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10)
엘리카의 물음에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좋은 기회니까 받아들이면 되겠지."
본래 거절할 생각이었다고 말했지만 이게 거절할 이유가 있는 제안인가?
광휘의 기사의 제자라니,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다시는 안 올 천운과 다름없는 기회 아닌가.
"역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에도 엘리카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저 높은 곳까지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도 그녀에게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의 인생이고 선택이야 스스로의 몫이라지만, 만약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으면 당연히 냉큼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성기사가 되기 싫은 거냐?"
"싫다기보다 의미를 못 찾겠다는 거죠."
"너는 사제가 되겠다고 했었지. 그렇게 따지면 사제라고 크게 다를 게 있나 싶다만."
엘리카가 인상을 슬쩍 구겼다가 순순히 긍정했다.
"뭐, 그렇긴 하죠. 근데 그것도 그렇지만, 만약 그 사람 제자가 되면 이 수도원에서 떠나게 될 것 아니에요."
"아, 친구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가 싫다는 거였나?"
"······아니요. 딱히 그런 녀석들 아무래도 좋거든요. 그냥 수도원에서 떠나기 싫다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이유가 가장 큰 듯했다.
그보다 뭔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지금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와는 마주칠 때마다 인사나 하던 게 전부였다. 언제 고민 상담이라도 해줄 만큼 친해졌었던가?
"신중히 고민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그래도 일단 성심껏 대답해주기로 했다.
"그 광휘의 기사라는 자를 따라가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좋겠고, 계속 이곳 수도원에 머물러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도 좋겠지. 나는 딱히 네가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도 멍청하게 복을 걷어차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 어느 쪽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인지도 모르지."
내 말에 엘리카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너무 애매한 답변이잖아요."
"네 삶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넌 어차피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하든 귀담아 듣지도 않을 것 같은데."
부정할 수 없는 듯 잠시 침묵한 그녀가 이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죠. 아무튼 감사해요."
몸을 돌려 다시 방밖으로 나가려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떠날 때 말은 해주세요. 얼굴 비춰서 배웅은 해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다."
"말 안 하면 테인 사제님한테 물어보면 그만이거든요. 그리고 그것도 끝까지 숨기실 거예요? 왜 숲에서 쓰러져있었는지?"
나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 좀 나가라."
"예이."
엘리카가 설렁 대답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하던 고민을 마저 계속했다.
***
"먄악 제르엘 경의 제자가 되면 수도원에서 떠나게 되는 건가?"
멍하니 물컵을 만지작거리던 톰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옆에 앉아있던 헤런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서 대답했다.
"아마 그렇지 않겠어? 설마 그분이 우리 수도원에서 계속 머무르실 리는 없고, 아마 교황령으로 가지 않으려나."
"햐, 교황령이라······ 그거 진짜 엄청난 출세잖아? 그런데 엘리카 걔는 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나 같으면 경께서 말씀하시자마자 무릎 꿇고 절부터 올렸을 텐데."
"뭘 새삼스레. 그 녀석이 그런 걸 바랄 성격이냐?"
"그렇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난 가끔 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의자에 등을 기댄 톰이 답답함과 불만이 섞인 듯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런 톰을 헤런이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너야말로 상관없냐?"
"······뭐? 뭐가?"
"엘리카가 진짜 제르엘 경의 제자가 되서 수도원을 떠나버려도 상관없냐고."
"뭔 말을 하는 거야? 그러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지. 너 설마 내가 걔 질투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톰이 콧방귀를 뀌며 손에 쥐고 있던 물컵을 입가에 가져갔다.
"너 엘리카 좋아하잖아."
그리고 이어진 헤런의 말에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냈다.
사레가 들려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던 톰이 완전히 당황해서 헤런을 쳐다봤다.
"뭐, 뭐, 뭔 말을 하는 거야? 누가 누구를 좋아해? 내가 걔를? 그런 선머슴 같은 녀석을 누가 좋아한다고!"
"톰."
헤런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카만 빼면 다른 애들은 다 알아. 너는 지금까지 그걸 숨긴 거라고 숨긴 거냐?"
"······."
"그러니까 다 집어치우고 한번 그냥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너는 정말 엘리카가 제르엘 경의 제자가 되길 바라냐?"
톰이 헤런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벌써 3년이었다.
톰, 헤런, 엘리카. 세 사람이 이곳 로벨지오 수도원에 들어온 건 거의 같은 시기였다.
톰과 헤런은 전쟁으로, 그리고 엘리카는 마족의 난동으로 부모와 형제를 잃은 고아였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서로에게 날을 세우기 바빴던 그들은 싸우면서 친해졌고,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셋이서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헤런의 말대로 톰은 엘리카를 좋아했다.
스스로는 그것을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에만 눈치가 없는 엘리카를 제외하고 모두가 알았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한 투로 말했다.
"말했잖아, 그러길 바란다니까."
"······."
"물론 엘리카가 수도원을 떠나는 건 싫어. 그래도 제발 제르엘 경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건 진심이야. 그 녀석은 이런 변방의 수도원에서 평생을 박혀있을 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톰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고작 그런 이기심 때문에 소중한 친구의 앞길을 막다니, 그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헤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걔는 애초에 그걸 바라지 않을 거라니까."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또 나중이 되면 모르는 거잖아. 걔는 성기사가 되기 싫은 게 아니라, 딱히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니까. 너야말로 설마 엘리카가 제안을 거절하길 바라냐?"
"그럴 리가 있나. 나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수녀님들한테 말해서 한번 설득을 부탁드려볼까? 역효과려나?"
"말이라고 하냐? 관둬."
엘리카의 반골 기질을 아는 두 사람이었기에 아직 제르엘의 제안을 다른 수도원 사람들에게 말하진 않았다.
만약 다른 이들도 이 사실을 알면 완전히 수도원이 뒤집어질 테고, 당연히 단체로 엘리카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버리면 오히려 더 고민하지도 않고 단칼에 제안을 거절해버릴 것 같았다.
"아직 며칠 더 남았으니까 남은 시간 동안 우리 둘이서 열심히 설득해보자고. 그래도 결국 마음 안 바꾸면 별 수 없는 거고."
고개를 끄덕이던 톰이 돌연 결심한 듯 말했다.
"그리고 만약에 수도원에서 떠나게 되면, 그때는 그냥 질러봐야겠어."
"······?"
"그 녀석한테 고백하겠다고."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헤런이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진심이냐?"
"어."
"······장난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두들겨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차라리 그러면 훨씬 낫겠네. 걔가 진지하게 정색하고 거절이라도 하면 진짜 죽고 싶어질걸."
톰이 기지개를 켜고서 말했다.
"시간 다 됐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어느새 날은 거의 저물고 하늘에는 노을이 져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치고 방밖으로 나섰다.
엘리카를 찾아서 함께 식당으로 향하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마당 한쪽에 또래 친구들 몇 명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 한 소년이 코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톰과 헤런은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야, 무슨 일이야? 메트 너는 얼굴이 왜 그 꼴이고? 누구랑 싸웠어?"
다친 소년을 주위의 아이들이 진정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년 대신 다른 소녀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렉스랑 싸웠어. 그 자식이 또 시비를 걸고 발작해대서."
그 말에 톰과 헤런은 더 설명을 자세히 듣지 않아도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전에 엘리카가 코뼈를 부러뜨린 소년이 바로 렉스였다.
수도원 아이들과 여전히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그는 툭하면 다른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기 일쑤였으니까.
헤런이 소년의 상처를 살피면서 물었다.
"렉스는 어디 있는데?"
"나한테 실컷 얻어맞다가 도망쳤어. 그 별것도 아닌 새끼."
소년이 아직 분이 덜 풀린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때 다른 소년이 거들었다.
"렉스 걔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 달려갔어."
"······뭐? 왜 거기로?"
"몰라.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해야 되나 얘기하고 있었는데······."
수도원 뒷편의 숲, 예전에 사제와 성기사들 몇몇이 실종된 적이 있던 숲.
깊은 곳에 정체 모를 괴물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에 수도원의 사람들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장소.
"그냥 내비둬, 그딴 새끼. 좀 지나면 겁먹고 알아서 나오겠지."
톰이 인상을 찌푸린 채 수도원 뒷편의 숲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일단 넌 얼굴부터 씻어. 내가 한번 찾아볼 테니까."
"뭐? 그냥 내버려두자니까."
"그랬다가 안 돌아오면 어쩌려고? 날도 거의 다 저물었는데. 안 그래도 엘리카가 걔 코뼈 부러뜨린 지도 얼마 안됐는데, 수녀님들한테 들키면 이번엔 그냥은 못 넘어가."
더 일이 성가셔지기 전에 빨리 렉스를 찾아 데리고 돌아와서 조용히 넘기는 편이 좋았다.
헤런이 말했다.
"나도 같이 갈게."
"됐어. 넌 엘리카 찾아서 얘네하고 먼저 식당으로 가. 오래 안 걸려."
헤런과 다른 아이들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톰은 곧장 몸을 돌려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 뛰어갔다.
"아오, 하여튼 렉스 그 새끼······."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렉스는 여전히 수도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톰 역시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그와 비슷했기에 적당히 이해해주며 넘어가고 있었지만, 어째 갈수록 말썽이 잦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 제대로 한번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톰은 거침없이 숲 안쪽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갔지?'
어차피 괴물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소문일 뿐이고, 실종도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일 뿐이기에 별 두려움은 없었다.
실제로도 톰과 헤런, 엘리카는 사제들 몰래 숲에 몇 번 들어와서 나다닌 적도 있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날이 밝을 때였지만.
렉스야 깊이 들어가지도 못했을 게 뻔했기에 톰은 숲 외곽 쪽을 훑어보며 돌았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야 했다.
"······!"
꽤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의 시야에 곧 무언가가 들어왔다.
무성한 수풀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와있는 다리.
그것이 렉스의 다리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챈 톰은 안도감과 동시에 의문을 느끼며, 서둘러 가까이 다가갔다.
"렉스, 이 미친 새끼야! 여기 자빠져서 뭘 하고 있······."
톰이 수풀을 헤치고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퍼뜩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
돌연 근처에서 들려오는 괴음에 톰은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날이 밝을 때까지 톰과 렉스, 두 사람은 모두 숲에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