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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19화 (118/189)

용사 (1)

내 정체를 듣고도 용사는 의외로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의아하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칼데릭의 7군주?"

나는 그녀가 칼데릭의 군주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를 의아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칼데릭의 7군좌는 비어있는 자리가 아니었던가?"

용사는 칼데릭에 새로운 7군주가 즉위했다는 사실부터 아예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대체 왜 모르나 싶었지만 이내 이해했다.

'설마 이제 막 성동에서 나온 건가?'

저번에 중립국 회담 때 모습을 비추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용사가 성동에 있을 거라고는 짐작했었다.

성동은 세간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된 용사의 회복만을 위한 공간.

만약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이곳으로 온 거라면 충분히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칼데릭에는 이미 1년 전에 새로운 7군주가 즉위했다."

용사가 빤히 나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이곳에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인가?"

······그게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용사가 여기까지 온 게 당연히 우연 따위는 아닐 테고, 이곳 수도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전부 파악하고 온 것일 터.

나는 잠시 말없이 용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때 한편에 있던 제르엘이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용사에게 말했다.

"용사님, 그 자는······ 마족들에게서 저희를 지켜주려고 했습니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르엘은 혼란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내 편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용사가 상황을 오해할까봐 나선 모양이었다.

칼데릭과 세인테아는 결국 적국이나 다름없는 관계, 이 상황에 내 정체만 듣고 목을 베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

하지만 나는 그런 걱정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용사가 얼마나 선하고 공명정대한 인물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내가 칼데릭의 군주라는 말만 듣고 색안경을 쓸 리는 없었다.

그래서 별 망설임 없이 내 정체를 밝힌 것이기도 하고. 애초에 숨기는 게 의미가 없기도 했지만.

"내가 이곳에 온 건 순전히 우연이다. 이 수도원에 암약하고 있던 마족들의 존재 또한 몰랐다."

나는 거짓 하나 없이 솔직하게 내 입장을 먼저 밝혔다.

물론 믿을 수가 없는 말일 것이었다.

세인테아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수도원, 그것도 마의 씨앗이 숨어있던 장소에 칼데릭의 군주가 우연히 왔다니.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겠지.'

용사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용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권능들 중에는 대군주의 능력과 비슷한 것 또한 있었으니.

말의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 성검의 능력 중 하나다.

그러니 지금 내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건 그녀도 알 것이었다.

"······."

잠시 침묵하던 용사가 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던 엘리카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직 제 친구를 못 구했어요. 숲 어딘가에······."

그에 제르엘도 아차 싶은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마족들이 수도원의 아이 둘을 납치했습니다, 용사님. 아마 이 숲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르엘의 낯빛에는 어둡게 그늘이 진 게 느껴졌다.

아마 아직까지 아이들이 무사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서 그렇겠지.

어쨌든 생사 여부는 알 수 없어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 하리라.

고개를 끄덕인 용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폐허가 된 숲의 한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파앗!

용사의 모습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그리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돌아온 그녀의 팔에는 두 소년이 짊어져있었다.

"······톰!"

톰의 얼굴을 확인한 엘리카와 헤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톰과 다른 한 소년은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숨은 정상적으로 쉬고 있었다.

용사가 두 소년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안심하거라."

"어, 어디서 이들을 발견하셨습니까?"

"줄기 같은 것에 몸이 파묻혀서 생명력을 빼앗기고 있더군요. 아마 마족의 사역마였을 겁니다."

마족들 중에 생명력을 양식으로 삼는 놈들은 넘치도록 많았다.

아마 이곳의 원장이 숲에 사역마를 숨겨두고 종종 사람들을 먹이로 준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군.

그때 걸음을 옮겨 말라비틀어진 원장의 시체의 곁으로 다가간 용사가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그것은 검은빛을 띄고 있는 보석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저건······.'

나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족들이 마의 씨앗을 찾을 때 사용하는 물건.

수많은 마족들이 마왕의 부활을 위해 은밀하게 마의 씨앗을 찾고 있고, 그들에게 힘을 받은 계약자들 또한 마족의 명령으로 마의 씨앗을 찾는다.

격이 낮은 마족이나 마족의 계약자들은 마의 씨앗을 봐도 인지할 수 없기에 저 물건의 힘을 빌려 구분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장은 어쩌다 우연히 엘리카가 마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원마들까지 온 게 아닐까 싶었다.

원장이 원마들과 직접 연결선이 닿아있었던 건 아닐 거다. 그렇게 강한 자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려 마의 씨앗이니 원장에게 힘을 준 마족이 직접 원마들까지 불러온 것이겠지.

사아아.

용사 또한 보석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용사는 보석을 잠시 살펴보다가 그대로 파괴해버렸다.

황금빛의 기운에 휩싸인 보석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보석을 파괴한 용사는 다시 걸음을 옮겨 엘리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정신을 잃은 톰을 살펴보고 있던 엘리카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용사의 손에 황금빛이 뭉쳐지더니 다시금 성검이 나타났다.

갑작스레 검을 꺼내드는 그녀의 모습에 옆에 있던 헤런이 화들짝 놀라서 엘리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시는······."

"괜찮다. 네 친구를 해하려는 게 아니다."

용사가 부드러운 손길로 헤런을 옆으로 밀어내고서 엘리카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엘리카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화아악!

성검이 번쩍임과 함께 신성한 기운이 엘리카의 몸을 휘감았다.

나는 용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했다. 성검의 권능으로 마의 씨앗을 제거하는 것이리라.

헤런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엘리카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어쨌든 이것으로 상황은 대충 정리된 듯했다.

원마와 마족들은 모두 죽었고, 실종된 두 사람도 무사히 구했다.

용사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아직 내게 물어볼 것들이 많이 남아있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용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앞으로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이런 식의 만남은 전혀 상상하지 못 하긴 했지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용사,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

일단 숲에서 빠져나와서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수도원으로 돌아가니 뒷마당에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모여있었다.

그들은 숲에서 빠져나온 우리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랐다.

원마들과의 전투로 거의 숲 전체가 뒤집어졌으니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도 모를 수가 없던 까닭이었다.

"······톰, 렉스!"

"모두 무사했구나!"

수녀 몇몇이 아이들을 보고서 다급히 달려왔다.

성기사들이 얼빠진 얼굴로 제르엘에게 물었다.

"제르엘 경······ 숲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수도원의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정리하는 건 제르엘의 몫이었다.

수도원장이 죽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완전히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수도원장이 마족의 계약자였던 것, 숲에서 원장에게 힘을 준 마족이 나타나서 습격했다는 것, 그렇게 마족과 전투를 벌인 것.

마족들이 엘리카를 노린 거나 원마들에 대해서는 제르엘도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마의 씨앗은 그도 아는 게 없는 완전히 무지한 부분이었다.

"워, 원장님이 마족의 계약자셨다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숲에서 아이들을 납치한 것도 원장이 부리던 사역마의 소행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했다.

원장은 수도원 사람들에게 신뢰와 덕망이 굉장히 높았던 것 같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성직자들은 누구보다도 마족들을 혐오하고 멸시하는 이들이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원장이 더러운 마족과 계약한 타락자라는 건 그들에게 당연히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숲에 수도원장의 시체가 있습니다. 자세한 건 교황령에서 사람을 더 파견하여 조사하겠지만, 일단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제르엘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몇 명이 용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분께서는······?"

용사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자 제르엘이 적당히 얼버무렸다.

하늘에는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분위기가 얼추 진정되고 사제 몇 명이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갔다.

제르엘은 성기사들과 함께 다시 숲으로 들어가서 마저 뒷정리를 하고, 나는 용사와 함께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앉지."

용사를 내가 머무는 방으로 데려왔다.

대화를 나누기에 딱히 마땅한 장소가 이곳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용사는 방을 한 차례 슥 둘러보고선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다시 한 번 소개하지. 나는 칼데릭의 7군주 론이다."

"그래."

용사가 짧게 대꾸했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한 건 나였으니 일단 말을 듣기만 하겠다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어떠한 기세도 풍기지 않고 있었지만 단지 쳐다보는 눈빛만으로 압도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대군주와도 비교되지 않는 수준의 위압감이.

나는 할 말을 정리하고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소녀가 품고 있는 마의 씨앗은 처리했나?"

내 물음에 용사의 눈매가 좁아졌다.

마의 씨앗에 관하여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용사와 원마들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용사는 성검의 권능으로 마의 씨앗을 파괴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하는 일들 중에는 마의 씨앗을 품은 인물들을 찾아내서 파괴하고 마족들로부터 보호하는 것 또한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건지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떻게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지?"

나는 그 의문에는 답해주지 않았다.

답해줄 수도 없는 질문이고, 알려준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대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용사, 나는 당신의 목적과 염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도."

"······."

내가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계속 내 할 말만 하자 그녀는 조금 언짢은 기색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한편으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용사의 목적, 그것은 용사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용사가 성검과 맺은 일종의 계약이자 금기였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 한 채 혼자서 모든 것을 해온 것이고.

"계승자."

"······!"

이어진 내 말에 용사가 경악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원마 셋과 싸울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무표정한 얼굴에 순식간에 금이 갔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성검을 계승할 인물을 찾고 있지.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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