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16)
예상대로 모습을 드러낸 메빌로스가 공허한 눈빛으로 으로 나를 바라봤다.
비교적 평범한 아카슐라와 달리 놈의 눈은 마치 벌레의 그것처럼 흰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군, 이제 알겠다."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놈이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너는 칼데릭의 7군주였구나."
······알아챘나?
놈은 내가 7군주라는 사실을 확신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정체가 탄로나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내 외관이라거나 능력은 이미 어느 정도 세간에 알려졌을 테니.
아무리 자신들이 최고라고 믿는 오만한 마족들이라도 새로운 칼데릭의 군주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뭐? 칼데릭의 7군주라고? 저 인간이?"
그 말에 아카슐라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여기까지 와서 정체를 들킨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나는 슬쩍 제르엘이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7군주······?"
그를 포함해서 엘리카와 헤런도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못 듣기를 바랐는데 반응을 보니 똑똑히 들은 듯했다.
내 반응을 살피듯 유심히 나를 응시하던 메빌로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 종족이나 외관이나 능력이나 정보와 모두 일치한다."
"흐음······ 근데 이상하잖아? 칼데릭의 7군주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데? 그리고 지금은 아무리 봐도 저 벌레들의 편을 들고 있는 것 같잖아?"
아카슐라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메빌로스도 그건 모르겠다는 듯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내 정체만큼은 확신한 듯했다.
"뭐, 네 말이니 틀리지는 않겠지. 어쩐지 인간 주제에 꽤 성가시더라."
아카슐라가 웃음을 흘리며 날 바라봤다.
나는 놈보다도 메빌로스 쪽을 더 경계하며 살폈다.
아카슐라도 그렇지만 메빌로스의 능력 역시 성가시다.
스물의 원마들 중에서도 특히나 은밀하고 음험한 전투 방식을 지닌 원마.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순식간에 당할 수 있었다.
"칼데릭의 대군주가 어떻게 이번 일에 대해 눈치챈 건지 모르겠군."
메빌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안일했다. 마의 씨앗을 회수하고 싶다면 본인이 직접 움직여야 했을 텐데 말이야."
······놈은 아무래도 내가 이곳까지 온 것이 대군주의 지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말도 그렇고, 내 정체를 알았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카슐라와 메빌로스, 두 원마 역시 군주에 필적할 정도의 강자였다.
단순한 마주침이었다면 놈들도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려 할 수 있었지만, 마의 씨앗까지 걸린 상황이었으니까.
'이제 어쩌지.'
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군주급의 원마가 둘.
전투를 계속하면 명백히 불리한 쪽은 나였다.
도주라는 선택지는 아까부터 머릿속 한편에 미뤄두고 있었다.
놈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건 마의 씨앗이니, 만약 내가 도주를 한다면 굳이 쫓으려 들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었다.
'아니······ 아마 안 쫓겠지.'
놈들도 내 정체는 알았다.
또 방금 전 잠깐의 접전으로 나를 제압하는 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야 깨달았을 것이다.
한 명만 나를 추적하려고 들 것 같지는 않고, 엘리카를 두고서 둘 모두 이 자리를 이탈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내가 대군주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고 착각한 듯하니, 마의 씨앗의 존재를 들킨 거야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
그러니 그냥 세 사람을 포기하고 도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마의 씨앗은 마왕의 부활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이기는 했다.
하지만 단지 시기를 앞당길 뿐이지, 마의 씨앗 하나가 놈들의 손에 들어간다고 해서 마왕이 바로 부활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목숨을 거는 리스크를 지면서까지 당장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
세 사람이 있는 쪽을 다시 돌아봤다.
나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도주라는 선택지는 선뜻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들을 버리면 제르엘과 헤런은 분명히 죽을 것이고, 엘리카는 놈들의 손에 끌려가 제물로서 바쳐지겠지.
어쩌면 이들이 정말 나와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이었다면, 그리고 당장 내 눈앞에 없었다면.
그럼 고민은 했겠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냉정하게 그들을 내버리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지금은 일단 싸워본다.
도주는 정말로 위험하겠다 싶으면 그때 하기로 결심했다.
하나 걸리는 부분은 놈들이 혹시나 세 사람을 인질로 잡으려 할 수도 있다는 거였지만, 그건 일단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칼데릭의 군주인 내가 불리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세 사람을 보호하려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 놈들의 입장에서도 내가 마의 씨앗인 엘리카를 인질로 잡을 수 있다고 신경 쓰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투를 준비하며, 나는 메빌로스를 향해 무심한 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 말대로 대군주도 곧 도착할 테니."
일단 한번 블러핑을 시도해봤다.
당연히 대군주가 이곳에 올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었지만, 놈의 착각을 이용하면 믿을 수도 있었다.
메빌로스의 눈매가 꿈틀 일그러졌다.
놈은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하는 듯이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네놈을 서둘러 처리하고 마의 씨앗을 회수해야겠구나."
······역시 물러설 리가 없나.
그래도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대군주가 오기라도 하면 놈들이 감당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신경을 분산시켰다면 이득이었······.
푸욱!
돌연 섬짓한 기척과 함께, 복부에 격통이 치밀어오른 건 그때였다.
나는 경악한 채 고개를 내렸다.
차마 반응해서 부동 장막으로 막을 새도 없이 붉은 광선이 내 복부를 꿰뚫고 지나갔다.
"······?!"
몸속에 번지는 불길한 마력을 느끼며 나는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광선이 쏘아온 발원지는 어느새인가 메빌로스의 옆쪽에 갈라져있는 공간.
원마 둘을 눈앞에 두고 방심 따윈 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기습해올 걸 대비해서 초감각은 아까부터 최대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방금의 일격에는 차마 반응하는 게 늦었다.
'대체 뭔······.'
······이건 메빌로스의 능력이 아니다.
갈라진 공간이 더 커지며 그곳에서 튀어나온 건 또 다른 마족이었다.
"오셨습니까."
내 모습을 보며 조소를 지은 메빌로스가 새롭게 나타난 마족을 향해서 정중히 인사했다.
아카슐라 또한 방금까지의 경망스러운 모습은 전혀 없이 예의를 갖췄다.
마족은 오로지 힘의 원리로만 돌아가는 족속이었다.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정한 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고개를 숙이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특히나 마족들의 정점에 있는 원마들이라면 그 자존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Lv. 97】
새롭게 나타난 마족은, 그 둘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레벨을 하고 있었다.
97레벨.
대군주 라샤테인과 지하 유적의 고대인을 제외한,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그 누구보다도 높은 레벨.
작열하는 화염처럼 시뻘건 갑주를 입고 있는 거구의 마족이었다.
한 손에 들려있는 건 검신이 몇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대검.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놈을 멍하니 쳐다봤다.
96의 레벨, 그리고 저 특징적인 외관은 놈의 정체를 단번에 깨닫게끔 하였다.
'······카고스.'
마족 서열 3위의 원마.
아카슐라와 메빌로스뿐 아니라······ 놈까지 있었다고?
그제야 나는 내가 단단히 오판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의 씨앗이란 마족들에게 있어 그들의 신의 부활을 앞당길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재료.
단지 적당한 서열의 원마 둘만 나설 정도의 일이 아닌 것이었다.
"마의 씨앗은 여자 쪽이군."
카고스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퍼졌다.
단지 그 한마디만으로 공간이 전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치미는 고통을 견디며 놈을 노려봤다.
놈은 내게 관심도 없다는 듯 세 사람이 있는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원마 셋이 뿜어내는 가공할 압력에 헤런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제르엘은 희망을 완전히 잃고 절망한 얼굴이었고, 엘리카 또한 다를 건 없었다.
"마의 씨앗을 회수해서 돌아간다."
카고스가 그렇게 말하며 쓰러진 나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완전히 마무리를 지으려는 셈이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대로면 정말로 죽는다. 부동 장막이나 공간 도약을 사용해봤자 시간 끌기밖에 되지 않았다.
"잠깐······ 만."
그때 엘리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고스가 잠시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 당신들은 내가 목표인 거잖아요. 그렇죠?"
······엘리카도 스스로 마족들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건 깨달은 듯했다.
그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굉장한 정신력이었다.
"잘 알고 있구나. 너는 마왕님의 부활을 위한 제물로서 바쳐질 거란다. 영광으로 알렴. 그 미천한 목숨이 더없이 고귀하고 숭고한 일에 사용되는 거니까."
아카슐라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엘리카가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얌전히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 제발 다른 사람들은 살려주세요."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놈들이 그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으니.
카고스는 비웃음조차 짓지 않고 마저 하려던 것을 계속했다. 놈의 손에 검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만하라고! 안 그러면······!"
엘리카가 처절하게 소리치며 바닥에 떨어진 제르엘의 검을 주워들고는,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그 행동은 곧바로 저지되었다. 아카슐라가 손을 뻗자 엘리카는 곧바로 정신을 잃고서 풀썩 쓰러졌다.
"아아, 정말. 저 건방진 주둥이를 찢어버릴 수도 없고."
메빌로스가 손을 까닥이자 엘리카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깜짝 놀란 제르엘이나 헤런이 붙잡을 틈도 없었다.
둥둥 뜬 그녀의 몸이 메빌로스의 곁으로 이동했다.
'······빌어먹을.'
다 끝났다.
만전의 상태로도 승산이 없을 전투를, 뭘 해보기도 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다.
진작에 도망쳤어야 했을까. 아니면 애초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니었나.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순순히 죽어주지는 않는다.
나는 세 원마를 노려보며 마지막 발악을 준비했다. 그 순간이었다.
저벅.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숲의 어둠을 뚫고 한 인형이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놀라운 건 그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리고 그 모습이 보이기 전까지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카고스를 포함한 원마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처럼 흠칫 놀란 기색으로 뒤늦게야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한 여인이었다.
【Lv. 99】
나는 멍하니 그녀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감이 가득 담긴 카고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