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9)
제르엘의 말에 엘리카는 슬쩍 로자리오의 뒷면에 자그맣게 새겨진 문장을 내려다봤다.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마음에 품은 기적은 허무히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줌의 빛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옆에 서있던 톰도 슬쩍 로자리오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용사님께서 마족과의 최후 결전에서 남기셨다는 말씀 중 하나죠? 경."
그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이 바로 엘리카의 로자리오에 새겨진 문장이었다.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마음에 품은 기적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줌의 빛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제르엘이 과거를 회상하듯 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카에게 물었다.
"그분의 말씀이 새겨져있는 로자리오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용사님을 존경하느냐?"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들의 터전을, 이 대륙을 지킨 용사를 어느 누가 존경하지 아니할까?
엘리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묵한 채 로자리오를 품에 넣었다.
옆에 서있던 톰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대륙을 구한 영웅이시잖아요. 얘도 말로는 맨날 애도 아니고, 아니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엄청 좋아해요."
"야······ 죽고 싶냐?"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든 엘리카가 톰을 죽일 듯 노려봤다.
움찔한 톰이 재빨리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제르엘에게 말했다.
"그리고 저는 제르엘 경도 엄청나게 존경합니다! 용사님과 함께 마왕을 봉인시키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업적이잖아요!"
"하하, 고맙구나. 하지만 마왕을 봉인시킨 건 용사님께서 홀로 이루신 업적이고, 나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단다."
최후의 결전에서 마왕과 원마들을 모두 상대한 인물은 용사였고, 나머지 결사대원들은 그저 잡마족들을 처리했을 뿐이다.
제르엘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준 것이었지만 톰이나 헤런은 그조차도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엘리카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고서 말했다.
"그보다 아이야,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네? 엘리카요."
엘리카가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가 이어서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 엘리카. 혹시 내게 검을 배워볼 생각은 없느냐?"
그 말에 톰과 헤런이 깜짝 놀랐다.
두 사람 모두 순간 말을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엘리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되물었다.
"······그건 혹시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제르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제자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묻고 있는 거다."
"제, 제자······."
톰이 믿기지 않아서 벙찐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휘의 기사, 교단에서 가장 높고 고결한 성기사가 지금 그녀에게 직접 제자가 될 것을 묻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헤런도 멍하니 제르엘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엘리카를 돌아봤다.
오히려 제안을 받은 당사자인 그녀는 두 사람과 달리 침착한 기색이었다.
"어째서요?"
엘리카가 제르엘에게 물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사제의 관계를 맺는다는 건 수도원에서 성기사들이 오며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정말로 제대로 된 가르침을 전수해주고 성장을 전격적으로 조력해주겠다는 뜻.
지금 제르엘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오늘 생전 처음 본 그녀에게 제자가 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르엘이 대답했다.
"아까 네 대련을 잠깐 지켜봤단다. 거기서 네 재능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다."
엘리카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재능이 제법 뛰어나다는 건 물론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와 같은 대단한 인물이 관심을 가질 정도인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께서는 저보다 훨씬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요."
제르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보통 이런 제안을 들으면 정신을 못 차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오히려 의심하며 자신을 떠보고 있으니.
아직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하여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역시 범상치 않은 아이라 생각하며, 그는 별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네 재능만을 보고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란다."
"······?"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만······ 나는 제법 감이 좋다. 그래서 감에 따라 행동할 때가 많지."
······감?
이게 뭔 말인가 싶어 세 사람은 눈을 깜박거렸다.
"이 수도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른 이유도 그 때문이란다. 이곳에서 반가운 만남을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불현듯 들더구나. 그런데 아까 전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그게 너일 것도 같더구나. 하여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농담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엉뚱하기 그지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엘리카는 그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르엘이 싱긋 웃으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겠느냐?"
"······."
침을 꿀꺽 삼킨 헤런이 엘리카를 돌아봤다.
톰 역시 시선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 제안이었으니까. 그녀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광휘의 기사의 제자가 된다니, 그 어느 신자가 이런 어마무시한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죄송합니다."
잠깐의 침묵 뒤에 엘리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설마 거절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제르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톰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리고는 다급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엘리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미쳤어?!"
엘리카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그 손을 떼어내며 이어서 말했다.
"저는 성기사가 될 생각이 없거든요. 그래서 감사한 말씀이지만 제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제르엘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까 네가 벌인 대련은 견습 성기사를 선별하는 시험인 것으로 알았는데, 혹여 내가 잘못 안 것이냐?"
엘리카가 조금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냥 열이 받아서······ 시험만 보고 정말로 성기사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제르엘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굳이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아쉽구나. 어째서 성기사가 되지 않으려는 것인지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
그에 엘리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성기사는 신을 위해서 목숨도 바쳐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그렇지."
"······제 신앙심은 그만큼이나 크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성기사가 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요."
헤런이 눈을 감고 턱 이마를 짚었다.
광휘의 기사 앞에서 신앙심 타령이라니, 수도원 사람들에게라면 몰라도 이건 그가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제르엘은 격노를 쏟아내거나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신앙심이라······."
단지 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건 아무렴 괜찮지 않나 싶구나."
"······예?"
"이건 내 솔직한 사견이다만,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맹목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세 사람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지금 모든 성기사들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광휘의 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제르엘은 웃으며 거기더 더 떠서 엘리카에게 물었다.
"혹시 이런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느냐? 세상에 여전히 고통과 절망들이 넘쳐나는데, 어째서 신께서는 일일이 구원을 베풀어주시지 않는지, 그분이 정말로 전능한 존재라면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 아닌지, 우리에게 시련을 내리고자 하시는 거라면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단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
엘리카가 그 이야기를 홀린 듯이 듣다가 물었다.
"그래서 답을 찾으셨어요?"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구나."
"······예?"
"내게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됐든 그분께서는 인류를 한 번 구원하셨고, 나는 그에 무언가 숨겨진 뜻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내 신앙심은 바로 그것이지. 신성 모독으로 여겨져도 이상할 건 없다만, 하하."
제르엘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 수도원에서 사흘 동안 머무를 생각이다. 제안은 계속 유효하니, 그 안에 생각이 바뀐다면 나를 찾아오거라. 그럼······."
그렇게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서 몸을 돌려 떠나갔다.
***
수도원에서 머무른 지도 열흘이 훌쩍 지났다.
나는 이제야 드디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데에 무리는 없었고, 몸 내부에 남았던 놈의 마력의 잔기운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한세월이 걸리겠네.'
목적지는 일단 곧장 칼데릭으로 직행할 생각이었다.
디트로데미얀과 일전을 벌인 현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직까지 아셸이 그곳에 남아있을 리는 없었으니, 달리 별 수 없었다.
세인테아의 변방인 이곳에서 칼데릭까지 이동하려면 아득히 먼 거리였기에 정말로 부지런히 이동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단지 거리뿐만 아니라 또 있었다.
'당장 가진 것도 하나도 없으니.'
바로 내일 떠나겠다고 하니 테인 사제가 약간의 경비와 식량을 싸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걸로 칼데릭까지 이동하기에는 당연히 부족할 것이었다.
일단 가까운 도시에 들러서 어떻게든 자금을 더 마련해서 경비를 벌어볼 생각이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진짜 모험가 길드에 들러서 의뢰라도 받아야 하나······.
똑똑.
고민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엘리카였다.
무슨 볼일인가 싶은데 그녀가 물었다.
"내일 떠나신다면서요?"
테인 사제에게만 말했는데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물어보려고 왔나?
"얼마 전까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더니, 몸은 다 회복되신 거예요?"
"그래, 얼추."
"음······ 그냥 잘 가시라고요. 인사나 좀 하려고 왔어요."
그녀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변명하듯이 말하고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런데 그건 아세요? 저희 수도원에 어제 엄청 대단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광휘의 기사라고."
"안다."
그야 전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알지.
그건 왜 묻나 싶은데 그녀의 뜬금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보고 제자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물었거든요."
"······?"
제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 재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 정도 거물이 관심을 가질 정도였나?
"잘 됐구나. 그래서 어쩌겠다고 했냐?"
"······아직 고민 중이에요. 원래는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람이 묘한 말을 해서요."
"묘한 말?"
"내가 저번에 신이니 뭐니 했던 거요. 신기하게 그거랑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신이니 뭐니 했던 거라면, 딱히 자신에게 신앙심이 없다는 그 이야기 말인가?
그 광휘의 기사가 그것과 비슷한 말을 했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