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14)
숲 한편에서 거대한 마력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건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적어도 80레벨급의 강자들이 전력으로 맞붙어야 일어날 마력 충돌.
'뭐지?'
한쪽은 광휘의 기사인 제르엘일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현재 숲에 들어가있는 인물은 그였으니까.
문제는 다른 반대편이 누구냐는 것이다.
나는 바로 좀 전까지 수도원장이 이번 일에 무언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미심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싸우고 있는 이가 원장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왜냐면 그의 레벨은 기껏해야 60레벨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80레벨이 넘는 제르엘과 전투를 벌였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이 떨어지거나 제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수도원에 제르엘에 버금가는 레벨을 지닌 다른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는 원장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 3의 인물?
"······!"
현장에 가까워지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피안개처럼 숲 한편에 시뻘겋게 퍼진 기운이었다.
불길함이 넘실거리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기운.
이 기운은 이전에 느껴본 적이 있었다. 바로 디트로데미얀에게서.
단 한 번 경험해봤을 뿐이지만, 마족에게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기운은 잊을 수가 없었다.
'······마족!'
핏빛의 기운에 대항하여 황금빛의 기운 또한 그와 뒤섞여 격렬하게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힘이 다해버린 듯 완전히 끊겼다. 제르엘이 당한 건가?
한 발 늦었나 싶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다.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것은 쓰러져있는 제르엘과, 그 반대편에 서있는 잿빛 피부의 남자. 마족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엘리카와 헤런까지.
'저 둘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마족이 제르엘을 완전히 끝장낼 듯 거대한 기운을 뭉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제르엘의 앞으로 공간 도약하여 부동 장막을 펼쳤다.
동시에 핏빛의 기운이 파도처럼 내가 서있는 자리를 거세게 휩쓸었다.
쿠구구구.
손을 거둔 마족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녀석과 잠시 눈으 마주치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제르엘이 경악과 당혹스러움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 신은······?"
일전에 잠시 마주쳤을 뿐이지만 반응을 보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에, 에단 씨?"
엘리카와 헤런 또한 벙찐 기색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러서라는 손짓만을 보내고서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Lv. 85】
놈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은 85.
아주 높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강자.
81레벨인 제르엘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인 상대이긴 했다.
"성가시게도 새로운 벌레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구나."
이내 마족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명백히 경계가 섞인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버렸으니 어지간히 오만한 놈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경계를 할 수밖에 없겠지.
세인테아의 영역으로 넘어와 무언가 수작을 꾸미고 있는 마족이다.
마족들은 대체로 오만하고 포악하긴 하지만, 이런 놈들 중에 만용을 부리는 놈은 거의 없었다.
'그나저나······.'
바닥 한편에 말라비틀어진 채 널브러진 시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수도원장의 시체. 얼굴을 제대로 못 알아보겠지만, 기억하는 그의 복장과 일치하니 아마 맞을 것이다.
"수도원장이 흑막이었습니까?"
나는 제르엘에게 물었다.
멍하니 입을 다물고서 있던 그가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 마족은 원장과 계약한 마족이겠군요."
보통 마족들이 자신들의 영역 밖에서 벌이는 개수작이라고 하면 단순하다.
계약자들을 불리고 그들에게서 영혼이나 생명력 등의 대가를 가져가기 위하여, 혹은 아예 격이 떨어지는 마족들은 단순히 인간의 피와 살점을 탐하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이나 작은 도시 등에 숨은 마족들이 사람들을 습격하고 잡아먹는 건 그렇게까지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놈은 그런 류도 아닐 것이었다.
비록 내 주위에 워낙 괴물들이 득실거려서 눈이 좀 높아지긴 했지만, 80레벨대의 마족이면 마족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마족이었다.
이런 놈이 고작해야 변방의 수도원에 불과한 곳에서 도대체 뭔 짓을 꾸미고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래, 이 정도 수준의 마족이 나설 일이라면······.
'······설마?'
머릿속에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게임에서도 관련 에피소드 자체가 있지는 않았지만 대사들을 통해 꾸준하게 등장했던 개념.
마족들이 마왕의 부활을 앞당기기 위해 찾는다는 마의 씨앗.
설마 정말로 그거인가?
나는 한편에 서있는 엘리카를 슬쩍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마족의 시선이 묘하게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기는 했다.
"마의 씨앗."
내가 그것을 입으로 내뱉자 마족의 인상이 따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반응으로 내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마족 놈이 이곳 수도원에서 이러고 있는 건 마의 씨앗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의 씨앗은 아마도 엘리카다.
"마의······ 씨앗?"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르엘이 중얼거렸다.
이건 아직 마족들이 덜 날뛰기도 했고, 놈들 사이에서도 극비인 사항이기에 이 개념을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사를 제외하고.
다만 그녀는 여러 가지 금제 때문에 이 마의 씨앗처럼 주변에 말하지 못하는 사실들이 몇몇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알아봐야 그녀를 도와서 마족들의 마수를 막을 수 있는 인재가 세인테아에 존재하지도 않지만.
"저 소녀가 마의 씨앗이었군."
내가 그렇게 확정을 내리듯 말하자 침묵하고 있던 마족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 어떻게?"
좀 전까지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마족의 얼굴에 명백하게 당혹감이 차올랐다.
놈의 입장에서는 내가 대체 마의 씨앗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 싶을 것이었다.
"대답해라, 인간. 그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놈의 의문에 대답해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확인할 건 모두 확인했다.
나는 제르엘에게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 예······."
"그럼 물러나십시오. 전투에 방해가 되니."
그에 제르엘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마족이 그를 얌전히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놈이 손에 핏빛으로 거대한 기운을 뭉치더니 그것을 광선처럼 쏘아냈다.
나는 다시금 부동 장막을 펼쳐셔 가볍게 막았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살점을 하나하나 찢어서 실토하게 해주마!"
마족의 주위에 불길한 마력이 요동쳤다.
허공에 떠오른 핏빛 구체들에서 방금 전의 광선들이 어지럽게 쏘아졌다.
하지만 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 공격들을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모두 막아내기만 했다.
핏빛의 마력이 터지고 흩어지며 주위에 마치 피안개와 같은 것이 자욱하게 퍼졌다.
놈의 마력은 대체로 핏빛이었기에 이전에 폭왕과 싸웠던 게 생각나는 풍경이었지만, 당연히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
공격이 막히기만 하자 놈도 서서히 다급해지는 기색이었다.
원마도 결국 뚫지 못한 부동 장막을 놈 따위가 뚫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나는 잠시 공세를 멈춘 녀석에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네 공격이 내게 닿을 일은 없다."
"······."
"너야말로 목숨에 자비를 베풀어줄 때 대답해라. 이번 일에 원마가 관련되었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것은 다른 마족, 그러니까 원마의 개입이었다.
마의 씨앗은 마왕의 부활과 관련된, 놈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항이었으니까.
그런 일에 원마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감히! 인간 따위가!"
그러나 놈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모멸감과 격분만이 가득한 기색으로 마력을 끌어올릴 뿐이었다.
이번엔 전력을 다한 필살의 일격이라도 날리려는 건지 심상치 않았다.
핏빛의 기운이 마족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쳤다.
물론 그것을 가만히 기다려줄 이유는 없었다.
놈은 몸 주위에 방어막 따위는 펼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놈의 목숨을 끊어야 되나 고민했다.
여기서 놈의 목숨을 끊으면 더 정보를 캐낼 수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계속 공격을 맞아주고만 있을 수도 없고, 계속 이런 양상이 지속되면 결국 몸을 내뺄 것 같았기에 별 수 없었다.
"······?!"
공격의 준비가 마저 끝나기 전에 나는 놈의 바로 눈앞으로 순간이동했다.
놈의 눈이 순간 경악으로 커졌고, 그걸로 끝이었다.
즉살에 당한 놈의 몸이 풀썩 넘어갔다.
허공에서 격동하던 놈의 마력도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
나는 놈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제르엘과 다른 두 사람이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제르엘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 물었다.
"저 마족은······."
"죽었습니다."
"······대체 경께선 누구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짧게 대꾸했다.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 일단 숲에서 나갑시다."
제르엘의 부상이 심각하기도 했고, 여유롭게 말이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는 엘리카와 헤런을 돌아봤다.
"너희는 괜찮냐?"
"······네, 네."
헤런이 더듬거리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수도원에서는 지금껏 빌빌거리는 모습만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저······."
헤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뭐라 말하려 했지만 더듬거리며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엘리카가 나서서 말했다.
"아직, 톰을 찾지 못했어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그러고 보니 원래 실종된 애들을 찾으려고 했던 거였지.
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나는 일단 그들을 숲 바깥으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숲을 더 수색해보마. 경의 부상이 심하니 일단 수도원으로 돌아가자."
제르엘의 꼴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기에 엘리카도 순순히 말대로 따랐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위험하게 숲에 들어온 거냐?"
"······몰래 들어왔다가 제르엘 경께서 저희를 구해주셨어요."
그런 거였나.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가 실종됐으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숲에 직접 들어온 모양이었다.
내가 이들의 보모도 아니었기에 굳이 그에 대해서 꾸짖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세 사람을 데리고서 숲 바깥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허공에 어두운 기운이 일렁이더니, 공간이 쩍 갈라지듯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아아······ 이게 도대체 뭔 꼴이야?"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려있는 잿빛 피부의 여인.
태연자악하게 주위를 슥 둘러보고서 푸념하듯 투덜거린 여인이 이쪽을 바라봤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안녕? 너는 또 뭘 하는 인간일까?"
"······."
반대로 나는 웃지 못했다.
그녀의 외관에서 정체를 곧바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원마, 서열 13위의 마족 아카슐라.
마음속 한편에 차있던 불안이 씨가 되듯 정말로 원마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