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주 암살 (2)
현장에 가까워지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이미 전투가 마무리된 듯한 광경이었다.
쓰러져있는 여인과 그 앞에 서있는 남자, 주위에 서있는 이들과 죽어있는 시체들.
나는 그중에 남자의 레벨을 확인하고서 미간을 좁혔다.
【Lv. 90】
90레벨.
보자마자 곧바로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플라베로스 마탑주?'
저만한 레벨에, 마탑이 위치한 도시의 바로 근처에 있는 인물이라면 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외관 또한 알고 있는 특징과 일치했다.
진짜 플라베로스의 마탑주인가? 지금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확신은 하지 못했지만 비행 속도를 높였다.
만약 정말로 놈이 마탑주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으니까.
"저곳으로 내려간다."
곧 그들이 위치한 바로 위쪽의 허공까지 도달했다.
나는 거리낄 것 없이 안장에서 일어나 띠용이의 등을 박찼다.
띠용이를 타고 착지하다가 공격이 날아오면 녀석이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엇······."
설마 그대로 뛰어내릴 줄은 몰랐는지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에 당황 섞인 아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슈아아악!
땅이 가까워졌을 때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지면에 사뿐히 발을 디뎠다.
시선을 들고 얼마 떨어진 앞쪽을 바라보자 여인과 남자가 경악한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7······ 군주?"
마탑주로 추정되는 남자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나는 그와 정체를 모르겠는 여인을 번갈아 보다가 위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크오오!
거대한 포효성과 함께 띠용이가 빙글 방향을 트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 점 하나가 순식간에 아래까지 가까워져선 굉음과 함께 지면에 착지했다. 아셸이었다.
그녀가 태연하게 옆으로 다가와서 섰고, 뒤따라서 띠용이도 바로 근처에 착지했다.
나는 다시 마탑주와 여인,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플라베로스의 마탑주."
내가 그렇게 입을 열자 남자가 움찔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 반응에 나는 놈이 마탑주가 맞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우연이야?'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던 놈을 도시에 들어가기도 전에 곧바로 마주친 것이다.
나는 의문과 황당함을 느끼면서 상황을 추측해봤다.
펼쳐진 광경만 보면 아무래도 저 여인이 마탑주에게 쫓기다가 끝내 붙잡힌 것 같은 모양새인데······.
"칼데릭의 7군주가 맞군."
다시 마탑주의 입이 열렸다. 그도 내 정체를 확신한 듯했다.
나는 쓰러져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에 넋을 놓고 있던 여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입을 열지 못했다.
마탑주가 의아한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이라고? 한데 왜······."
그 중얼거림을 듣고서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스쳤다.
나는 설마 하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마탑에 있던 정보원인가?"
여인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짐작대로 그녀의 정체는 대군주가 보낸 정보원이었다.
그럼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정체를 끝까지 못 숨기고 들키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마탑 측 전력에 쫓기고 있던 거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그제야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혀 의도치 않게, 이곳에 찾아온 목적대로 조용히 마탑주를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알아서 차려진 것이었으니까.
나는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현재 이 근방의 숲에 있는 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마탑주와 수하 몇몇이 전부였다.
'여기서 바로 처리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절호의 기회.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
기류를 읽었는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있던 마탑주도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서 날카로운 살기를 뿜어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나?"
"······."
"어째서지? 실험 때문이냐? 이것도 대군주의 의지인가?"
놈은 궁금한 게 많은 듯했지만, 그 질문에 굳이 답해줄 이유는 없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아셸."
"예."
"한번 상대해보겠느냐."
아셸이 나를 돌아봤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단지 그녀에게 성장한 전력을 시험해볼 기회를 주기 위함은 아니었다.
나는 마탑주를 바라봤다.
마탑주의 몸 주위에는 반투명한 초록빛의 역장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놈이 진작 펼쳐두고 있던 방어 마법이었다.
'하여튼 마법사들이 까다롭다니까.'
즉살 능력의 거의 유일한 카운터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방어막이었다.
저렇게 방어막을 두르고 있어서야 혈술이든 공간 도약이든 나 혼자 힘으로만 놈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아셸이 놈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중간에 적당히 틈을 봐서 개입하면 되리라.
아니면 아셸 혼자서도 가능하겠다 싶으면 굳이 끼어들 필요도 없고. 그때는 놈의 도주만 막으면 된다.
"제압할 필요는 없다. 전력을 다해서 죽여라."
스르릉.
검을 뽑아든 아셸이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섰다.
마탑주가 한껏 불쾌한 기색으로 날 노려봤다.
"날 어지간히도 우습게 봤군, 7군주. 직접 나서지 않고 무슨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화아악.
아셸은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려는 듯 곧바로 종족 특질을 사용했다. 그녀의 전신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탑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스힐의 회담에서 창성과 결투를 벌였다는 백월족이 너였구나!"
아셸의 존재는 이미 세인테아에서도 어느 정도 퍼진 모양이었다.
마탑주도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바로 앞쪽에 쓰러져있는 정보원에게 뻗어진 그의 손에서 시퍼런 스파크가 파직거렸다.
그녀부터 처리하고 전투에 나서려는 기색이 만연한 모습에 나는 공간 도약을 펼쳤다.
사납게 몰아친 전격이 부동 장막에 막혀 소멸되었다.
"······!"
마탑주는 더 이쪽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황급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도약한 아셸이 그를 향해서 검기를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콰과광!
나는 시작된 전투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쓰러져있는 정보원을 살폈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였기에 품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일단 치료하거라."
"······예, 예. 감사합니다, 7군주님."
그녀는 황송하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포션을 받아들고 중한 상처에부터 부었다.
한쪽에는 반쯤 패닉에 빠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마탑주의 수하들이 보였다.
"부질없이 목숨을 내버리고 싶다면 도망치거라."
그들은 내 경고에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셸과 마탑주, 두 사람의 전투가 점점 격화되며 주위가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화아아악!
마탑주의 마력이 사방으로 요동치며 마법이 펼쳐졌다. 거대한 불기둥 여럿이 연달아 회오리처럼 솟아올랐다.
작은 마을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어마무시한 위력.
아셸은 그 재앙적인 불기둥 세례에서 신속히 빠져나와 검기를 날렸다. 마탑주도 녹빛의 마력 광선을 쐈다. 두 거대한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기운의 여파가 내가 서있는 자리까지 치달아올 정도였기에 나는 장막을 펼쳐 막았다.
'······아셸이 좀 더 우위에 있나?'
그래도 아셸은 90레벨에 도달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마탑주가 노련함으로 좀 더 우위를 점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전투의 양상은 반대로 아셸이 마탑주를 몰아붙이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같은 레벨이더라도 그 안에서 미미한 수준 차이는 존재할 테니, 아셸이 마탑주보다 도달한 경지가 좀 더 높은 건가?
혹은 단순히 그녀가 마탑주보다 전투에 더 능숙한 것일 수도 았었다. 그도 아니면 그저 상성이 우연히 더 유리했거나.
"크으······!"
이리저리 허공을 비행하는 마탑주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셸을 떨쳐내지 못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불안정하게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아셸과 마탑주의 마력이 서로 얽히고 충돌하며 밤하늘의 어둠에 오색의 광채들이 번쩍였다.
마탑주가 펼치는 마법들은 다양했다. 가시덩굴 같은 마력 고리를 그물처럼 퍼뜨리기도 했고, 허공에 퍼진 문양들이 폭발하듯 역장을 퍼뜨리거나 응축하며 시간차 공격을 날리기도 했다.
아셸은 그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마법 공세를 전부 뚫어내고 계속해서 마탑주가 펼치고 있는 방어막을 타격했다.
마탑주는 바쁘게 마법들을 펼치며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도 소모되는 방어막을 계속 재생하며 유지시켰지만, 결국 그럴 틈도 없이 한 번에 뚫린다면 그 순간이 놈의 최후였다.
물론 아셸도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마탑주보다는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안 나서도 되려나?'
어차피 방어막이 깨지면 아셸이 곧바로 마무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당장 내가 끼어들 틈은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놓지 않고 전투를 지켜봤다.
마족 연구까지 행하던 놈이 어떤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쩌어엉!
끝내 아셸의 검격에 마탑주의 방어막이 산산히 박살났다.
기겁하며 물러선 놈이 태세를 정비하려고 했지만 순순히 겨를을 줄 리가 없었다. 순간 놈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
순백의 광채가 빚어진 아셸의 검이 마탑주의 목을 빛살처럼 베고 지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셸이 바닥에 착지하고, 뒤이어 머리와 몸이 분리된 시체가 허공에서 투둑 떨어졌다.
그녀가 한껏 거칠어진 호흡을 잠시 고르고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검집에 회수했다.
"아······."
여전히 주저앉아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던 정보원도 멍한 얼굴로 자그마한 탄성을 흘렸다.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아셸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네.'
아셸이 승리하더라도 좀 더 고전할 줄 알았는데, 결투는 한순간에 간단히 끝나버렸다. 그것도 부상 하나 없이 완벽한 승리로.
기대보다도 훨씬 더한 그녀의 성장에 약간의 뿌듯함과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수고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수고를 건네고서 나는 마탑주의 시체를 확인했다.
뭘 더 살펴보고 할 것도 없이 목이 떨어졌으니 그대로 즉사한 모습. 망자가 되어 더 이상 레벨도 보이지 않았다.
놈이 확실히 죽었음을 확인한 나는 그만 긴장을 풀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인가?'
미래에서, 플라베로스 마탑주는 단순히 마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뿐만 아니라 마족과 계약까지 행한 빌런으로 등장했었다.
그것도 보통 어중이떠중이 마족이 아니라 마족 진영의 최고 수뇌부인 '원마' 중 하나와 말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도 마족의 힘을 발휘해서 끝까지 발악했었지.'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걸 보니 지금 시점에서는 마족과의 계약까지는 아직이었나 싶었다.
어쨌든 이걸로 마탑주를 죽였으니 대군주가 맡긴 일은 끝이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쉽게, 그리고 무사히 끝났기에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남은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려는 순간이었다.
슈우우우.
"······?"
나는 흠칫 놀라서 도로 시선을 돌렸다.
마탑주의 시체에서 갑작스레 칠흑의 기운이 피어올라 허공에 뭉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