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7)
64레벨.
군주성의 고위 기사나 마법사들과도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의 강자.
나는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테인에게 물었다.
"혹시 말입니다."
"예?"
"수도원장님께서는 마법을 익히시고 계십니까?"
초감각을 끌어올리니 원장의 몸에서는 확실히 레벨에 걸맞는 마력이 느껴졌다.
체형을 보면 육체를 단련한 건 아닌 것 같았기에 마법사인 건가 싶었다.
하지만 테인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딱히 마법 같은 걸 익히시진 않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까?"
평범하다고?
수도원장이 상당한 수준의 강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면 원장이 수도원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왜?
순간 의문이 솟아올랐지만, 캐묻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기에 더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뭐 숨기고 있는 과거라도 있나?'
나는 다시 한 번 저멀리 떨어진 원장의 모습을 바라봤다.
***
시간이 흘러 선별 시험 당일.
정확히 정오 시간에 맞춰 수도원의 공터에는 몇몇 성기사와 사제들, 그리고 소년소녀들이 모였다.
지원자들을 한 차례 둘러본 수도원의 성기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견습 성기사 선발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선별의 방식은 간단했다. 시험관을 맡은 성기사와 한 차례 대련을 하여 실력을 검증받으면 그것으로 끝.
톰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주위를 둘러봤다.
지원자들은 대부분 그의 또래보다는 나이가 더 많은 소년들이었다.
견습 성기사 자리에 도전하는 건 보통 세례를 받을 때가 다 된 성년에 가까운 이들이고, 톰은 그중에 확실히 어린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성기사, 무엇보다도 검과 갑옷으로써 신앙심을 증명하는 교단의 전투 전력.
특히나 혈기 넘치는 소년들에게 있어서 성기사라는 존재는 사제보다도 훨씬 동경의 대상이었다.
견습 성기사가 된다면 수도원의 성기사들과 정식으로 사제 관계를 맺고, 훨씬 더 수준 높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주위에서는 선별에 지원하지 않은 아이들이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물론 엘리카와 헤런도 있었다.
"쟤 표정 좀 봐라, 진짜 얼빠졌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엘리카가 킥킥 웃으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톰을 가리켰다.
결국 시험에 지원한 건 세 사람 중 톰뿐이었다.
헤런은 그녀를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톰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엘리카."
"응?"
"진지하게 묻는 거야. 정말로 성기사가 될 생각 없어?"
엘리카는 인상을 찌푸린 채 헤런을 쳐다봤다.
하지만 평소처럼 쏘아붙이는 대신,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가 딱히 성기사가 될 이유가 없잖아."
"그냥 사제가 되기엔 재능이 아까우니까 그렇지. 경들도 매번 말씀하시잖아, 넌 타고났다고."
일찍이 엘리카의 재능을 알아본 몇몇 성기사들은 톰과 헤런,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성기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검술이나 마법을 배우지 않고 그저 평범한 사제가 된다면 웬만해선 평생을 이곳 수도원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기사가 되어 무예를 더 갈고닦는다면 언젠간 그 실력을 인정받아 큰 교단 지부로, 혹은 본부로도 이동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엘리카에게 가르침을 준 성기사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잠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헤런은 그것이 아까웠다. 소중한 친우가 큰 명예와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잘된 일이었으니까.
"몰라. 어쨌든 아직은 마음 없어."
나중에는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일까.
헤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어쨌든 선별 시험이 이번이 마지막인 것도 아니고,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말이야, 저거 좀 불안하지 않냐?"
엘리카가 한쪽을 슬쩍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번 선별의 시험관을 맡은 젊은 성기사가 서있었다.
헤런도 찝찝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성기사 바리언, 왜냐면 그가 평소 톰을 아니꼽게 보고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이전에 한 번 그가 톰의 검술 자세를 교정해줬었는데, 톰이 그것을 따르지 않고 다른 성기사의 가르침대로 검술 수련을 계속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톰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더 적합하도 생각하는 수련법을 따른 것뿐이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시험인데 사적인 감정을 섞지는 않겠지. 그리고 설마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겠어."
곧 시험이 시작되었다.
호명에 따라 차례로 앞으로 나선 지원자들이 한 명씩 바리언과 대련을 진행했다.
"아직 전체적인 기본 토대가 부족하다. 아쉽지만 불합격이다."
"자세는 훌륭하게 잡혔지만 검격이 너무 단순하다. 조금 더 단련해서 다음 기회를 노려보도록 해라."
"합격이다. 크게 흠 잡을 곳 없이 훌륭하군."
대련은 진검이 아닌 날을 세우지 않은 검으로 진행되었는데, 톰 앞으로는 10명 중에 오직 2명만이 통과했다.
이어서 톰의 차례가 되었고, 그는 검을 쥔 채 바리언의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바리언이 어딘가 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검술을 펼쳐보거라."
"예."
톰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곧바로 바리언을 향해 덤벼들었다.
텅! 터엉!
날이 세워지지 않은 뭉툭한 철날이 서로 부딪혔다.
다리언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톰의 검격을 모두 피하고 막아냈다.
공격이 닿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었기에 톰은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의 최선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
"그만."
1분 정도 지났을까, 다리언의 말에 톰은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다.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긴장하며 다리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단호하기 그지없게 나온 말은······.
"불합격이다."
톰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켜보고 있던 헤런의 얼굴에도 어둡게 그늘이 졌고, 엘리카는 아예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뭐? 불합격?"
엘리카가 격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톰의 실력이 명백히 부족하게 느껴졌다면 순순히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앞서 선별된 두 사람 중,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던 쪽과 톰의 실력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한쪽은 붙고 한쪽은 떨어지다니.
"검을 휘두를 때 몸의 중심이 안정적이지가 않다. 자질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 여러모로 숙련이 부족해 보이는군."
바리언이 그렇게 말하고서 한쪽을 돌아봤다.
심사를 맡은 이는 직접 지원자들과 대련하는 그를 포함해서 다른 두 성기사까지 총 3명이었다.
그러나 애매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들도 바리언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똑같은 결과를 내렸다.
"아쉽지만 불합격이다. 더 수련에 정진해서 다음 기회를 노려보거라."
톰의 실력은 붙어도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딱 합격선에 간신히 걸친 애매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바리언이 만약 합격을 내렸다면 나머지 두 사람도 어느 정도 따라서 합격을 줬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톰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불합격을 내렸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사적인 감정이 섞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톰은 그것을 따질 수 없었다.
어차피 항의해봐야 결과가 번복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 시험을 생각하면 굳이 성기사들의 눈에 밉보일 것 없이 얌전히 물러서는 게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톰은 검을 꽉 쥔 채 입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그 말만을 내뱉고는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엘리카는 보았다.
톰이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바리언의 입가에 스친 희미하기 그지없는 조소를.
으득.
이를 까득 간 엘리카가 번쩍 손을 들고서 소리쳤다.
"시험에 지원하겠습니다!"
난데없는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엘리카에게로 몰렸다.
헤런도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그녀가 완전히 열이 받았다는 걸 표정과 목소리에서 곧바로 알아차렸다.
"야, 야······ 엘리카?"
"저 빌어먹을 놈 한 방 먹여줘야겠어."
엘리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평소 가볍고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어도, 성기사가 되겠다는 꿈만큼은 진심인 녀석이었다.
바리언이 고작 사소한 악감정으로 톰을 떨어뜨렸다는 확신이 들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톰이 놀람과 당황이 섞인 얼굴로 공터의 중앙으로 다가와서 선 그녀를 바라봤고, 성기사들도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냐, 엘리카? 네가 선별 시험에 지원하겠다고?"
지금껏 성기사가 되라는 설득에도 어물쩡 넘겨오기만 했던 그녀가 갑작스레 시험에 지원하겠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톰에게서 검을 뺏어든 엘리카가 바리언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대련, 바로 부탁드립니다."
바리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좋다, 최선을 다해 검술을 펼쳐봐라."
그에 검을 치켜든 엘리카가 곧장 그를 향해서 덤벼들었다.
***
나는 막 다음 대련이 시작된 공터의 상황을 지켜봤다.
오늘 견습 성기사를 선발하는 시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잠깐 구경하고 있던 중이었다.
'친구를 떨어뜨려서 열받았나.'
시험관을 상대로 사나운 기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엘리카.
그녀는 톰이 탈락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홧김에 선별 시험에 도전한 것처럼 보였다.
레벨에서부터 알 수 있었지만 엘리카의 검술은 지원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대련 결과가 어떻게 나오려나 조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돌연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
나는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수도원 사람이 지나가는 기척이 아니었으니까. 그 기척이 품고 있는 기운은 상당히 거대했다.
【Lv. 81】
시야에 들어온 건 회색 로브를 걸친 중년 사내의 모습이었다.
수도원 사람들의 얼굴을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가 외부자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자연스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서 정중히 물어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곳 수도원의 사제님 되십니까?"
"······."
나는 그를 슬쩍 훑어봤다.
남자의 목에는 라엘 교단을 뜻하는 문양이 새겨진 로자리오가 걸려있었다. 그걸로 성직자라는 사실은 추측할 수 있었다.
허리춤의 검을 보니 성기사일까. 다른 교단 지부에서 온 인물?
뭐가 됐든 레벨만 봐도 일단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건 모를 수가 없었다. 81레벨이라니······ 누구지?
"아닙니다. 수도원에서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외부자입니다. 당신은?"
남자가 대답했다.
"저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신자입니다. 한데, 지금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가 내가 바라보고 있던 공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일단 대답해주었다.
"견습 성기사를 뽑는 선별 시험이라고 합니다."
"호오, 그렇군요. 견습 성기사라······."
남자가 나지막한 탄성을 뱉었다.
그는 수도원 안으로 들어온 용무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잠시 엘리카의 대련을 지켜보더니, 이내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뛰어난 아이로군요."
그러고는 내 옆에 서서 자연스럽게 함께 대련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그런 그를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뭐야?
***
바리언은 약간의 경악을 느끼며 공격을 방어했다.
엘리카의 전력을 다한 공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였나?'
그녀의 뛰어난 검재야 이미 수도원의 성기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나이에 비해 그렇다는 것뿐이지 아직 정식 성기사와 비교하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의 검이 하단에서 낮게 맞물렸다.
공방은 충분히 나누었다. 그만 대련을 끝내기 위해서 바리언이 검을 쳐내려는 순간이었다.
"······?!"
엘리카의 검날이 갑작스레 빙글 호선을 그렸다. 이어 곧바로 바리언의 목을 노리고 찔러들었다.
초심자의 수준을 한참 벗어난 반격에 적당히 방심하고 있던 바리언은 반응이 늦고 말았다.
대련은 당연히도 마력은 사용하지 않은 채 펼치고 있었으나, 그는 반사적으로 마력까지 끌어올려 목을 노린 일격을 쳐냈다.
차마 힘조절을 하지 못한 바리언의 검이 엘리카의 검날을 산산히 부서뜨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엘리카의 연약한 어깨가 심상치 않은 힘을 담은 검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대로면 그녀의 어깨마저 검날처럼 박살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쩌엉!
돌연 빛살처럼 날아든 작은 마력탄이 바리언의 검을 쳐냈다. 그의 검날이 마찬가지로 박살났다.
"······큭!"
검자루를 놓친 바리언이 바닥에 주저앉아 손목을 부여잡았다.
중심을 잃고 털썩 엉덩방아를 찧은 엘리카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대련을 관전하던 이들도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 못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시선을 돌렸다.
한 낯선 남자가 이쪽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경. 대련이 너무 격화된 듯하여 피치 못하게 간섭했습니다."
로브를 입은 남자는 정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왔다.
"······귀하께서는 누구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언이 적의가 담긴 눈으로 그런 남자를 노려봤다. 다른 성기사들도 경계가 담긴 눈빛을 띠었다.
힘조절을 하지 못한 건 명백한 바리언의 실수였지만, 대련에 갑작스레 끼어든 외부자에게 반응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로브의 후드를 내린 남자가 온화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던 신자입니다."
"신자라니, 어느 교단 지부에서······?"
말을 잇던 한 성기사가 남자가 차고 있는 검자루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서, 이내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순백색의 테두리 안에 새겨진 찬란한 황금빛 십자가를.
"과, 광휘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