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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16화 (115/189)

조우 (15)

나는 아카슐라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바라보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Lv. 94】

그녀는 칼데릭의 군주와 비견될 정도의 진짜 강자였다.

설마 진짜로 원마가 튀어나올 줄이야.

나는 뒤늦게야 하늘 위에 떠있는 희미하기 그지없는 마력을 인지하고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눈이었다.

밤하늘에 숨은 채 이쪽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마력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눈.

'······암령의 눈.'

순간 등골에 소름이 섬짓 올라왔다.

저 능력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마족 서열 10위, 메빌로스.

대체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마력이 너무 희미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제야 공간이 갈라지고 아카슐라가 나타났던 것 또한 메빌로스의 공간 전이 능력이었음을 한 박자 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카슐라뿐만 아니라 놈 또한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긴장을 더욱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기, 날 무시하는 거야?"

나는 다시 전방의 아카슐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짐짓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원마가 둘, 그것도 꽤 서열이 높은 둘이 동시에 존재를 드러낸 마당이니.

"아카슐라······."

넋이 나간 듯한 제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역시 아카슐라의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제르엘은 광휘의 기사들 중에서도 마족과의 전쟁을 직접 겪었던 인물이었고, 아카슐라 또한 당시에 인류 연합군 사이에서 악명 높은 마족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기습은 힘들었다.

하지만 메빌로스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아카슐라는······.

'레벨이 사라졌군.'

어느새 아카슐라의 머리 위에는 레벨 표시가 사라져있었다.

나는 놈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현상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은 본체가 아니라 환영이다.

마력으로 구분해보려고 해도 애초에 잘 느껴지지 않았기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바로 방금 전의 마족과의 전투를 모두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내가 보인 능력을 경게하고 있을 건 뻔했다.

물론 그렇다고 섣불렀다고 자책을 할 수는 없었다. 마족을 처리하기 위해선 즉살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녀가 마족의 시체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그보다 어떻게 마의 씨앗에 대해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하네. 그건 아마 용사밖에 모르는 사실일 텐데, 대체 정체가 뭘까?"

내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한 듯했다.

나는 대화에 어울려주는 대신 세 사람이 있는 방향을 힐끗 돌아봤다.

이 상황에서 그들의 존재는 짐만 될 뿐이다.

하지만 도망치라는 신호를 줄 수도 없었다.

놈들의 목적이 마의 씨앗을 품고 있는 엘리카라는 것은 거의 분명했고, 그렇다면 순순히 도망치게 둘 리가 없었으니까.

"원마 아카슐라, 그리고 메빌로스."

내 말에 아카슐라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설마 메빌로스의 정체까지 간파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너희들의 목적은 저 소녀겠지."

아카슐라가 기분 나쁜 미소를 싱긋 지었다.

"글쎄? 질문을 하고 싶다면 내 질문에 먼저 답을 해줘야지. 네 정체를 알려주면 나도 대답해주도록 할게."

어차피 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기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엘리카가 마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건 어차피 확실했다.

놈들이 이곳에 이렇게까지 행차했다는 건, 분명히 엘리카를 데리고서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겠다는 거겠지.

마의 씨앗이란 마왕의 영혼의 조각을 의미했다.

마의 씨앗을 품은 이들은 대륙 곳곳에 존재하며, 마족들은 그들을 찾아다가 마왕의 부활을 앞당기기 위한 제물로 사용한다.

이것은 메인 스토리에서도 전면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내용이기에 자세한 설정까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그중에 몇 가지 알고 있는 건, 마의 씨앗을 품고 있는 종족은 오로지 인간들 뿐이라는 것.

그리고 마족들 또한 마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인물을 의식을 행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것. 대충 그 정도였다.

메인 스토리에서 마의 씨앗이라는 주제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대충 중반부 시점이었다.

한창 성검의 계승자와 모험을 함께하고 있을 때, 유저 일행은 우연히 도시의 뒷골목에서 뒹굴던 소년 하나를 구해주게 된다.

소년과 친해지게 된 일행은 그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줬지만, 알고 보니 그는 마의 씨앗을 품은 이였다.

그렇게 갑작스레 소년에게 접근해온 원마에 의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가까스로 조력자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된다.

따지고 보면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 싶었다.

엘리카는 이 수도원에서 몇 년을 지냈다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들이 엘리카의 존재를 어느 시점에 인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답이 없네, 진짜.'

지금 눈앞에 있는 적은 원마.

아카슐라뿐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메빌로스의 존재까지 고려해야만 했다.

어쩌면 원마 둘을 동시에 상대하게 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미 내게는 놈들보다도 더 서열이 높은 원마인 디트로데미얀을 쓰러뜨린 경험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애초에 놈과의 전투는 거의 목숨을 내던지다시피하고 간신히 승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경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원마들을 상대하는 게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단순히 상대의 레벨에 따라 절대적인 우위를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으니까.

상성에 따라서는, 예를 들어 하급 마법사의 방어막 하나에도 쩔쩔맬 수 있는 나였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레벨이 아니라, 이들의 능력이 얼마나 내가 즉살을 발휘하는 대에 치명적이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알 수 있었다. 놈들과 전투를 벌이면 결코 디트로데미얀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상대가 둘인 만큼 변수도 둘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

나는 전투를 준비했다.

기색을 눈치챘는지 아카슐라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 비틀며 말했다.

"죽이기 전에 대화를 좀 나눠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나오겠다면 별 수 없······."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곧바로 공간 도약을 사용했다.

방금 전 마족과의 전투처럼, 아카슐라의 바로 앞으로 이동하여 즉살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놈의 모습은 연기처럼 흩어져서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그 중심에 뭉쳐있던 마력 뭉치가 폭발을 일으켰다.

나는 부동 장막으로 폭발을 막고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아카슐라는 조금 떨어진 옆쪽에서 팔짱을 낀 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보고 있었는데 통할 리가 없잖아. 설마 능력이 그게 끝은 아니지?"

······이것이 아카슐라가 성가시기 그지없는 상대인 이유였다.

환영의 여왕, 아카슐라.

놈의 능력은 진짜와 다를 게 없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환상 속에서 상대를 기만하고 농락하다가 서서히 말려서 죽이는 악명 높은 마족.

바로 저 능력 때문에 놈은 라사의 보스들 중에서도 공략하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했었다.

본체를 찾아내서 타격하지 못한다면 데미지를 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번쩍!

그때 돌연 아카슐라의 눈에서 자줏빛의 안광이 뿜어져나왔다.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나는 놈이 무슨 능력을 사용한 건지 곧바로 파악했다.

아카슐라에게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능력뿐 아니라, 상대의 정신 자체를 홀려 환상 속에 갇히게 하는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제왕의 혼의 효과 덕분인지 내게는 역시 통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놈의 모습 앞으로 공간 도약을 펼쳤다. 이번에도 환영이었기에 폭발이 일었다.

"흐음? 왜 이건 안 통하지? 내 능력에 저항할 정도로 정신력이 강하다고?"

이번엔 위쪽의 허공에 나타난 아카슐라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아무렴 상관없지. 계속 그렇게 내 환영만 물고 늘어지다간 비참하게 죽게 될 거야. 더 힘을 내봐, 쿠쿡."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고서 묵묵히 공격을 이어갔다.

환영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공간 도약을 펼치며 접근했다. 이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환영이 사라질 때마다 폭발이 일고, 나는 그런 와중에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린 채 주위를 살폈다.

아카슐라가 만약 은신을 하고 있었다면 빈 허공에 레벨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 말은 즉, 놈이 이 전투의 현장에서 완전히 떨어진 먼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이쯤 되면 놈도 단순히 환영만으로는 내게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더 강력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본신을 드러내고서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놈도 엘리카를 데려가야 한다는 목적이 있기에 언제까지고 이렇게 시간만 끌 수는 없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직접 나서서 분명히 기습을 행하려고 할 터.

'그 순간이 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환영들을 쫓으며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딘가에 레벨 표시가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놈의 본체였다.

시간이 흘러 수십에 가까운 환영들을 처리한 순간이었다.

【Lv. 94】

환영이 폭발을 일으키기 직전, 갑작스레 반대편의 허공에 나타난 레벨 표시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레벨이 떠있는 방향으로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쳐서 혈술을 사용해 피를 흩뿌렸다.

"······!"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아카슐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놈이 펼친 방어막에 내가 흩뿌린 핏물은 모두 막힌 채였다.

젠장, 틈을 노린 거였는데 이걸 막았나.

나와 놈은 지면에 착지하고서 마주 보았다. 잠시 전투가 중단되었다.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지?"

아카슐라는 자신의 능력이 완전히 간파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인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쪽도 난감해졌기에 나는 낭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놈의 본체를 찾았을 때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기회였다. 방금 완전히 끝냈어야 했다.

저렇게 방어막까지 펼쳐버린 이상에야 이제 더는 즉살을 발휘할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한참 동안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아카슐라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알겠어, 알겠다고.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오래 걸릴 것 같네, 메빌로스."

메빌로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내 바로 뒤쪽에 은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빈 허공에서 날카로운 마력의 가시들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내 전신을 뎦쳐왔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부동 장막을 펼쳐서 그 기습 공격을 막아냈다.

스르륵.

이어서 아카슐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근처의 허공이 쩍 갈라졌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건 마찬가지로 잿빛의 피부를 지닌 마족이었다.

놈은 흑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채 한 손에는 다 썩은 나무로 만들어진 듯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마족 서열 10위의 원마, 메빌로스.

언젠가부터 하늘 위에 떠있던 마력 눈도,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난 지금의 능력도 모두 놈의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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