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12)
톰은 완전히 죽었다 살아난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갑작스레 등장한 제르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르엘이 쥐고 있는 검에는 강대한 기운이 담긴 순백색의 광채가 환하게 빛나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엘리카는 그가 검기를 쏘아 촉수들을 베어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너희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이내 가까이 다가온 제르엘이 헤런과 엘리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에 두 사람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어른들의 말을 어기고 몰래 숲으로 들어온 것이었으니까.
어렵지 않게 상황을 짐작한 제르엘은 쓰러져있는 헤런의 상처부터 살폈다.
"윽······."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촉수에 꽉 조여진 탓에 헤런의 팔다리는 피멍이 들어서 퉁퉁 부은 채였다.
제르엘은 상처를 살펴보고는 상처 부위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방금 전 검기와 같은 순백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상처들을 흔적도 없이 치료했다.
수도원의 사제들이 펼치는 치료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회복 속도에 헤런도 엘리카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 감사합니다. 제르엘 경······."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제르엘이 책망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허락을 받았을 터일리는 없고, 다른 사람들 몰래 들어온 모양이구나. 친구를 찾고 싶어 이런 위험천만한 짓을 한 것이냐?"
엘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런은 안절부절못한 기색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제르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이 숲으로 들어와봤자 위험하기만 하지 도움이 될 일은 없다는 건 두 사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숲으로 들어오고 만 것이리라.
사람은 이성보다도 감정이 앞서는 생물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아이들이었다. 제르엘도 두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숲에 들어왔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한 건 이해한 거고,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봤다시피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는 숲이다. 너희가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다."
제르엘이 바닥에 널브러진 촉수 사체를 힐끗 내려다보며 말했다.
엘리카와 헤런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봤다.
이 괴물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이런 것이 수도원 숲에 존재하는지 둘의 머릿속에 의문과 두려움이 스쳤다.
방금 제르엘이 베어버린 괴물은 평소 그들이 책 속에서 보던 일반적인 몬스터들의 생김새와도 현격하게 다른 무언가였다.
"경, 대체 이 괴물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제르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어째서 숲에 이런 존재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몬스터들을 퇴치해온 그도 이런 괴생물을 마주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이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야 넘치도록 겪어봤다. 하지만 얼마나 강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기괴하냐의 문제였다.
마치 마경에나 나올 법한, 혹은 마족들의 영역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마족.'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제르엘은 사실 처음 이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질감은 수도원장인 디호드를 마주했을 때, 그리고 이 숲에 들어와있는 지금은 더욱 커져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르엘은 이제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수도원의 숲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는 수도원장인 디호드와 분명히 어떠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제르엘은 일단 숲을 더 탐색해보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두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먼저였다.
"몸은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느냐?"
"네, 네······ 완전히 나은 것 같습니다."
"바깥으로 데려다주마. 수도원 건물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단호한 제르엘의 말투에 헤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방금 그런 괴물한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이었기에 더 숲을 돌아다닐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카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저도 수색에 함께하게 해주세요, 경."
엘리카도 헤런처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평생에 본 적도 없는 괴생물체를 봤는데 아무리 겁이 없는 그녀라도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도 오히려 톰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다.
숲에 실제로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으니, 톰의 실종은 그와 관련이 있다는 게 거의 분명해진 것이었으니까.
"안 된다."
그런 그녀의 정신력에는 제르엘도 감탄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순순히 말을 들을 기색이 아니자 제르엘은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거칠게 손을 써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지는 않구나. 말을 안 듣겠다면 기절시켜서라도 짊어지고 나가마."
"······."
그렇게까지 말하자 엘리카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울한 기색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쨌든 그렇게 제르엘이 두 사람을 데리고 숲 밖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
돌연 제르엘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고정했다.
그에 엘리카와 헤런도 그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곧 어둠 너머에서 천천히 사람의 형상이 걸어나오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원장님?"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헤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숲 한편에서 튀어나온 이의 정체는 바로 수도원장인 디호드였다.
갑자기 여기에 원장이 왜 온 것인가 엘리카와 헤런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제르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집에 회수했던 검에 다시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곳에 계셨군요, 제르엘 경. 한데 그 둘은 어찌된 일입니까?"
세 사람과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서 멈춰선 원장이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르엘이 담담하게 답했다.
"숲에 몰래 들어왔다가 제가 발견했습니다. 방금 막 데리고서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다시 한 번 괴물의 사체를 내려다보고서 물었다.
"원장, 이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그 물음에 디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 숲에 정말로 이런 괴물이 존재했다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에는 엘리카와 헤런까지도 명백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디호드의 태도가 상황에 맞지 않게 너무나 태연하고 평화로웠으니까.
이런 괴물이 죽어있는 걸 보면 깜짝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애초에 성기사들도 없이 왜 이곳에 혼자서 왔지?
"원장."
"예, 제르엘 경."
"정체가 무엇이오?"
제르엘의 목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서늘한 음성에 헤런과 엘리카도 움찔 놀라서 디호드를 바라봤다.
뒷짐을 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디호드가 다시 한 번 입가에 미소를 내걸었다.
하지만 방금 전과 판이하게 다른 섬뜩하고 기괴한 미소였다.
"참으로 일이 귀찮게 됐습니다. 이제 거의 다 때가 됐었는데, 하필이면 종속 하나가 말썽을 부려서는."
디호드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괴물의 사체가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더니 그에게로 흡수되었다.
제르엘은 그 광경에 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역시 마족의 계약자였군."
"아, 경께는 익숙한 광경일 수 있겠군요. 과거에 마족과의 전쟁을 직접 겪으신 분이니."
괴물의 기운을 회수한 디호드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르엘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아무튼 봐선 아니될 걸 봤으니 이곳에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디호드의 손에 불길한 흑색의 기운이 뭉쳐졌다. 숲에 내려앉은 밤의 어둠보다도 더욱 검은 기운이었다.
마치 거대한 실타래처럼 뭉쳐진 그것은 이내 수십 갈래로 뻗어져 제르엘을 향해서 쇄도했다.
그에 제르엘의 뒤에 서있던 엘리카와 헤런은 경약해서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움츠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르엘이 섬전처럼 검을 뽑아든 건 그와 동시였다.
번쩍!
좀 전보다도 훨씬 밝고 강렬한 순백의 기운이 일순간 숲을 뒤덮었다.
디호드의 공격은 그 백색의 섬광에 잡아먹혀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크아악!"
가슴팍에 거대한 검상이 새겨진 디호드가 피를 철철 쏟아내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 방금 전까지의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에도 없었고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검을 거두고서 제르엘의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종된 아이들은 어디에 있지?"
제르엘이 서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디호드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려 그런 그를 올려다봤다.
설마 단 일격에 승부가 나버릴 줄은 몰랐기에 디호드는 지금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교단의 최고 전력인 광휘의 기사, 아무리 그런 광휘의 기사라지만 힘의 격차가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광신도 놈이······ 끄악!"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디호드의 어깨에 제르엘이 검을 찔러넣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방금 전의 새하얀 검기를 불꽃처럼 피워내어 검날을 박은 채 그대로 디호드의 살을 지졌다. 디호드의 괴성이 울려퍼졌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헤런과 엘리카는 움찔 놀랐다.
평소 온화하기 그지없던 그의 모습과 완전히 정반대의 잔혹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제르엘의 본색인 것은 아니었다.
제르엘은 단지 수많은 경험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족과, 그런 마족들에게 영혼을 판 계약자들을 상대로 자비와 관용 따위를 베풀어주는 건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종된 아이들은 어디에 있나?"
다시 한 번 제르엘이 물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디호드가 이내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실성한 웃음을 흘렸다.
"큭, 큭큭······ 과연 멍성대로 더럽게 강하긴 하구나."
"······."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결국 네놈은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니······."
제르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디호드의 몸에 꽂힌 검을 뽑았다.
아무래도 당장 제대로 된 대답을 듣는 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제르엘은 고개를 돌려 엘리카와 헤런 두 사람을 돌아봤다.
그는 일의 우선 순위를 착각하지 않았다. 우선은 이 위험한 장소에서 두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아아.
제르엘의 손에서 순백의 기운이 사슬이 형태로 뭉쳐지더니, 순식간에 디호드의 전신을 휘감고서 꽁꽁 포박했다.
디호드의 뒷덜미를 붙잡은 제르엘이 두 사람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
갑작스레 한편에서 요동치는 거대한 기운에 제르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시뻘건 핏빛의 파도가 제르엘이 서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그 광경에 엘리카가 소리를 질렀다.
"······제르엘 경!"
기운이 가시고 다시금 모습이 드러난 자리에 다행히도 제르엘은 무사했다. 그의 주위에는 순백의 장막이 펼쳐져있었다.
좀 전에 디호드가 펼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파괴력.
제르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슬아슬하게 금이 간 장막을 바라보다가, 기습이 날아든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색빛 피부를 한 기괴한 생김새의 남자가 어느새 그곳에 서있었다. 마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