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2)
'저게 뭐야?'
순간 잘못 봤나 싶었지만 분명히 사람이 맞았다.
우뚝 걸음을 멈춘 엘리카는 경계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달리 더 보이는 게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람을 향해서 다가갔다.
쓰러진 사람은 젊은 남성이었다.
엘리카는 눈을 깜박거리며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도 그럴 게, 남자의 주위 바닥에는 시뻘건 핏물이 흥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미약하게나마 숨소리가 들리는 게,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상처는 없는 것 같은데?'
엘리카는 의아한 눈으로 남자의 전신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바닥에 이리 핏물이 흥건한데 이상하게도 눈에 띄는 외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정면에 상처가 있나 싶어 슬쩍 발로 밀어 몸을 뒤집어봤다.
하지만 정면에도 굳은 핏자국만 덕지덕지 묻어있을 뿐이지 역시 눈에 띄는 상처 같은 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하체 쪽으로 향했다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몸을 원래 상태로 슬쩍 도로 뒤집었다.
"······."
뭘 어떻게 해야 되지?
엘리카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런 숲속에 난데없이 사람이, 그것도 알몸으로 쓰러져있는 게 전혀 예사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행인도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외진 지역이었다. 가끔씩 들르는 외부인이라고는 근처 마을에 있는 주민들이 전부였다.
'아무리 봐도 마을 주민은 아닌데······.'
일단 기억에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미려한 얼굴과 새하얀 피부, 언뜻 봐도 애초에 시골 마을의 주민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그리고 왠지 몰라도 묘하게 고상함이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엘리카는 다시 발을 뻗어서 남자의 몸을 쿡쿡 찔러봤다.
"저기요······ 이보세요?"
미동도 없는 게 정신을 차릴 기미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물이라고 퍼다가 얼굴에 쏟아봐야 되나 생각이 스쳐갈 때였다.
문득 들려온 소리에 엘리카는 흠칫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르르.
수풀 사이로 어느새인가 모습을 드러낸 갈색 털 짐승 몇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숲에 서식하는 들개 무리였다.
피냄새를 맡고 몰려왔나? 보통 숲 외곽까지 맹수들이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주위 땅바닥을 둘러봤다. 도끼는 던져두고 왔기에 손에 들린 무기가 없었다.
다행히 곧 굵직한 나무 막대 하나를 발견하고 잽싸게 집어들었다.
"이 개새끼들이, 안 꺼져?"
막대를 붕붕 휘둘렀지만 들개들은 물러서지 않고 슬금슬금 접근해왔다.
그에 엘리카는 위협을 관두고 두 손으로 막대를 잡은 채 자세를 잡았다.
굶주려서 눈깔이 돌아가기라도 한 건지 들개들은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잠시 대치가 이어지는 중, 뒤쪽에 있던 들개 한 마리가 기습적으로 뛰어들었다.
엘리카는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몸을 돌리며 막대를 휘둘렀다.
케헹!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들개가 바닥에 튕겨 굴러가다가 추욱 널브러졌다.
그에 다른 들개들은 컹컹거리며 짖다가 덤비기를 포기하고는 몸을 돌려 도망쳐버렸다.
엘리카는 한숨을 돌리며 막대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때 한쪽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톰과 헤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 괜찮냐?!"
이쪽으로 오는 중에 들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급히 달려온 두 사람이었다.
엘리카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젓고는 다시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온 두 사람도 그녀의 주위에 쓰러진 남자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야? 그 사람은?"
톰이 엘리카와 남자를 번갈아 봤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설마 기어코 일은 저지른 거냐? 너 사람을 죽인 거야?"
"지금 장난이 나오냐?"
헤런이 톰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물었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엘리카?"
"나도 몰라. 그냥 숲속에 쓰러져있었어. 보니까 일단 숨은 쉬고 있는데······."
헤런이 심각한 얼굴로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상태를 살펴보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이 피는 다 뭐지?"
톰도 옆에 서서 남자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말했다.
"그보다 대체 뭔데 죄다 헐벗은 꼴로 쓰러져있는 거야? 주위에 벗어둔 옷가지도 없는데? 도적들한테 당한 건가?"
"이 인근에 도적들이 어디 있다고?"
"아니, 근데 그거 말고는 딱히 없잖아. 속옷 한 장 안 남기고 싹 털어가는 지독한 놈들한테 걸린 게 아니고서야, 왜 이런 데서 알몸으로······."
엘리카가 끼어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어떻게 할 거야?"
톰이 냉큼 대답했다.
"어쩌긴 뭘 어째? 빨리 사제님들한테 데려가야지."
헤런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무작정 데려갈 게 아니라 사제님들을 이곳으로 모시고 오자."
"왜?"
"정체도 모르는 외지인이잖아. 너희 마을 주민들 중에 이런 사람 본 적 있어?"
"아니, 없긴 한데······."
"그러니까 신중해야지. 일단 숨은 붙어있으니까 빨리 수도원으로 돌아가자고."
그때 엘리카가 물끄러미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냥 바로 데려가자."
"······어?"
"주위에 핏자국도 그렇고 위급한 상태일 수도 있잖아. 더 시간 끌었다가 죽어버리면 어떡해?"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남자의 몸을 붙잡았다.
그에 톰이 흠칫 놀라며 재빨리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야, 내가 옮길게."
"그러든가."
"······뭐 덮을 거라도 줘봐, 헤런. 이대로 그냥 둘러메고 갈 수도 없잖아."
헤런은 한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상의를 톰에게 던져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정체불명의 남자를 데리고서 빠르게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낯선 천장이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가 느껴지는 격통에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소?"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웬 경갑을 입은 기사가 서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사람을 불러올 테니."
뭘 붙잡고 물을 틈도 없이 그는 곧장 방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잠시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뭐야?'
여기가 어디지?
나는 몽롱한 정신을 바짝 일깨우고서 기억을 더듬었다.
디트로데미얀과의 전투, 놈을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서 했던 도박.
그리고 전부 다 끝나고 보니 난데없이 눈앞에 펼쳐졌던 낯선 장소.
"······."
기억을 더듬었지만 상황이 잘 정리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혼란스러움 속에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방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아까 그 기사와, 사제처럼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 다른 남자였다.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금세 일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숲속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계시던 걸 수도원의 사람들이 발견하여 이곳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수도원?"
"예, 이곳은 수도원입니다. 혹시 몸 상태는 괜찮으십니까?"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은 와중에도 나는 일단 대답하려다가,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조금 움직이려고만 해도 송곳으로 사정없이 쑤시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좋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으음, 눈에 띄는 외상은 없던데······."
"······그보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내 물음에 그가 다시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수도원입니다. 로벨지오 수도원입니다."
"그게 아니라······ 어느 지역인지를 묻는 겁니다."
"지역? 그게 무슨······?"
"이곳은 가드렛 시요?"
그가 뭔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드렛이라면······ 혹시 세인테아 서부의 마탑이 위치한 도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은 세인테아 남동부 변경의 포스턴 령입니다만."
그 말에 나는 벙찐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인테아 남동부 변경? 포스턴 령?
가드렛 시와는 완전히 정반대에 떨어진 장소라는 게 아닌가.
마탑주, 그리고 디트로데미얀과 전투를 벌인 장소는 분명 가드렛 시 인근이었는데,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우시다면 대화는 조금 뒤로 미루시겠습니까? 얼마든지 더 휴식을 취하셔도 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며 대략적이나마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일단 이곳은 세인테아 남동부 변경 지역에 위치한 로벨지오 수도원이라는 곳이었다.
그리고 숲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나를 수도원의 사람들이 발견하고서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라고.
남자의 이름은 테인으로 수도원 소속의 사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내게도 이름을 물었다.
나는 론이라고 말하려다가 다른 이름을 말했다.
"에단입니다."
"에단 씨였군요. 혹시 어쩌다 숲속에서 정신을 잃고 계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뭐 하는 놈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다가 대답했다.
"······그냥 근처를 지나가던 떠돌이입니다. 왜 정신을 잃은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남자는 순순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도 그는 내 몸 상태에 대해서 더 염려스러운 기색을 표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성직자라서 그런지 생판 처음 보는 남한테도 이리 친절한가 싶었다.
"몸은 괜찮으니, 잠깐만 혼자 쉴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절 도와주신 건 정말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저 말고, 에단 씨를 발견해서 데려온 아이들에게도 나중에 따로 감사를 전해주십시오."
······아이들?
그는 싱긋 웃으며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부르라는 말만 남기고는 기사와 함께 도로 방을 나섰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대체 뭐가 뭔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왜 뜬금없이 세인테아 서부에서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이동된 걸까. 무슨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순간이동?'
잠깐만.
그러고 보니 마지막 순간에 디트로데미얀의 공간 절단의 휘말렸지 않았던가.
설마 그거랑 무슨 관련이 있나?
공간 절단이 부동 장막을 뚫지 못해서, 아예 통째로 공간 저편으로 날려버리기라도 했다던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놈의 공간 절단에 휘말린 게 원인이라는 것만큼은 맞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멀리 떨어진 장소까지 난데없이 텔레포트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돌겠네, 진짜······.'
나는 난감함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편으론 그래도 목숨은 붙어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있었다.
불꽃에 휘말려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몸이 타버렸던 걸 생각하면, 정신을 잃고서 그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했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또다시 방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