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1)
······닿았다.
주위에 자색의 기운이 피어오른 것과, 디트로데미얀의 몸체가 휘청거린 건 거의 그와 동시였다.
이보다 더 레벨이 높은 고대의 대마법사도 단번에 절명시켰던 즉살이다. 아무리 원마라고 한들 다를 건 없었다.
놈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조금의 여유도 없이 곧바로 부동 장막을 펼쳤다.
주위에 펼쳐진 불꽃은 주인이 죽었다고 해서 곧바로 사그라들지 않았다.
곧바로 공간 도약으로 빠져나오는 게 최선일 테지만 불가능했다.
도망만 다니다가 횟수 하나가 충전되자마자 간신히 시도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더는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시야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이기 직전에 보인 팔은 피부가 근육이 타버리고 거의 뼈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고작 눈 한 번 깜박거릴 만큼 짧은 시간, 하지만 그 아주 짧은 찰나 동안에도 멸겁의 불꽃에 고스란히 노출된 몸은 만싱창이라는 표현으로도 한참 부족할 정도의 처참한 꼴이 되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불에 타는 고통이라고 했던가?
이런 와중에도 어디선가 들었던 쓸데없는 정보가 머릿속에 스쳐갔다.
지금 내 몸을 불태우고 있는 게 진짜 불꽃은 아니겠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작열통도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지금 나는 말 그대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고통에 날아가기 직전인 의식을 그나마 붙잡고 있게 해주는 것은 아마 제왕의 혼일 것이었다.
'씨······ 바알······.'
이대로면 진짜 죽겠다 싶으면서도 조금만 더 버티자며 정신을 꽉 붙들어맬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돌연히 부동 장막을 한껏 짓누르는 압력이 느껴졌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나는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또 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막에 전해지는 충격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설마 부동 장막이 뚫린다고?
여태 공격들을 잘 막아내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싶었는데,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디트로데미얀과 접촉하는 순간 주위에 펼쳐졌던 자색의 기운.
놈은 숨이 바로 끊어지기 바로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공간 절단을 펼친 것이었다.
'설마······.'
그럼 지금 장막을 압박하고 있는 게 공간 절단의 능력인 건가?
버티면 버틸수록 이대로 몸이 찌부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막에 전해지는 충격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막을 풀어버릴 수도 없었다. 그때는 뭘 해볼 틈도 없이 한순간에 소멸해버릴 테니까.
몸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잔불에 타오르고 있고, 밖에선 뒤틀리는 공간이 날 집어삼키려고 발광하고 있고.
나는 완전히 옴짝달싹 못하게 된 채 슬슬 한계에 치닫는 의식만을 겨우 붙잡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1초가 1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그 영겁의 지옥 속에서, 어느 순간이었다.
'······?'
어느 순간 장막을 누르던 압력이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아직 타버린 눈이 재생되지 않았기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장막이 뚫리기 전에 기운 쪽이 먼저 소멸한 건가?
계속 이대로만 있을 수도 없었기에,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끝내 장막을 해제했다.
"······커허업!"
다행히 장막을 풀자마자 온몸이 찌부러져 최후를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몸을 내던지듯 쓰러져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꼴사납게 헐떡이고 있자니 암흑천지였던 시야가 서서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불꽃이 거의 사그라들고, 시뻘건 거품이 부글부글 끓으며 재생되고 있는 팔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몸 전체가 거의 그런 꼴로 반쯤 시체나 다름없었다.
'미친······.'
이런 상태로 용케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게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쓰러진 채로 호흡만 겨우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몸이 재생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뼈 위에 타버렸던 근육과 살이 도로 덧씌워지고, 피부도 불완전하게나마 어느 정도 재생이 되었다.
나는 눈가를 더듬으며 완전히 탈진된 몸을 일으켰다.
"으······."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로 땅바닥을 짚고서 상체만 간신히 일으켰다.
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투의 여파로 폐허가 된 숲은 온데간데 없고, 방금까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멀쩡한 숲속의 풍경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어야 할 디트로데미얀의 시체까지도 사라져있었다.
'뭐······.'
놈의 시체도 공간 도약에 함께 휘말려 사라진 건가?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애초에 풍경 자체가 달랐다. 여긴 내가 방금까지 있던 숲이 아니라, 아예 다른 장소였다.
"······."
아예 다른 장소라고?
나는 혼란에 빠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몸에 힘이 풀려서 도로 쓰러졌다.
아직 불꽃의 여파가 남아있는 게 느껴졌다. 몸이 재생은 됐지만 내상까지 치료되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재생하는 데에 체력을 전부 쓰기라도 한 건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방금 조금 움직인 게 마지막 남아있던 한 줌이었는지 더 이상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곧 의식도 급격히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놓치면 죽으니 간신히 붙잡고 있던 거지 정신은 진작 한계에 몰려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나는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
어두운 공간.
한 여인이 눈을 감은 채 정좌를 하고서 앉아있다.
그 앞에는 황금빛을 발하는 한 자루 검이 바닥에 꽂혀있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그 황금빛의 기운은 여인의 주위를 구 형태로 장막처럼 뒤덮고 있었다.
"······."
돌연 여인의 눈이 뜨였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 아주 천천히.
그러나 감겨있던 눈꺼풀 속에서 드러난 눈빛은 더없이 맑고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한참이나 빈 허공을, 혹은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뻗어 검을 뽑아들자 황금빛의 기운은 이내 흩어지며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여인이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공간에 울려퍼졌다.
"······어쩔 수가 없구나."
***
로벨지오 수도원의 가네샤 수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 예배를 마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이른 오전.
수도원의 말썽 심한 어린양 하나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하루의 시작부터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카, 아침부터 렉스의 코뼈는 왜 부러뜨린 건지 설명해줬으면 좋겠구나."
그녀의 앞에서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서있던 소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딱히 부러뜨리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얼굴을 때렸는데 그 약골의 뼈가 제 주먹보다 물컹했을 뿐이죠."
가네샤는 마음에 인내를 새기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 뭐가 됐든 렉스의 얼굴은 대체 왜 때린 거니?"
"그 병신이······."
"엘리카."
"······그 머저리가 자꾸 제 신경을 긁잖아요. 수녀님도 그놈이 저하고 주변 애들한테 핏줄 천한 천민들이라고 지껄이고 다니는 거 아시잖아요?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라고요."
가네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렉스는 얼마 전에 수도원에 새로 들어온 소년이었다.
세인테아 북부의 귀족 출신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아이였는데, 여전히 주변에 날을 세우며 좀처럼 수도원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다 비슷비슷한 처지에 시비가 붙어도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소녀처럼 전부 그렇게 순한 성격인 건 아니었기에 종종 충돌이 일어나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오늘은 그게 유독 심했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네가 내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폭력은 결코 휘둘러선 안 되는 거라고 했지 않니."
"저도 최대한 노력했어요."
가네샤가 엄한 눈빛에 소녀, 엘리카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경전에도 있는 내용이잖아요? 네 혈육을 사랑하고, 동료를 사랑하고, 그리고 너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그래, 그런데 왜?"
"그런데 제 핏줄을 욕보이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건 혈육과 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저는 교리대로 충실히 따른 거······."
"엘리카!"
"죄송해요. 반성하고 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결국 가네샤가 폭발하자마자 곧바로 태세를 전환해서 고개를 숙이는 엘리카였다.
가네샤는 몇 차례나 푹푹 한숨을 내쉬다가 타이르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너무 심했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
"······."
"점심까지 숲에 가서 나무를 해오렴. 또 한 번 폭력을 휘둘렀다가는 이 정도 벌로 끝내지 않을 거란다. 알겠지?"
전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엘리카는 더 대꾸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나가보려무나. 소리친 건 미안하다."
"네, 저도 죄송해요."
방에서 나온 엘리카는 머리를 벅벅 긁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원 밖으로 나오자 마당 한편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던 한 소년이 동작을 멈추고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여, 탈출했냐?"
무시하고 지나쳐가는 그녀에게 소년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러게 적당히 힘조절을 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코뼈를 뿌러뜨리는 건 심했잖아? 안 그래도 못생긴 녀석한테 그게 무슨 가혹한 짓이냐고."
그때 근처의 바위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다른 소년도 다가와서 물었다.
"수녀님께서 뭐라 말씀하셨어?"
엘리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가서 점심까지 나무 해오래."
"에이, 뭐야? 별 징계도 안 받았네. 하여튼 수녀님께서는 너무 봐주신다니까. 어디에 한나절은 가둬놔야 말을 들을 텐데······."
"시끄러."
엘리카가 발목을 걷어차려는 듯 발을 들어올리자 다시 까불거리던 소년이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평소에도 많이 차인 듯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까불거리는 소년의 이름은 톰, 그리고 책을 읽고 있던 소년의 이름은 헤런이었다.
"뭐, 어쨌든 그럼 가자고. 도와줄게."
잘못을 저지른 건 엘리카뿐이었지만 다른 두 사람도 당연하다는 듯 도끼를 챙겨서 함께 숲으로 이동했다.
세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수도원에서 함께 자란 사이로, 뭘 하든 항상 붙어다니는 로벨지오 수도원의 삼총사나 마찬가지였다.
퍼억!
자리를 잡고 한참 나무를 패는 중, 톰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근데 너희 그건 들었냐? 이번에 클렌덤 성기사 님께서 세인테아 수도에 있는 교단으로 간다고 하시던데."
"들었지. 워낙 대단하신 분이니 이상할 건 없잖아."
클렌덤은 수도원에 있는 성기사들 중 실력이 뛰어난 젊은 성기사였다.
"햐, 나도 언젠간 정식으로 성기사가 되서 대단하신 분들께 부름을 받고 싶은데."
"꿈 깨라. 네가?"
"내가 뭐가 어때서? 엘리카 빼고 내 또래 중에 나보다 더 검 잘 휘두르는 사람 있어?"
묵묵히 나무를 패고 있던 엘리카에게 톰이 물었다.
"그보다 엘리카, 너는 어때? 너는 성기사가 되고 싶지 않냐?"
"관심 없어."
"에이, 맨날 말은 그렇게 하면서 검술 수련은 나보다도 열심히 하면서. 쟤는 하여튼 솔직하지가 못하다니까."
엘리카는 혀를 차고서 나무를 패던 걸 그만두고 도끼를 바닥에 던졌다.
"야, 어디가?"
"물 마시러."
그녀는 두 사람을 두고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혼자서 숲길을 걷고 있는데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저멀리 보이는 형체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웬 남자가 나신으로 숲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쓰러져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