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주 암살 (1)
설마 들킬 줄은 몰랐기에 나는 순간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책들이 꽃힌 틈 사이로 이쪽을 차갑게 올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본녀라고?'
방금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왕족이나 황족이 스스로를 칭할 때나 쓰는 호칭이잖아?
적막 속, 나는 여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7황녀 아르미아.'
황제 그란디오스의 핏줄, 세인테아 황실의 7번째 황녀.
그것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왜냐면 황제의 자식들 중 지금 시점에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을 여인이라면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메인 스토리상에서 황제의 자식들 중에선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참 공교로운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그래서 어떡하지?
아무래도 날 암살자로 오해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상황이 상당히 곤란해졌다.
공간 도약으로 창문 앞까지 이동한 다음에 바로 탈출해야 되나? 이래서야 어떻게 해도 소란을 피하기가 어려운데······.
"이미 들켰다고 했지 않느냐. 계속 그리 몸을 숨기고 있을 셈이라면······."
내가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자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별 수 없이 바로 1층의 창문 쪽으로 공간 도약을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
그때 먼저 창문 쪽에서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덜컥!
이건 또 뭔가 싶은데 갑작스레 창문이 열리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들어왔다.
7황녀도 움찔 놀라서 새롭게 난입한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Lv. 53】
곧바로 검을 뽑아든 로브의 인물이 7황녀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쟤는 또 뭐야?'
이번엔 진짜 암살자야?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린 황녀가 마법을 펼쳤다. 푸른빛의 마탄들이 암살자를 향해 다발로 쏘아졌다.
콰과광!
빗나간 마탄들이 굉음과 함께 도서관의 벽을 무너뜨렸다.
가볍게 공격을 피한 암살자가 순식간에 황녀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황녀가 방어막을 펼쳤지만 암살자의 검격에 단번에 박살났다. 충격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졌다.
"으······!"
암살자의 검이 그대로 황녀의 목으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둘 사이로 순간이동한 뒤 부동 장막을 펼쳐 공격을 막아주었다.
암살자의 복면 위로 보이는 눈이 크게 뜨였다. 놈이 놀란 기색으로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장막을 거둔 뒤 곧바로 혈술을 펼쳐 핏물을 쏘아냈다. 놈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즉사했다.
"······."
바닥에 쓰러진 암살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황녀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나는 시선을 거두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도서관 주위로 몰려드는 기척이 느껴졌기에.
"잠깐만······."
황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서 서둘러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
도서관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소란을 듣고 몰려온 경비병들과 몇몇 교직원들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7황녀 아르미아와 죽어있는 암살자를 발견하고서 깜짝 놀라서 가까이 다가왔다.
아르미아는 그런 그들을 쳐다보다가 도로 시선을 옮겼다.
2층에 숨어있던 의문의 인물.
당연히 암살자라고 생각했던 그는 돌연 등장한 또 다른 암살자의 습격을 막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에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증발하듯 모습을 감춰버렸다.
"······영문을 알 수가 없구나."
도대체 누구였던 거지?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열린 창문 사이로 달빛만이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
무사히 아카데미를 빠져나온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진짜 별일이 다 생기네.'
뜬금없이 7황녀를 마주친 것도 모자라, 그녀가 암습당하는 현장까지 보게 될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구한 건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눈앞에서 암살자한테 죽기 직전인데 그걸 두고만 보고 있는 것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7황녀는 메인 스토리상에서 굳이 따지면 아군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기에, 헛짓을 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볼일은 전부 끝났기에 곧바로 도시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날이 밝고 떠나도 별 문제는 없겠지만 이미 아카데미 내에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을 테니, 괜히 찝찝했기 때문이다.
아셸과 함께 신속히 도시에서 빠져나와서 띠용이를 두고 온 장소로 이동했다.
숲 한가운데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있던 녀석이 나를 보고서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잠시 쉬고 바로 출발한다."
"예."
동이 틀 때까지 잠깐만 눈을 붙였다가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나는 띠용이의 몸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날이 밝고 우리는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플라베로스 마탑이 위치한 가드렛 시.
아쉽게도 전부 허탕만 쳤지만 어쨌든 신비 찾기가 끝났으니, 이제 대군주가 맡긴 마탑주 암살을 해결해야 될 차례였다.
'그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플라베로스의 마탑주, 안크 가인데라.
몇 년 뒤 시점의 놈의 레벨은 90이었으니, 지금은 그와 동일하거나 더 낮을 것이었다. 아마 동일하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단순히 죽이는 건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90레벨, 하필 방어막 때문에 까다로울 수 있는 마법사라고는 해도 내 전력에는 아셸도 있었으니까.
이제 아셸도 90레벨까지 성장했으니 그녀까지 전투에 가세한다면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죽이면 장땡인 문제가 아니라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암살해야 한다. 곤란한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래도 계획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대군주가 건네준 정보에는 마탑주의 대략적인 생활 패턴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탑 안에 있는 놈을 죽이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러니 마탑주가 마탑 바깥으로 나올 때를 노려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아예 도시 밖으로 나오면 더 좋고.
때문에 일단은 그쪽 마탑에 잠입해있다는 정보원과 접촉해봐야 할 것이었다.
마탑주의 위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해받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가 문제네.'
놈이 언제쯤 마탑 밖으로 나올지를 모르니 어쩌면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계승자를 찾는 문제도 계속 늦어지면 곤란했기에 나는 최대한 빠르게 이번 일을 끝마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가드렛은 세인테아 서부에 위치한 도시였기에 이곳에서부터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그렇게 제법 긴 시간이 흐른 뒤, 쉬지 않고 이동한 끝에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저기 보이는군.'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가드렛 시를 바라봤다.
플라베로스 마탑은 멀리서부터 도시와 함께 그 형체가 보일 정도로, 도시 한가운데에 거대하게 솟아있었다.
이번에도 띠용이는 근처에 놔두고 도시로 들어가야 했기에 비행 속도를 낮추려고 할 때였다.
"······?"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 전투의 기척이다.
'뭐지?'
이런 한밤중에 무슨 소란일까.
그냥 무시해도 됐지만 호기심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초감각을 끌어올린 채 그곳으로 띠용이의 방향을 틀었다.
***
어두운 숲을 밝히는 마력광들.
한 여인과 그를 뒤쫓는 추격자들이 숲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여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한가득 뒤집어쓴 핏물은 반은 그녀가 죽인 추격자들의 것이기도 했지만 나머지 반은 스스로의 것이었다.
콰아아앙!
옆으로 몸을 튼 여인이 다시금 후방에서 날아든 전격을 피했다. 충격파에 지면이 폭발하고 주위 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금방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로도 그녀는 사정없이 몰아치는 마법들을 간신히 피하며 용케 도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추격자들을 힐끗 돌아봤다.
여인의 이름은 세룬.
대군주의 명을 받고 세인테아의 플라베로스 마탑에 오랫동안 첩자로 잠입해있던 칼데릭의 정보원이었다.
현재 그녀가 쫓기고 있는 이유는 최근에 마탑주가 비밀스럽게 행하는 마족 연구에 대한 정보를 캐낸 것이 원인이었다.
실책은 하나였다.
마탑주, 안크 가인데라와 그의 최측근들을 과소평가했던 것.
그들은 상정했던 것 이상으로 눈치가 빠르고 치밀했다. 그래서 끝내 의심을 피하지 못했다.
지난 몇 년간 충실한 조수로서 그들을 주위에서 보필하며 큰 신임을 얻었다고 확신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자그맣기 그지없는 꼬투리 하나가 잡혀 정체가 탄로나고, 이렇게 위기에 내몰렸다.
하지만 세룬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닳고 닳은 노련한 정보원이었기에 낌새를 눈치채는 게 아주 늦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직 마탑주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지금 뒤를 쫓아오고 있는 추격자들만 어떻게든 해결하면 탈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셋, 다섯, 아홉······.'
머릿수가 더 붙지는 않았나.
뒤쫓는 추격자들의 수를 다시금 확인한 그녀는 호흡을 최대한 고르고서 전투를 준비했다.
계속 도주만 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따돌리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여기서 완전히 뿌리쳐야만 했다.
파악!
기습적으로 방향을 튼 세룬의 신형이 가장 가까이 접근해있던 추격자를 향해 섬전처럼 쏘아졌다.
그 기습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 명의 목이 날아갔다. 주위의 다른 추격자들이 놀라며 마법을 준비했다.
콰과과광!
세룬은 한계까지 치달린 몸으로 마력을 쥐어짜냈다. 집중 포화를 뚫고 추격자 둘의 목을 더 베는 데 성공했다. 남은 건 여섯.
잠시도 쉴 틈 없이 측면에서 쏘아진 화염포를 피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마법이 펼쳐졌다. 한 점으로 응축된 마력이 실선의 형태로 쏘아져 방어막을 뚫고 추격자 하나를 더 절명시켰다.
'······조금만 더!'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나간 동료들에 남은 추격자들은 태세를 채 정비하지 못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룬이 한 줌 남은 체력과 마력을 모두 불태워 승부수를 띄우려고 할 때였다.
쩌어엉!
갑작스럽게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그녀는 고통 섞인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 쾅 무릎을 꿇었다.
간신히 고개만 들고서 하늘을 올려다본 그녀의 눈에 경악과 좌절이 뒤섞였다.
어느새 허공 높은 곳에 나타나서 이쪽을 향해 유유히 내려서고 있는 중년의 남성.
플라베로스의 마탑주, 안크 가인데라.
그의 등장에 추격자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쯧······."
이내 땅에 내려선 마탑주가 한심하다는 듯 그런 추격자들을 둘러보고는, 세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쥐새끼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게 네년이었을 줄은 몰랐구나, 세룬."
걸음을 옮겨 슬쩍 허리를 굽힌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디서 왔느냐? 칼데릭? 당연히 대군주가 보냈겠지?"
세룬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빨리, 마탑주가 직접 나선 이상에야 다 끝난 것이었으니까. 더 이상의 발악은 무엇도 부질없었다.
'몸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마력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인 자결까지 불가능하게 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묵뿐이었다.
마탑주가 그런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군주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참 궁금하구나. 설마 권성처럼 나까지 처리하기라도 하겠다더냐?"
"······."
"아니지. 아무리 대군주라도 그렇게까지 막 나갈 수는 없겠지, 큭큭. 뭐, 정보는 이미 전해진 모양이다만 아무렴 상관없다."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은 마탑주가 그녀의 턱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아무튼 대군주가 보낸 거라면 입을 열기는 힘들겠구나. 네년은 실험의 재료로라도 요긴하게 쓰도록 하마. 그러니 곱게 죽을 생각은 버리거라."
실험의 재료.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세룬의 얼굴에 참담함이 들어찼다.
다시 한 번 조소를 흘린 마탑주가 추격자들에게 명령하려던 순간이었다.
"······?"
멀리서부터 흐릿하게 들려오는 파공음에 그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미간을 좁혔다.
검고 거대한 무언가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이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랙 와이번?'
가공할 속도로 바로 머리 위의 허공까지 도달한 와이번에게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마탑주, 세룬, 그리고 추격자들의 시선이 그 무언가에게로 일제히 모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사람이었다.
슈우우우!
아래로 추락하다가 중간쯤에 불현듯 사라진 그것의 모습이 순간이동하듯 돌연 땅바닥에 나타났다.
그 정체는 젊은 인간 남성.
더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두 사람을 응시했다. 형형한 황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세룬의 눈이 찢어져라 크게 뜨였고, 마탑주의 표정도 서서히 경악과 불신으로 물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7······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