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8)
광휘의 기사.
성기사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교의 중심인 교황령 직속, 교단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스물의 성기사들.
잠시 동안 벙쪄있던 수도원 사람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긴가민가한 기색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교에서도 손꼽는 그런 대단한 거물이 난데없이 이런 변방의 수도원에 찾아왔다는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부정하지 않고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교단의 열여섯 번째 광휘의 기사인 제르엘입니다."
"······아, 제르엘 경!"
열여섯 번째 광휘의 기사, 제르엘.
조금이라도 교단의 명망 높은 인사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어느새 주위의 성기사들은 한껏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의 모든 전사들의 정점이나 다름없는 광휘의 기사는 같은 성기사들에게 있어선 특히 동경과 경외의 대상이었기에.
남자, 제르엘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그가 쓰러진 엘리카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괜찮느냐, 아이야?"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엘리카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모여있던 사제들 중 가장 상급자인 이가 물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제르엘 경. 한데 어째서 저희 수도원에 방문하신 건지······."
제르엘이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연입니다. 근처를 지나치다가 이곳에 수도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서 한번 들러보려 온 것뿐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수도원장님께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여나 폐라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부디 어려워 마시고 편히 대해주십시오."
사제가 다급히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모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원장님께서도 기껍게 맞이해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시선을 돌린 제르엘이 엘리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사제를 따라서 이동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어쨌든 남은 지원자들에 대한 선별 시험은 계속되었다.
***
'······광휘의 기사였나?'
나는 팔짱을 낀 채 저멀리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역시 그는 심상치 않은 레벨에 맞게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광휘의 기사, 라엘 교단에 존재하는 최정예 전력 중 하나.
교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교황 다음 권력자들인 추기경에 버금가는 이들.
'날 알아보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이미 내 외관이야 대륙에 퍼질 대로 퍼지기는 했다.
하지만 칼데릭의 군주가 세인테아 변방의 수도원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 연관을 못 짓겠지.
만약 그가 내 존재를 떠올렸더라도 당연히 그냥 착각이라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었다. 이 대륙에 흑발에 금안의 인간이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저쯤 되는 인물이 이런 변방의 수도원에는 왜 찾아온 건가 싶었다.
말하기로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것뿐이라고 했지만 다른 목적이 있는지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와 관련된 게 아닌 이상에야 알 바는 아니었기에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들어가야겠다.'
나는 대련을 관전하던 것을 관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
"정말 귀하신 손님께서 수도원에 방문해주셨군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르엘 경."
수도원장 디호드의 찬사에 제르엘은 점잖게 겸양을 표했다.
"아닙니다. 갑작스러우실 텐데도 이리 환대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이어지고 디호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저희 수도원에 찾아오신 데에 따로 어떤 이유가 있으신 건지······."
"아, 아닙니다. 정말 말씀드린 대로 우연일 뿐입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에 인근 마을에 들렀는데, 주민들이 이곳에 수도원이 있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서 변덕으로 찾아와본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시군요. 원하시면 제가 직접 수도원 이곳저곳을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습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오고 간 뒤 대화가 마무리되고, 제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디 원하는 만큼 편히 머물러주십시오."
"예, 배려 감사드립니다."
원장실에서 나온 제르엘은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서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기분 탓인가?"
그는 방문에서 시선을 거두고서 계속 가던 걸음을 옮겼다.
***
"야, 진짜 말도 안 된다. 말로만 듣던 그 광휘의 기사가 우리 수도원에 찾아오다니······!"
완전히 흥분한 채 떠드는 톰을 보며 엘리카가 혀를 찼다.
선별 시험에 떨어진 건 벌써 잊은 듯 들떠있는 모습이 왠지 짜증났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신났냐?"
엘리카의 퉁명스러운 말에 오히려 톰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럼 신나지 안 신나냐? 너야말로 뭐가 그렇게 무덤덤해? 광휘의 기사라니깐? 그것도 무려 그 제르엘 경이라고!"
"그러니까, 그 제르엘 경이 뭔데."
톰과 달리 엘리카는 교단의 유명 인사들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광휘의 기사라는 게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건 알지만 그들 각각의 정보나 일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톰이 답답해 죽으려고 할 때, 헤런이 나서서 대신 설명했다.
"마족과의 최후 결전에서 용사님과 같은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셨던 분이잖아."
광휘의 기사, 제르엘 라그니스.
그는 광휘의 기사들 가운데서도 유독 특별한 인물로 여겨지는 존재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십 년 전 마족과의 최후 결전, 용사가 마왕을 봉인시킨 바로 그 거대한 전투를 직접 겪고 살아남은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나 대단하신 분이라고! 그런 분이 지금 우리 수도원에 찾아오신 거라니깐?! 넌 손까지 직접 잡아놓고!"
물론 그 설명에도 엘리카의 반응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용사라는 말이 나왔을 때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계속해서 열띤 찬양을 이어가는 그에게 헤런이 혀를 차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괜찮냐?"
"······응? 뭐가?"
"시험 말이다, 멍청아. 그렇게 열심히 했었는데 떨어졌잖아."
톰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안 괜찮을 건 또 뭐냐? 어차피 붙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도 안 했었는데."
"웃기고 있네, 엄청 기대했으면서."
"시끄러. 뭐, 이미 지나간 일인데 별 수 없잖아. 이번이 마지막도 아니고, 더 열심히 해서 다음 번을 노리면 되지."
낙천적이기 그지없는 말에 엘리카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쏘아붙였다.
"멍청아, 그게 아니라 바리언 그 자식이 너 일부러 떨어뜨린 거잖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시험인데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니가 못 봐서 그런데 그 새끼가 분명히 너 비웃었거든? 하여튼 이 머저리는······."
"야, 야."
헤런이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고서 그녀를 말렸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수도원 뒷마당의 담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누가 듣기라도 했다간 사달이 날 수위의 욕이었다.
톰이 씨익 웃었다.
"아무튼 고맙다. 아까 나 때문에 그렇게 나선 거지?"
"······뭘 착각하고 있냐? 너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짜증나서 나선 거거든?"
엘리카가 으르렁거렸다.
그게 그거였지만 톰이든 헤런이든 굳이 더 걸고 넘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하는 거냐?"
"뭘?"
"성기사 말이야. 넌 시험 통과했잖아?"
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현재 그가 시험에 떨어지고도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데에는 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엘리카가 선별 시험에 지원하고 합격한 것.
아까운 친구의 재능의 이제야 빛을 발하겠다는 사실에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를 배반하고서 엘리카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니, 안 할 건데."
"······응?"
"안 할 거라고. 잘 생각해보니까 역시 귀찮아. 이따가 다시 찾아가서 그냥 안 하겠다고 말할 거야."
"······."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톰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야, 좀 제발······ 시험도 다 통과해놓고 안 한다고 하겠다고? 그랬다가 경들 눈밖에 나면 어쩌려고?"
"나야 아무렴 상관없지."
"그럼 너 때문에 나까지 밉보여서 다음 선별도 통과 못하면 어쩌려고?"
그 말에 엘리카가 움찔했다.
반쯤 억지이긴 했지만 아주 말이 안 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세 사람은 수도원에서 유명한 삼총사였으니.
순간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톰이 머쓱하게 말을 바꿨다.
"아니, 방금 건 그냥 농담이었고.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한번 다시 잘 생각해봐라, 응? 너도 좀 뭐라고 해봐, 헤런."
"우리가 말한다고 설득될 녀석이냐. 자기가 하기 싫으면 별 수 없지, 뭐."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엘리카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땅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에휴, 그래. 말해봐야 뭐 하냐."
톰과 헤런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잔잔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내린 헤런이 문득 엘리카의 목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엘리카, 너 목에 로자리오 어디 갔어?"
"······어?"
그녀도 그제야 깨달았는지 손을 더듬어 목 부근을 만졌다.
평소 목에 걸고 다니던 목걸이가 사라진 채였다.
"씨, 어디에 떨어뜨렸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있다. 아까 대련할 때 줄이 끊어져서 떨어졌더구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세 사람은 흠칫 놀라서 한쪽을 돌아봤다.
광휘의 기사 제르엘, 갑작스럽게 건물 벽을 돌아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였다.
"제, 제르엘 경!"
허둥지둥거리는 톰을 향해 제르엘이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의 손에는 줄이 끊긴 로자리오가 들려있었다.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나무로 만들어진 목걸이.
엘리카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가 그것을 건네주었다.
"자, 여기 받거라."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받은 엘리카는 잠시 로자리오를 내려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감사 인사를 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경."
"아니다. 그런데 그보다 그 로자리오, 어디서 받은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예? 그냥 예전에 사제님들이 주신 걸 차고 다닌 건데요."
수도원의 아이들이 교를 상징하는 물건을 장신구로 차고 다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톰은 팔찌를, 그리고 헤런은 모양은 다르지만 엘리카와 마찬가지로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제르엘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로자리오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장이 새져겨있기에 궁금해서 물어봤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