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06화 (105/189)

조우 (5)

"아닙니다. 뭘 대단할 게 있겠습니까."

굳이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성어를 익혔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진심으로 꽤나 기꺼운 듯했다.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서류를 계속 훑어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혹시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

"이 필사해야 할 경전들을 정리하는 일 말입니다. 서류를 보면 시간만 많이 걸린다 뿐이지, 특별히 어려울 부분은 없는 간단한 일인 것 같은데."

대충 보면 단순히 경전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성어만 읽을 수 있다면 딱히 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을 작업이었다.

테인이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에단 씨에게 그걸 부탁드리기는······."

"그간 편의를 봐주셨는데 이 정도가 어렵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정말 해보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것이기도 하니 괜찮습니다."

내 하루 일과는 침대에 누워있거나 수도원 마당에서 풍경을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말한 대로 수도원에 큰 빚을 졌는데 이 정도 도움쯤이야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고.

"제가 분량을 반 나눠 맡아서 정리하면 사제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만 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테인은 잠시 고민에 잠긴 기색이었다.

하지만 눈 밑에 희미하게 다크써클마저 보이는 게,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거부할 수 없는 도움의 손길인 모양이었다.

그가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

나는 테인에게 건네받은 경전들과 종이와 펜을 챙겨서 방으로 돌아왔다.

방 한편에 있는 책상에 앉아 자리를 잡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한쪽에 경전들을 펼쳐두고, 한쪽에는 종이를 놓고서 잉크를 묻힌 펜을 끄적였다.

'길어도 내일 안에는 끝나겠네.'

구절을 찾고, 분류하여 기록하고.

단순 노동에 가까운 작업이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덜 지루하고 생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경전의 구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도 나름 있었다.

어느새 종이 한 면을 빼곡히 채운 나는 잠시 휴식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신이라······.'

지구에도 수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 종교라고 함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들은 정말로 그 실체가 명확히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섬기는 것이었으니까.

빛의 신, 라엘.

라사 세계관에 만인의 인정을 받는 유일한 교단은 그를 숭배하는 라엘 교단뿐이다.

또한 세인테아의 국교이기도 했는데, 적어도 세인테아의 영역 내에서는 라엘을 믿지 않는 이를 찾는 게 힘들 정도였다.

과거에 비해 라엘 교의 세가 훨씬 강성해지고, 믿는 신의 존재에 더욱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게 된 것에는 명확한 이유와 기점이 존재했다.

마족 세력의 대침공, 그리고 성검의 출현.

파멸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 초월적인 존재는 한 자루 검으로 인류에게 기적을 내렸다.

그리고 전쟁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단 한 명의 인간은 초월적인 힘으로 대륙에 뻗친 암운을 걷어냈고, 인류는 끝내 마왕을 봉인하고 마족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용사.'

현 성검의 주인, 만인에게 위대한 영웅으로서 칭송받는 존재.

그녀는 공식적인 설정상 이 라사 세계관의 최강자였다.

바로 그런 용사의 존재가 현재 4대 세력 간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대한 칼데릭이 세인테아를 침공하지 않고 어느 정도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그런 칼데릭보다도 우위인 전력을 지닌 마족 세력이 날뛰지 못하는 것도 전부 아직 용사가 건재하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용사가 사라지면 대륙에 다시금 거대한 혼돈이 찾아올 건 예정된 미래였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마왕과의 최후의 전투에서 심각한 후유증을 입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

"······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괜히 또 지금 처지가 우습게 느껴졌다.

이렇게 여유롭게 있을 때가 아닌데 뭔 팔자 좋게 경전 정리나 하고 있는 건지.

한시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고서 아셸을 찾아가야 하는데······.

벌컥.

그때 방으로 인기척이 가까워지더니,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저녁 식사요."

······엘리카였다.

입에 빵을 문 채로 있는 그녀가 우물거리며 말을 내뱉고는 책상으로 다가와서 손에 들고 있는 식사를 턱 내려놨다.

거침없이 내려놔서 수프 국물이 튈 뻔했기에 나는 재빨리 종이를 치웠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네가?"

원래 매번 식사를 가져다주던 수녀가 한 명 따로 있었는데, 뜬금없이 왜 이 녀석이 왔나 싶었다.

엘리카가 씹고 있던 빵을 마저 꿀꺽 삼키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대신 갖다달라고 붙잡혀서요. 저도 귀찮거든요. 아무튼 맛있게 드세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경전은 한가득 쌓아놓고서 뭘 하세요?"

그녀의 시선이 경전과 내가 기록하고 있는 종이로 향했다.

"아, 이거 그거죠? 필사할 경전들 정리하는 일. 얼마 전부터 사제님들 몇몇이서 열심히 하시던데."

"그래."

"이걸 왜 아저씨가 하고 있어요?"

"신세도 지고 있으니 그냥 돕는 거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성어는 읽을 수 있긴 해요?"

"그래."

"어떻게요? 아저씨도 성직자였어요?"

"아니다."

"그럼 어떻게 읽는 건데요?"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따로 공부했다. 이제 그만 좀 나가줬으면 고맙겠는데."

귀찮게 굴지 말고 좀 나가라고.

하지만 그녀는 어디서 또 쓸데없는 흥미가 인 건지, 나가지 않고 계속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아저씨."

"······?"

"진짜로 끝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숲에서 왜 쓰러져있던 건지."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은 날 마주칠 때마다 아직도 끈질기게 그 일에 대해서 물어오곤 했다.

"기억이 없다고 했을 텐데, 몇 번을 말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거 거짓말이잖아요."

"진실이다. 너야말로 대체 언제까지 붙잡고 늘어질 생각이냐?"

그녀가 팔짱을 꼈다.

"제가 궁금한 건 못 참아서요. 아저씨는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요. 피를 그렇게 한가득 흘렸는데 몸에 상처 하나 없었고, 옷은 아무것도 안 걸치고 알몸으로 있고."

피를 한가득 흘렸는데 상처가 없다는 건 초재생 때문이었다.

특히 그 부분에 꽂혀서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숨기고 있는 건 맞지만.'

당연히 말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그냥 무시했다.

어차피 아무리 말해봐야 들어먹지 않을 테니까.

내 반응에 엘리카가 작게 혀를 차고는 다시 기록하고 있는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침묵이 감돌다가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대륙 공용어는 놔두고 이런 문자는 도대체 왜 따로 쓰는 건지를 모르겠어요. 쓸데없이 복잡해서 익히는 데에 시간만 오래 걸리고, 아무런 실용성도 없잖아요."

나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성직자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

"전 아직 세례 안 받았으니까 정식으로 교인은 아니에요."

"어쨌든 장래에는 될 게 아니냐. 너는 성기사가 되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뭐라고요? 누가 그래요?"

"가끔 네가 친구들과 나누던 대화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던데."

그녀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서는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거든요. 톰 그 자식이 멋대로 지껄이는 이야기를 왜 아저씨도 멋대로 믿고 있어요?"

"믿은 게 아니라 물어본 거다."

"아니라고요. 뭐······ 그렇다고 해도 성기사는 아니더라도 교인이 되긴 하겠죠. 수도원을 떠나서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냥 먹고살기 위해 교인이 될 거라는 말이었다.

신앙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에 뭐 이런 녀석이 있나 싶은데, 이어진 말은 더했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신 안 믿어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슬슬 나도 호기심이 들었기에 물었다.

"신을 안 믿는다니······ 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거냐?"

엘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요. 용사가 빛의 신에게 성검을 내려받은 건 사실이잖아요."

"그렇지."

"단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신이 인류를 구원했지만,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어째서 신은 그만큼이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나서야 도움을 베풀어준 건가요?"

······그야 나도 모르지.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온 적은 없었으니까.

"만약에 신이 정말 전능한 능력이 있고, 아무런 희생 없이 얼마든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음에도 그런 거라면, 저는 그런 존재에게 무엇에서 숭고함과 경외심을 느껴야 하는 건가요? 이유도 모른 채 어쨌든 끝내 구원은 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 뿐인가요?"

그녀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사제님하고 수녀님들은 매번 같은 말을 하시더라고요. 신께서는 단지 시련을 내려주시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라고."

"······."

"그런데 그게 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인가요? 시련을 극복하면 죽은 사람들을 되살려주기라도 하나요? 이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따위 게 전부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에요."

조곤조곤하지만 이제는 약간의 분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내 시선을 받은 그녀가 입을 우물거리다가 멋쩍은 듯 화제를 돌렸다.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저씨는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딱히 별 생각 없다."

라사 세계관의 유일신, 용사에게 성검을 내려준 초월자.

그리고 이 세계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해답을 줄 수도 있을 열쇠.

빛의 신 라엘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 정도뿐이었다.

"뭐예요. 나는 성심껏 말했더니만 그 성의 없는 답은."

엘리카가 입을 삐죽였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 같은 외지인한테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거냐?"

"뭐가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거?"

"그래."

"외지인이니까 하는 거죠. 그럼 사제님들 면전에 대고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그건 또 그렇네.

"아니면 뭐,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기라도 할 거예요?"

"그럴 리가."

"그리고 뭐, 말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런 말을 대놓고 한 적은 없어도, 제 성격이 삐뚤어진 건 수도원의 사람들 대부분이 알아요."

할 이야기는 전부 끝난 듯 그녀가 책상 모서리에 기댔던 허리를 뗐다.

"아무튼 식사 맛있게 드세요. 별 쓰잘데기도 없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긴 했네요."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잊고 있었던 게 번뜩 떠올라서 그녀에게 물었다.

"저번에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는 깊게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던 것 말이다. 이유가 뭐냐?"

"아······ 그거요?"

그녀가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사실 저도 잘은 몰라요. 숲 깊은 곳에 괴물이 산다고 하더라고요."

"······괴물?"

"예전에 사제님하고 성기사님들이 여러 차례 숲에서 흔적도 없이 실종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숲 깊은 곳으로는 아무도 안 들어갈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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