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3)
슬며시 방문을 열고서 방으로 들어온 건 세 사람이었다.
대충 열넷다섯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어린 소년 둘과, 소녀 한 명.
"어, 진짜 일어났네."
그중 덩치가 큰 소년이 나를 보고는 조금 놀란 듯 중얼거렸다.
얘들은 또 뭔가 싶어 쳐다보니, 이번엔 소녀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앉았다. 그러자 소년들도 가까이 다가와서 소녀의 근처에 섰다.
의자에 거꾸로 앉은 채 등받이에 팔을 걸고 나를 빤히 쳐다보던 소녀가 곧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
아저씨?
참으로 생소하기 그지없는 호칭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는 너희는 누구냐?"
그에 덩치 큰 소년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저는 톰인데요. 그리고 얘는 헤런, 얘는 엘리카예요.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에단이다. 그리고 너희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만."
헤런이라 불린 소년이 한심하다는 듯 톰이라는 소년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저희는 이 수도원에서 지내는 성직자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숲속에 쓰러져있던 걸 발견한 게 저희예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사제가 아이들이라고 했었나?
정신을 잃고 있던 날 발견했다는 아이들이 이들이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반응은 그게 끝이에요? 뭐 감사 인사는 없어요?"
잠시 물끄러미 세 사람을 쳐다보는데, 엘리카라는 소녀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정말 고맙다. 덕분에 살았구나."
어쨌든 이들이 날 발견하지 못했으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무슨 봉변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확실히 큰 도움을 받은 것이기에 나는 짧게나마 진심을 다한 감사를 건넸다.
'수도원에서 키우는 아이들인가.'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성직자들이 생활하는 장소지만,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서 키우기도 하는 요람이기도 했다.
게임에서도 수도원에 방문하면 대부분 보육원처럼 관리하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는 정식으로 성직자가 되고.
나이가 어린 걸 보니 이들도 아마 그런 쪽이 아닌가 싶었다.
그때 시큰둥한 기색으로 고개를 까닥인 소녀가 내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다시 물어왔다.
"그래서, 아저씨는 누군데 숲속에서 그렇게 쓰러져있던 건데요? 마을 주민은 아니죠?"
나는 아까 사제에게 둘러댔던 그대로 대답했다.
"그냥 근처를 지나가던 여행자다. 어쩌다 숲속에 쓰러졌던 건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소녀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기억이 안 난다고요? 거짓말 아니에요?"
"아니다."
"아니면 왜 기억이 안 나는 건데요. 너무 핑계 좋은 변명 같잖아요. 뭔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기억을 잃은 사람치고는 너무 상태가 평온한 것 같은데요?"
내 말을 믿을 생각이 없는지 끈질기게도 캐물어오는 소녀였다.
나는 슬슬 귀찮음을 느끼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쓰러지기 전까지의 짧은 순간만 기억이 없을 뿐이니까. 그리고 나도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에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째려보던 소녀가 말했다.
"그럼 그냥 변태로 알게요."
"······뭐?"
"걸친 것 하나 없이 알몸으로 쓰러져있었잖아요. 그게 변태가 아니고 뭔데요?"
나는 완전히 황당한 눈으로 소녀를 쳐다봤다.
알몸으로 쓰러져있었다니, 이건 대체 또 무슨 소리······.
'······아.'
그러고 보니 그랬나?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니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딴 사소한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지만······ 분명히 나신이긴 했었지.
당연한 일이었다. 불꽃에 몸뿐만 아니라 옷까지 싹 다 타버렸으니.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도 다른 옷이고.
'잠깐만.'
그럼 얘들은 내가 나체로 쓰러져있던 걸 여기까지 옮겨왔다는 거야?
절로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흘러나왔다.
"뭔가 캥기는 게 있으니까 기억 안 난다고 얼버무리고 대답을 피하는 거잖아요. 맞죠?"
"아니······."
"아니면 뭐 제대로 대답을 해주세요."
약간의 쪽팔림, 그리고 황당함과 억울함이 뒤섞여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 헤런이라는 소년이 나서서 소녀를 말렸다.
"엘리카, 그만해. 너무 무례하잖아."
그제야 그녀는 한 차례 콧방귀를 뀌고는 쏘아붙이기를 관뒀다.
꼬르륵.
그때 난데없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내 배였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님한테 식사라고 갖다달라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나는 덧붙여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싫은데요? 대답 듣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소녀가 혀를 내밀고는 몸을 돌려 방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소년 헤런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원래 예의가 없는 녀석이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맞아요. 수도원에서도 쟤만큼 막 나가는 놈이 없다니까요?"
소년 톰이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가 소녀의 험악한 시선을 받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푹 쉬세요. 저희는 가볼게요."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세 사람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방문 너머로 그들의 기척이 멀어지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 혹시 귀족 나으리인 거 아니야? 분위기가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지 않았어?
- 귀족이 왜 수행원 하나 없이 혼자서 숲을 떠돌고 있었겠냐.
- 음······ 그런가? 그래도 엘리카 말대로 적어도 변태 같은 건 아니겠지. 말끔해진 얼굴 보니까 엄청 잘 생겼는데.
- 뭔 소리야, 얼굴이 저러니까 오히려 더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거지.
······저건 끝까지 저러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다시 방문이 열리고 한 수녀가 식사를 가지고서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건네고서 식사를 받아들었다.
빵과 버터, 그리고 고기가 든 수프.
생판 외부인한테 대접해주는 식사치고는 상당한 진수성찬이었다.
몸에 힘도 없고 허기가 졌기에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일단 먹고 보자.
***
아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숲을 내려다봤다.
날이 밝고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마음에 차오르는 불안함과 초조함을 애써 억눌렀다.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7군주의 명령대로 띠용이를 타고서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졌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현장에 남아있던 건 완전히 폐허가 된 일대와, 그가 상대했던 정체불명의 마족의 시체뿐이었다.
7군주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증발하듯 사라져서 전혀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계속해서 인근 지역을 뒤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7군주의 모습은 온데간데 찾을 수가 없었다.
슈우우우.
결국 몇 번을 돌고 돌아서 아셸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7군주가 사라진 현장을 지키고 있던 정보원 세룬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세룬은 무언가 소득이 있냐 물으려다가, 어둡기 그지없는 아셸의 표정을 확인하고서 관두었다.
아셸이 참담한 눈으로 마족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족의 정체는 원마 중 하나, 그것도 서열 7위의 마족이라는 사실은 이미 세룬에게 들었다.
대군주성 직속 정예 정보원인 그녀에게 원마쯤 되는 거물의 정체를 외관적 특징만으로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그때 세룬이 아셸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계속해서 이곳에 머무르시는 건 위험합니다. 마탑주의 죽음도 그렇고, 원마 중 하나가 직접 모습까지 드러냈으니······."
마탑 측의 다른 마법사들이 언제 이곳으로 올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마족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세룬의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현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건 아셸 때문이었다.
침묵하던 아셸이 입을 열었다.
"······아직 론 님을 찾지 못했다."
"7군주님께서 신변이 멀쩡하셨다면 먼저 모습을 드러내셨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하지만 날이 다 밝도록 지금까지······."
아셸이 홱 고개를 돌려 세룬을 노려봤다.
전신을 찔러오는 살기에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론 님께서는, 이번 일이 대군주가 직접 맡긴 일이라고 하셨다."
"······."
"설명해봐라. 혹시 이건 대군주의 수작이냐? 론 님을 처리하기 위해 대군주가 판 함정이 아니냐는 말이다."
아셸은 살기를 거두기는 커녕 더욱 흉흉하게 뿜어내며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룬이 간신히 입을 열고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닙니다. 저도 7군주님께서 이곳에 오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
"부디 진정하시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주십시오. 대군주님께서 7군주님을 해치려고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세룬의 간절한 항변에, 아셸은 천천히 기운을 거두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자신의 말이 완전히 억지라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마탑주에게 쫓기던 세룬을 마주친 것도 완전히 우연에 가까웠다. 대군주가 그것조차 계획했다는 건 뭔가 많이 맞지 않았다.
단지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화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설마,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은 하기 싫었다.
아셸은 결코 7군주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히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있을 것이라 믿으며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크르릉.
옆에서 들려오는 한껏 잠긴 울음소리에 그녀는 띠용이의 목을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분명히 살아계실 거다. 그리 쉽게 죽으실 분이 아니니······."
***
식사를 마친 뒤, 힘겹게 걸음을 옮겨 수도원 밖의 마당으로 나온 나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짜 답이 없네······.'
일단 목숨은 건진 건 다행이었지만, 처지가 참 곤란하게 됐다.
'지금쯤 아셸은 뭘 하고 있으려나.'
내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으니 아마 내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죽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고.
실상은 마족 놈의 능력에 휘말려 여기로 순간이동되었을 뿐이지만 그걸 그녀가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군주성으로 돌아가든가 해야 되는데, 띠용이도 없고 거리가 너무 머니 한참이나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몸도 성치가 않고.'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에도 몸은 재생을 계속했는지 외상은 완벽하게 치유된 듯했다.
문제는 내상이었는데, 워낙 심하게 당해서 그런지 당장은 몸을 조금 거동하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걸음 좀 옮기는 데에도 땀이 다 날 정도였으니.
한마디로 당장은 이동하는 게 여의치가 않았다.
차라리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떠나는 게 당장 서둘러 떠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었다.
'······일단 여기서 조금 머물러야 되나?'
나는 한편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시선을 느끼며 생각했다.
수도원 건물 근처에 서있는 성기사의 시선이었다.
일단 이들 입장에서 나는 완전히 외부인이니 최소한의 경계를 받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쫓을 생각은 없는 듯하니, 양해를 구하고 잠깐 동안 신세를 지기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