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나?"

용사는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내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군."

"다시 말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성검의 계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뿐이지."

나는 용사의 기색을 힐끗 살폈다.

좀 전보다는 확실히 평정이 흐트러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이제 알겠나? 나는 당신이 무엇보다도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

"그리고 이건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있기에 거래의 목적 따위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용사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내가 계승자를 찾는 것을 돕겠다.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것뿐이다."

용사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 역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당혹스럽군."

용사는 그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내 의도를 가늠하듯 눈매를 좁혔다.

갑자기 돕는다고 해봐야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건 당연했다.

나는 그녀의 아군도 아니고, 세인테아의 소속도 아니며, 아까 전까지는 생전 관련도 없던 외부인일 뿐이었으니.

심지어 보통 인물도 아니고 칼데릭의 군주다. 용사를 도울 이유가 하등 없는, 오히려 적대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위치의 인물.

하지만 나는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결백했다.

내가 용사를 도우려는 것에는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끼어있지 않다.

그리고 그거면 됐다.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은 이런 상황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두터운 신뢰의 고리였다.

"맹세하지. 당신에게 조력하겠다는 것에는 그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없다."

"그러면 대체 나를 돕겠다는 이유가 무엇이지?"

"당신과 나의 목적이 일치하니까. 나는 대륙의 평화를 원하고, 그를 위해서는 용사인 당신에게 조력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수단이니까."

그래, 최선의 수단.

가까운 미래에 있을 마족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최선의 수단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대로면 마왕의 부활은 반쯤 확정적이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마족들의 본진으로 넘어가서 마왕의 부활진을 파괴하는 것뿐인데,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 용사가 뭐 하러 시간을 낭비하며 계승자를 찾고 있겠는가?

마왕은 봉인당했어도 마족들은 여전히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

놈들이 현재 얌전히 웅크려있는 것은 신중을 기하여 이번에야말로 과거와 달리 완벽한 승리를 이뤄내기 위함이다.

용사는 시한부인 상태로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간신히 맞추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만약 용사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긴 했겠지만······.'

어쨌든 용사도 할 수 없는 일을 나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능했다면 다른 계획도 세워뒀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유일한 길은 이것뿐이었다.

부활한 마왕을 막으려면 반드시 용사가 있어야만 한다. 오로지 용사만이 마왕을 막을 수 있다.

마왕에게는 과연 내 즉살 능력이 통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유일무이한 10성급의 스킬이라고 하더라도 세계관의 최종 보스에게까지 통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믿고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건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최선이지.'

불투명하고 변수 천지인 미래에 대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생각이다.

바로 이게 그 첫걸음이었다.

"······."

용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을 내보일 뿐이었다.

"그대가 바라는 게 대륙의 평화라고?"

"그래. 칼데릭의 군주가 평화를 원한다고 하니 이상한가?"

나는 좀 더 솔직하게 말했다.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게 없다. 나는 마왕이 부활하면 오직 성검의 힘을 지닌 용사만이 그것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마왕을 막지 못하면 이 대륙이 끝장날 텐데, 내가 아무리 칼데릭의 군주라고 해도 세상의 멸망을 바라겠나?"

사실 내게 있어 세상의 구원 같은 거창한 대의 따위는 없었다.

일단 이 세상이 무사해야 내 목숨줄도 무사할 게 아닌가? 그러니까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발악할 수밖에 없지.

"······그런 건가."

어쨌든 용사는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는 납득한 기색이 되었다.

완전히 신뢰를 얻지 못 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중요한 건 용사와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계승의 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급한 건 용사였다.

단지 미심쩍음만으로 그녀는 결코 내 제안을 무시하고 가볍게 넘길 수 없을 것이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말했다시피 나는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니고, 바란다면 지금 당장 정보를 공유하겠다."

"······!"

"나도 계승자의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계승자를 찾기 위해서는 제법 시간이 걸릴 거야. 물론 당신이 돕는다면 시간이 더 단축될 수는 있겠지."

할 말은 이걸로 끝이었다.

"이제 대답을 들려줬으면 좋겠군, 용사. 나와 협력해서 계승자를 함께 찾겠나?"

남은 건 용사의 결정뿐이다.

용사에게 있어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갑작스러울 것이기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차분히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계승자를 찾는 것에 그대도 동행하겠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만 건네주고 강 건너편에서 지켜볼 생각은 없다. 이건 내게 있어서도 나름 간절한 문제니까."

"······."

"만약 내 개입이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함께 협력하여 계승자를 찾는 것,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조건으로 하지."

계승자에 대한 정보만 용사에게 건네주는 건 아무리 그래도 좀 그랬다.

나도 돌아가는 상황을 직접 지켜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계속 짜야 될 테니까.

물론 용사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한참의 침묵 뒤에 용사의 입이 열렸다.

"······좋다."

그녀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7군주, 그대와 협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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