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4)
"으음, 숲속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해서 데려왔단 말이지. 엘리카하고 그 아이들이."
"예, 젊은 남자입니다. 스스로 말하기로는 그냥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여행자라고 합니다."
"어쩌다 그리 됐다던가?"
"모르겠습니다.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없다고 하는데, 조금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어서 숨기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제의 설명에 수도원장 디호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거동도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몸이 회복될 때까지만 수도원에서 머물고 싶다고 합니다만······."
"그러면 별 수 없지.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편의를 봐주게. 외지인이니 조금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보기만 하게나."
선선한 수락에 사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도 신실한 그가 다치고 어려운 이를 그냥 내쳐버릴 리가 없었으니.
사제가 책상에 한가득 쌓인 서류 더미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보다 조금 쉬엄쉬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장님. 건강을 해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번에 다른 교단 지부로 떠나는 사제와 성기사들도 그렇고, 이것저것 바쁜 일들이 겹친 시기라 근래 업무에만 파묻혀있는 원장이었다.
걱정 섞인 말에 디호드가 싱긋 웃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무슨. 그리고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 마음 쓰지 말게나."
사제가 바깥으로 나가고, 다시 홀로 남은 디호드는 하고 있던 일을 계속했다.
"······."
한참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그가 힐끔 책상 아래의 수납장을 내려다봤다.
자물쇠로 잠겨있는 가장 밑쪽의 칸.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꺼내든 그가 자물쇠를 풀고 수납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반투명한 검은빛의 보석이 들어있었다.
"흐음······."
보석을 집어든 디호드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표정에는 방금까지의 온화함은 어디에도 없고 차가운 무정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방으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그는 보석을 서랍에 도로 집어넣고서 얼굴을 폈다. 이내 노크가 울렸다.
"들어오게."
다시 방문이 열리고 다른 사제가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예, 원장님. 전에 말씀하신 경전 정리와 관련해서 확인해주셔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혹시 많이 바쁘신지요?"
디호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괜찮네. 이리로 가지고 오게."
***
사정을 설명하고서 몸이 회복될 때까지만 수도원에서 머무르고 싶다고 하자 흔쾌한 허락이 돌아왔다.
나는 그날 하루와 다음날을 거의 침대에만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사제들이 찾아와서 회복 마법을 써주기는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초재생으로도 이렇게까지 회복이 더딘 걸 보면 디트로데미얀의 마력이 정말 지독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물론 원마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낸 것치고 이 정도면 굉장히 싸게 먹힌 것이었지만 말이다.
'진짜 팔자 한번 좋게 됐네.'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만 처지가 이러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움직이는 일은 조금이라도 몸을 풀어주기 위해 가끔 수도원 마당으로 나가는 일이 전부였다.
또 온종일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근질거림을 견디는 게 고역이기도 했고.
여기가 병원은 아니지만 마치 병원에서 입원해서 요양이라도 하는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
의자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마당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엘리카와 톰······ 그리고 헤런이었나.
세 사람도 나를 발견했지만 거리가 떨어져있었기에 딱히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헤런의 손에는 책이, 그리고 엘리카와 톰의 손에는 각각 목검이 한 자루씩 들려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은 짧게 몸을 풀고는 곧 서로 검을 부딪히기 시작했다.
'대련인가.'
저들 말고 몇몇 다른 아이들도 마당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건 봤었다. 장래에 성기사라도 되고 싶은 건가.
고작 하루지만, 그동안 살펴본 분위기로는 이곳 수도원은 아이들에게는 그리 엄격한 생활과 규율을 강요하지 않는 듯했다.
헤런은 근처의 바위에 기대앉아 책을 읽었고 톰과 엘리카는 치열하게 검을 부딪혔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대련을 지켜봤다.
【Lv. 11】
레벨은 엘리카라는 소녀가 소년 둘보다 더 높았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마력도 느껴지는 게 유일하게 마력을 쌓는 법도 익힌 모양이었다.
전부 리곤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리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리곤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수준들이었지만 녀석은 애초에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어디 명문가의 자제처럼 체계적이고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저 정도면 상당한 레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타악!
얼마 지나지 않아 톰의 검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검을 놓친 그가 요란스레 손을 파닥이며 투덜거렸다.
"야, 제발 살살 좀 하자. 손아귀 찢어질 뻔했잖아."
그에 엘리카가 피식 코웃음을 치고는 헤런을 돌아봤다.
"아직 몸 덜 풀렸는데, 너도 한판 할래?"
"사양할게."
그들은 잠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근처로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뭔 볼일인가 싶은데 톰이 먼저 힘차게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움직이기 힘들다면서 여기엔 왜 나와서 있으세요?"
엘리카의 물음에 짧게 대꾸했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 나왔다."
흐음, 콧소리를 내뱉은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괜한 의심을 받기 싫으면 너무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저씨는 수상한 외지인이니까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딱히 돌아다닌 적도 없다."
고작해야 마당에 나와서 앉아있던 게 전부인데 무슨.
그리고 바깥으로 나오면 항상 주위에 있는 사제나 성기사들의 눈길을 받고 있다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더 상대하면 귀찮아질 것 같았기에 그만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아, 잠깐만."
갑자기 엘리카가 손을 뻗어서 내 어깨를 붙잡고 당겼다. 순간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 억센 손길도 아니었지만 걷는 게 고작일 정도로 몸에 힘이 없었던 탓이다.
터억.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나를 엘리카가 다급히 붙잡았다.
가만히만 있어도 몸이 쑤시는데 등을 타고 찡 격통이 올라왔다. 인상이 절로 일그러졌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받친 등에서 손을 뗐다.
"······별로 힘도 안 줬는데. 아무리 그래도 뭐가 이리 허약하세요?"
"야, 엘리카."
헤런이 뻔뻔하게 말하는 그녀를 말렸다.
나는 쯧 혀를 차고서 물었다.
"뭐냐?"
"혹시나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는 깊이 들어가지 마시라고요. 거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거든요."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유를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엘리카, 톰!"
수도원 건물이 있는 쪽에서 한 수녀가 소리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두 사람이 다급한 얼굴이 되서는 곧장 반대편으로 뛰어 도망쳤다. 헤런도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뒤를 따랐다.
곧 가까이 다가온 수녀가 숨을 고르며 내게 물었다.
"혹시 저 아이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던가요?"
"검술 수련을 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들이 도망친 방향으로 다시 뛰어갔다.
멀어지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다른 할 일이 있는데 팽개쳐두고 농땡이를 부린 모양이었다.
***
수도원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회복에만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전히 움직이는 데에는 뻐근함이 있어도 몸을 지속적으로 찌르는 고통은 거의 사라졌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서 수도원 내부를 돌아다니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앞쪽에서 바닥에 떨어진 책과 서류들을 줍고 있는 사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테인 사제였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거들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에단 씨. 감사합니다."
그가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전보다는 방에서 자주 나오시는 것 같습니다. 몸은 많이 회복되셨는지요?"
"예, 편의를 봐주신 덕분에."
나는 떨어진 책들을 주워들며 자연스레 제목들을 훑었다. 아무래도 성경 같은 책인 모양이었다.
"이걸 혼자서 다 옮기고 계셨던 겁니까?"
"하하, 예. 무리해서 한 번에 가져가려다 보니 그만······."
뭘 하려고 이 많은 책을 옮기고 있는 건가 궁금증이 솟아오르는데,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그가 설명했다.
"경전을 필사해야 되는데 그 전에 먼저 정리해야 될 것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경전 필사?
순간 그런 짓을 왜 하나 싶었다가 바로 이해했다.
이 세계에 인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찍어내려면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써야 할 테니 말이다.
'아니면 뭐 활자판 같은 것도 있으려나.'
나는 책들을 전부 줍고 종이 서류도 집어들며 내용을 슥 훑었다.
대충 훑어보니 경전의 구절들을 정리한 내용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신이라고 칭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정말로 실존하는 세계다. 그렇기에 새삼 갑자기 흥미가 솟아올랐다.
잠깐 종이에 정리된 구절들을 읽는데 옆에서 책을 모두 정리한 테인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에단 씨, 혹시 성어를 읽을 수 있으신 겁니까?"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말에 나는 기억 저편에 있었던 라사의 설정을 하나 떠올렸다.
'교단에서는 대륙공용어와 별개로 성어도 함께 사용했었지.'
교단은 오래 전부터 사용한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성어였다.
기본적으로 대륙 공용어를 베이스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훨씬 더 난해하고 까다롭다는 문자.
그래서 그런 성어를 완전히 숙달하는 게 성직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가장 큰 난관 중에 하나라고 했던가.
'······난 왜 잘 읽히지?'
나는 다시 한 번 종이에 적힌 내용들을 훑어봤다.
다시 살펴보니 대륙 공용어와는 유사하지만 분명히 다르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별 문제가 없이 술술 잘 읽혔다.
이것도 기본적으로 대륙 공용어가 바탕이니까 해석이 되는 건가?
"예,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대답에 테인이 눈에 이채를 띄고서 날 부담스레 쳐다봤다.
"성어를 읽을 수 있으시다니, 혹시 에단 씨께서는······."
그제야 나는 쓸데없는 오해를 샀음을 깨달았다.
성어는 성직자가 아니고서야 익힐 일이 없는 문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성어를······?"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익혔을 뿐입니다. 제가 고대어라든가 이런저런 문자들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해서."
"아, 그러신 거였군요."
테인이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전히 눈빛에는 적잖은 호의가 담겨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정말 노력이 대단하십니다. 총명함을 타고난 수재들도 성어를 완전히 익히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리는데, 그것을 신앙심이 아닌 단순히 탐구심으로 익히셨다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