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18화 (117/189)

조우 (17)

금발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여인.

여인의 모습은 평범했다.

그저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던 여행자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이질적인 광경.

나는 여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그녀에게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신성함을 느끼며.

【Lv. 99】

······카고스의 중얼거림이 아니더라도, 여인의 정체는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본 순간 곧바로 깨달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만한 레벨의 존재는 마왕을 제외하고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용사, 에인델.

마왕의 목을 벤 영웅이자, 라사 세계관의 공식적인 최강자.

"마, 말도 안 돼······."

귓가에 들려온 위태롭게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아카슐라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더없이 여유로웠던 그녀의 안색은 회색빛 피부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메빌로스 또한 충격에 빠진 얼굴로 용사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충격스러운 건 놈들뿐만 아니라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으니까.

대체 어떻게 용사가 이곳에 나타난 거야?

용사의 황금색 눈동자가 세 원마와 나,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일순간 숲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으키려던 몸에 힘을 빼고서 도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동시에 느끼는 건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용사가 이곳에 어떻게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지금부터 그녀가 무엇을 할지만큼은 명백했으니까.

"메빌로스, 아카슐라, 카고스."

이윽고 정적을 깬 용사가 원마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입에 담았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아카슐라가 공포에 질린 기색으로 몸을 떨었다.

"그 질긴 목숨들을 아직까지 잘 연명하고 있었구나."

카고스가 분노와 여러 감정들이 뒤섞인 눈으로 용사를 노려봤다.

"가증스러운 인간이······!"

용사가 마왕을 봉인시킨 대전쟁.

그때 수많은 마족들이 용사의 손에 죽었고, 원마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현 시점의 원마들은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거나, 전쟁이 끝난 후에 새롭게 등극한 이들이다.

그리고 카고스를 비롯한 눈앞의 세 원마는 모두 용사의 힘을 뼈저리게 겪은 원마들이었다.

그렇기에 놈들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고, 자신들이 이곳에서 살아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거라는 걸.

"대체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네년은 성동에······."

메빌로스의 물음에 용사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놈이 초조하기 그지없는 기색으로 바로 옆에 떠있는 엘리카를 바라봤다가, 카고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울렁!

메빌로스의 주위 허공이 파도처럼 물결이 치며 갈라졌다.

놈이 몇 번이고 보여준 공간 전이의 능력이었다.

그 순간 황금빛의 실선이 벌어진 공간을 섬전처럼 세로로 쩍 갈라버렸다. 벌어졌던 공간은 그대로 흐물흐물 소멸해버렸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용사의 손에는 어느새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는 검이 쥐여있었다.

'······성검!'

나는 나지막한 탄성을 뱉었다.

마왕을 봉인시킨 신성한 검, 발로티아.

성검에서 발해지는 신성함은 원마들이 뿜어내고 있던 불길한 기운을 모조리 압도하고 파묻어버렸다.

번쩍!

이어서 용사가 손을 뻗자 일대에 반구 형태의 광범위한 결계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그뿐만 아니라 메빌로스의 수중에 있던 엘리카의 몸에도 황금빛의 장막이 둘러졌다.

메빌로스가 황급히 그것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장막에 둘러진 엘리카는 허공을 가르고서 눈 깜짝할 사이에 용사의 곁으로 자석처럼 끌려왔다.

원마들의 퇴로를 모조리 막아버린 것도 모자라 엘리카의 신변까지 확보한 것이었다.

······이게 성검의 힘인가?

용사가 발휘하는 기운은 단순한 마력 따위가 아니었다.

마력도 신비도 아닌, 그보다 훨씬 격이 높은 초월적인 종류의 힘. 신이 용사에게 내린 성검의 권능이었다.

용사가 정신을 잃은 엘리카를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고선 상태를 살펴봤다.

원마들은 마의 씨앗을 눈앞에서 대놓고 뺏겼음에도 감히 용사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역시 마의 씨앗이었나."

용사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엘리카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용사의 손에서 흘러나온 황금빛의 기운이 엘리카에게로 흡수되더니, 곧바로 그녀의 눈이 뜨였다.

"으음······."

정신을 차린 엘리카가 눈을 깜박이다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옆에 서있는 용사를 발견하고선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봤다.

용사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안심해라, 아이야. 잠시 저쪽으로 물러서있으면 된다."

용사가 제르엘과 헤런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완전히 넋을 놓은 채 용사를 바라보고 있던 제르엘이 그녀의 시선을 받고서 움찔 놀랐다.

"요, 용사님······."

엘리카가 용사가 말한 대로 물러서고, 용사가 이번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느끼며 잠시 동안 용사와 눈을 마주쳤다.

이어서 용사가 손을 휘젓자 엘리카 일행 세 사람과 내 주위에 황금빛의 장막이 생겨났다. 방어막인가?

시선을 거둔 그녀가 다시 세 원마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의 명은 여기까지다."

용사의 선고에 카고스가 이를 빠득 갈며 기운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도주는 포기하고 결국 싸우기를 택한 모양이었다.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으니.

화르륵!

곧 카고스의 몸에 마치 용암 줄기와 같은 시뻘건 결들이 핏줄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놈의 전신과 들고 있는 대검에도 사나운 불꽃이 일렁이며 가공할 열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제 막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 직전의 화산을 보는 것만 같았다.

카고스는 게임에서 보스몹으로 공략해본 적이 있었기에, 저것이 놈의 전력 상태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카고스가 도망칠 것 같으냐! 용사, 너 또한 몸 상태가 전성기처럼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놈이 뿜어내는 열기만으로도 주위의 수풀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놈이 가공할 속도로 용사를 향해서 돌진하며 대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카고스와 용사의 검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퍼진 충격파에 수풀들이 날아갔다.

그러나 용사는 그 일격을 제자리에서 너무도 손쉽게 막아냈다.

"크아아아!"

카고스가 다시금 포효성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놈의 검날에 둘려있는 용암 같은 불꽃이 작열하며 숲을 온통 시뻘건 빛으로 물들였다.

차마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공방.

붉은빛과 황금빛의 기운이 서로 얽혀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렬한 섬광이 연신 폭발했다.

마치 숲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듯, 거대한 두 기운의 충돌에 하늘마저 색이 물들어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보였다.

카고스의 능력은 불꽃이었다.

그 무엇이라도 순식간에 불태워서 재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키는 겁화와 같은 불꽃.

놈의 능력은 게임에서도 어떤 방어기도 통하지 않는, 방어가 불가능한 그야말로 무적에 가까운 스킬이었다.

디트로데미얀의 공간 절단도 간신히 막아냈던 부동 장막이기에, 어쩌면 놈의 불꽃은 부동 장막으로도 막기 힘들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놈의 능력도 용사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용사는 처음과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용사의 신성력은 카고스가 퍼붓는 맹렬한 공세 속에서도 조금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가 이어질수록 점점 수그러드는 건 카고스 쪽의 기세였다.

마치 덮쳐오는 거대한 해일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카고스의 공세는 처절한 발악처럼 보였다.

파아앗!

주위의 공간이 갈라지며 튀어나온 가시들이 카고스를 몰아붙이는 용사를 덮쳤다. 메빌로스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용사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황금빛의 역장에 닿자마자 모조리 소멸해버릴 뿐이었다.

아카슐라도 가만히만 있지는 않았다. 카고스가 당하면 그 다음은 바로 놈들의 차례였으니.

대신 놈은 용사 대신 아이들을 노리려는지 엘리카를 비롯한 세 사람이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접근했다.

그러나 내가 나서기도 전에 용사에게서 빛살처럼 검기가 날아들었다.

검기는 아카슐라의 환영은 무시하고 은신한 채로 아이들에게 접근하던 본체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끼아아악!"

용사의 검격에 아카슐라는 몸은 그대로 양단되었다.

전신이 세로로 쪼개진 아카슐라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황금빛의 불꽃에 타들어가서 소멸해버렸다.

어차피 죽게 될 운명이었지만 쓸데없는 짓을 해서 명을 재촉한 것이었다.

쩌억!

용사의 빈틈을 노리고 있던 메빌로스 또한 어느 순간에 아카슐라의 뒤를 따랐다. 놈의 목에 실선이 새겨졌다.

공격이 날아드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듯, 메빌로스의 머리는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두 원마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죽어버리고, 이제 남은 건 카고스뿐이었다.

"크아아아아······!"

카고스가 마지막 힘을 짜내듯 기운을 폭발시켰다.

그래도 마족 서열 3위인 만큼 꽤 오랫동안 버틴다 싶었다.

하지만 용사가 마음을 먹었다면 놈 또한 진작에 목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97레벨과 99레벨, 수치적으로는 단지 2레벨의 차이라도 그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대한 차이였으니까.

카고스가 치켜든 대검에 화염의 검기가 거대한 기둥처럼 솟아났다.

숲 전체를 단번에 쪼개버릴듯 내리쳐오는 기운에 용사 또한 검을 휘둘렀다.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 일격을.

충돌에 의한 폭발도 없었다. 카고스의 검기는 용사의 일격에 그대로 파묻혀서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카고스의 검 또한 반으로 쪼개지고, 동시에 놈의 갑옷도 쩍 갈라지며 피가 터져나왔다.

"끄륵······."

허공에서 아래로 추락한 카고스가 바닥에 대자로 쓰러진 채 꿈틀거렸다.

이어서 땅에 내려선 용사의 손에서 성검이 황금빛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호흡조차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용사가 카고스의 앞에 섰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린 카고스가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너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의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날 일은 없으니······."

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화르륵!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용사에 대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담담히 마지막 말을 남긴 놈의 몸에서 돌연 불꽃이 피어올랐다.

자폭을 시도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불꽃은 그저 카고스의 몸만을 집어삼킬 뿐이었다.

놈은 그렇게 스스로를 불태워 시체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주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용사가 서있는 모습을 바라봤다.

세 원마를 간단히 처리해버린 용사의 무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잠시 카고스가 불타서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곧 엘리카 일행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으로 용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의외였다.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다 했는데, 제르엘 경이셨군요."

용사의 말에 제르엘은 놀란 기색으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곧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용사님······. 기억해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르엘은 용사와 전쟁을 함께 겪었던 광휘의 기사였던가.

나는 긴장이 풀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나 싶었지만, 설마 용사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대는 누구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용사의 목소리에 퍼뜩 도로 들어올렸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입을 우물거렸으나, 어차피 정체는 드러났기에 숨길 것도 없었다.

"······론."

나는 용사의 질문에 기꺼이 답해주었다.

"칼데릭의 7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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