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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14화 (113/189)

조우 (13)

다음날 동이 트면 곧바로 수도원에서 나서기 위해 일찍 잠에 들었었던 나는, 수도원에서 느껴지는 소란에 깨어났다.

그리고 뒤늦게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 중 둘이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기에 수도원이 한바탕 뒤집어진 것이었다.

그중 한 명이 나도 잘 알고 있는, 엘리카와 헤런의 친구인 톰이었다.

'떠나기 직전에 이런 일이 터지네······.'

나는 방밖에 있는 복도의 창가에 서서 뒷마당 너머로 보이는 숲을 내려다봤다.

바로 내일이면 수도원에서 떠날 예정이었기에 참 묘한 타이밍이다 싶었다.

물론 녀석의 실종이 나한테 있어 어떤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야 예정대로 날이 밝으면 갈 길을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엘리카, 헤런, 톰, 그들 셋은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그냥 신경을 끄고 휙 떠나버리기도 당연히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에단 씨."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어왔다. 테인 사제였다.

한밤중이었지만 그의 낯빛에 진 어두운 그늘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일 떠나셔야 하는데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예, 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내 말에 테인이 떠나가라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언가 찾은 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별일이 없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렇군요. 지금도 수색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원장님께서 일단 수색을 중단하라고 말씀하셔서 날이 밝으면 성기사들이 다시 수색을 재개할 겁니다."

그런가.

엘리카에게 듣기로는 예전에도 사제와 성기사들이 숲에서 실종된 적이 있다고 했었다.

이런 밤중에 무리하게 수색을 이어가다가 자칫 성기사들도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일단 중단한 듯 싶었다.

'정말로 숲에 뭐가 있기는 한 건가?'

정말 소문대로 정체불명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정말 괴물의 소행이라면 흔적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헤런이 말했다.

"그래도 제르엘 경께서 직접 아이들을 찾아주시러 숲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부디 뭐라도 발견하셨으면······."

제르엘 경?

광휘의 기사가 직접 수색에 나섰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나마 안심할 일이었다.

그의 레벨은 80이 넘는다.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뭐라도 성기사들은 찾지 못한 단서를 뭐라도 얻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

"······."

하지만 설마 광휘의 기사마저도 숲에서 실종된다면?

그건 애초에 이들의 수준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것이었다.

그때 한순간 하나의 인물이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수도원장.'

그는 주변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60레벨이 넘는 실력자였다.

물론 단지 그것만으로 그가 이 사건에 무언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억측이고 비약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를 직감이 들었다.

나는 그 직감을 무시하지 않고 테인에게 슬쩍 물었다.

"원장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테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예? 아마도 원장실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정확히는 모른다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에단 씨께서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그만 주무십시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테인이 떠나가고,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숲을 다시 바라봤다.

왜인지 모를 불길함이 숲 어딘가에서 뿜어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서 아래쪽으로 공간 도약했다.

한번 숲으로 직접 들어가봐야겠다.

***

제르엘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앞에 나타난 잿빛 피부의 남성을 바라봤다.

그는 가공할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저 불길하기 그지없는 생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족.

젊었던 과거,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대륙의 공적. 최악의 종족.

"······네가 원장에게 힘을 준 마족이겠군."

마족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 갑작스레 튀어나온 마족이라면 원장과 관련된 존재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제르엘은 온 신경을 마족에게 집중한 채 검을 겨누었다.

좀 전의 날아든 일격의 파괴력은 결코 자신보다 아래의 수준이 아니었다.

주위를 슥 둘러본 마족이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쯧, 벌레 같은 놈이······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일을 크게도 벌였구나."

제르엘의 손에 붙잡혀있던 디호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항변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메, 메퓌르님! 오해이십니다! 이 자는 교황령에서 찾아온 광휘의 기사입니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시끄럽다."

마족이 그의 말을 끊고서 손을 휘저었다.

화아악!

그러자 그의 몸에서 검붉은 연기가 뿜어져나오더니 마족에게로 흡수되었다.

"······끄아아악!"

디호드가 단말마와 같은 찢어지는 괴성을 내질렀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생명력이 증발해버린 듯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졌다.

제르엘은 침음을 흘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족과 계약한 자의 말로, 힘의 회수. 어차피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디호드에게서 기운을 전부 빨아들인 마족은 다시 제르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르엘은 엘리카와 헤런 두 사람을 등 뒤에 두고 선 채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던 것인지 대답해라, 마족."

원마는 아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마족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괴물들이니까.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마족들 중에서 상위에 속하는 수준의 강자인 것은 분명했다.

이 정도 마족이 수도원장을 계약자로 삼고 이곳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마수가 이곳 로벨지오 수도원에 뻗쳐있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었다.

마족이 묘한 눈길로 제르엘을 쳐다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부 알고 파견을 온 건 아닌 모양이군."

"······뭐라고?"

"하긴, 그랬다면 너 따위 버러지가 아니라 용사가 직접 행차했겠지."

마족이 제르엘을 향해 무심하게 손을 뻗었다.

"네놈을 처리하고 이 수도원만 정리하고서 그만 회수해가면 되겠구나."

그 순간 제르엘은 마족의 시선이 엘리카에게로 향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곧바로 공격이 날아들었다.

마족의 손에서 방금 전의 핏빛 기운이 번쩍이더니 광선처럼 쏘아졌다.

제르엘도 황금빛의 검기를 찔러 정면에서 그 공격을 막아냈다.

바로 뒤쪽에 엘리카와 헤런이 있었기에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시뻘건 기운과 황금빛의 기운이 뒤섞이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제르엘은 방어막을 넓게 펼쳐 폭발의 여파까지 막으며 넋을 놓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급히 외쳤다.

"도망쳐라! 숲을 빠져나가!"

엘리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서 헤런의 팔을 이끌었다.

무력한 처지가 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그녀라도 이번에는 순순히 제르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전투에 방해만 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슈우우우!

마족의 주위에 넘실거리는 핏빛의 기운이 거대한 검날의 형태로 뭉쳐졌다.

도망치려는 두 사람을 향해서 검날이 지면을 통째로 짓뭉개듯 내리쳐졌다.

제르엘이 다급히 검기를 쏘아내어 검날을 파괴시켰다. 허공에서 다시 한 번 충격파가 일어났다.

마족이 성가시다는 듯 다시 한 번 기운을 부풀렸다.

그의 주위에 떠오른 구체처럼 뭉쳐진 기운들이 사방으로 날카로운 가시들을 폭발적으로 쏘아냈다.

카카카카캉!

두 사람의 신변이 우선이었던 제르엘은 가시가 그들에게 적중하지 못하게 막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숲속의 짙은 어둠에 수많은 황금빛의 잔상이 그의 검을 따라서 새겨졌다.

한참을 가시들을 튕겨내던 제르엘의 눈이 돌연 크게 떠졌다.

어느새 바로 밑의 지면에서 튀어나온 핏빛의 촉수들이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

동시에 마족에게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기운이 유동했다.

다급히 앞쪽을 바라보자 핏빛의 거대한 구체가 뭉쳐져있었다.

주위의 공간마저 왜곡시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구체가 느리지만 빠르게, 그를 통째로 삼켜서 소멸시킬 듯 다가왔다.

제르엘은 별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번쩍!

그의 목에 걸려있던 로자리오가 눈부신 섬광을 뿜어냈다.

그 밝은 빛에 한순간 마족도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빛은 제르엘의 다리를 구속한 기운은 물론이고 마족이 쏘아낸 거대한 구체마저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다시 자유를 되찾은 제르엘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서 마족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돌진했다.

그의 검날이 그대로 마족의 목을 베어버리고 지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제르엘의 몸이 휘청거렸다.

돌연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타들어가는 고통에 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날카로운 핏빛의 기운이 가슴을 꿰뚫고서 나와있었다.

'왜······.'

왜 공격에 당한 거지?

피를 울컥 쏟아내며 제르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마족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별 감흥이 없다는 무심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다는 듯.

제르엘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전력을 발휘한 적이 없었다는 걸.

"크헉······!"

핏빛의 기운은 순식간에 몸 내부에 침투하여 남아있는 기력을 모조리 증발시켰다.

서있을 힘조차 사라져버린 제르엘은 제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에 도망가고 있던 엘리카와 헤런이 멈춰서서 소리쳤다.

"······제르엘 경!"

제르엘은 계속 도망치라고 간신히 손을 휘저었지만, 두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머뭇거릴 뿐이었다.

마족이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부질없다. 네놈도, 이 수도원에 득실거리는 벌레들도 밤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있을 것이다."

제르엘은 멀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좀 전에 성물의 힘을 빌려 펼친 마법도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이대로면 이제 곧 이 마족의 손에 목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수도원의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목적이 뭐냐? 저 소녀와 관련이 있는 건가?"

제르엘이 목소리를 쥐어짜내 물었다.

분명히 전투가 시작하기 전 엘리카에게 향했던 마족의 시선은 심상치 않았다.

마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 마무리를 짓기 위함이었다.

'신이시여······.'

제르엘이 눈을 감고, 지켜보던 엘리카와 헤런의 얼굴에도 절망감이 들어찼다.

마족의 손에서 핏빛의 기운이 파도처럼 몰아쳐 제르엘을 뒤덮었다.

콰아아앙!

그 일격에 고스란히 맞았다면 제르엘의 몸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그는 여전히 멀쩡했다.

의문을 느끼며 제르엘은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바로 앞에 서있는 누군가의 등이었다.

"······흠?"

공격이 막힌 마족은 인상을 찌푸린 채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를 바라봤다.

엘리카와 헤런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숲속에 쓰러져 수도원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외부인.

남자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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