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수고 (3)
던전을 빠져나온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위에 서있던 아셸과 띠용이가 내가 나온 것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출발하자."
"예."
신비는 놓치고, 별 귀찮은 일에만 엮이고.
이번엔 정말 제대로 헛수고만 했다.
나는 아셸과 함께 띠용이의 위에 올라타며 다음 목적지에 대해 생각했다.
세인테아 동부 최대의 대도시, 라피드.
그 도시에 위치한 세인테아의 유서 깊은 인재 양성 기관인 '엘폰 아카데미'.
다음으로 찾아야 할 신비는 다름이 아닌 바로 그 엘폰 아카데미의 공용 도서관에 숨겨져있었다.
지금껏 찾아다녔던 장소들처럼 신비는 인적 드문 대자연 속에 있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아주 드물게 예외도 있는 법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지금까지 찾아온 신비들 중에 가장 애매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
슈우우우!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거대한 도시를 바라보며 아래의 숲에 내려섰다.
띠용이는 도시 근처에 위치한 숲에 두고 라파드 시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조용히 신비만 얻고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도시까지 와이번을 끌고 들어가서 사방팔방 주목을 끌 수는 없었으니까.
"금방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사람들 눈은 최대한 피하고, 혹시 마주치더라도 공격하지 말고."
그르릉.
녀석은 칭얼거리듯 날개를 파닥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숲 한가운데에서 어차피 사람을 마주칠 일이야 거의 없을 테니 무슨 일이 나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띠용이를 놔둔 채 숲을 빠져나온 나와 아셸은 가도를 타고서 도시로 향했다.
'음.'
별 문제없이 성문을 통과하고서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주위를 슬슬 둘러보면서 대로를 걸었다.
세인테아 동부 최대의 도시인 만큼 거리는 수많은 행인들로 수선하고 번잡했다.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어딘가의 제복처럼 비슷한 차림을 하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어라, 허밀 조교수님. 간만에 외출을 다하셨네요? 휴가라도 받으셨어요?"
"휴가는 무슨······ 테이지 교수님께서 또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셔서 말이야. 필요한 재료 구하려 상점에 가는 길이지, 뭐."
피곤에 찌든 눈으로 지나가다 마주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남자.
나는 곁을 지나쳐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저멀리 건물들 너머 도시 한가운데에 반쯤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바라봤다.
성이나 궁전과는 언뜻 다른 형태의, 마치 학교와 비스무레하게 보이는 건물.
'엘폰 아카데미.'
저것이 바로 이곳 도시에 위치한 세인테아의 아카데미였다.
여느 판타지에서 종종 등장하듯 아카데미란 현실의 학교처럼 학생들을 교육하는 기관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가르치는 과목이 검술이나 마법 등으로 다르다 뿐일까. 여긴 판타지 세계니까 말이다.
라사의 설정에서 아카데미는 세인테아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기관으로, 사실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는 큰 비중은 없는 존재였다.
자잘한 서브 퀘스트들을 제외하고 엘폰 아카데미와 관련된 에피소드라고 해봐야 그리 분량이 많지도 않았으니.
어쨌든 내 목적은 바로 저 아카데미 내에 위치한 공용 도서관에 숨어있는 신비를 찾는 것이었다.
'일단 좀 살펴봐야겠네.'
우선 적당히 여관을 잡고서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며,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카데미의 대략적인 내부 구조에 대한 정보를 다시금 상기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완전한 어둠이 가라앉은 밤.
홀로 거리로 나온 나는 주위 눈을 피해서 걸으며 아카데미의 바로 근처까지 이동했다.
지금 내가 이동한 곳은 아카데미의 서쪽 담벼락이었다.
공용 도서관이 위치한 장소가 바로 아카데미의 서쪽의 외곽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내부에는 여러 도서관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 공용 도서관은 아카데미의 관계자라면 별 조건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도서관이었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하지 않았기에 지금부터 그 안으로 몰래 들어가야 하는 내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만약 신비가 아카데미의 더 깊은 곳에 숨겨져있었다면 애초에 얻을 생각도 않고 그냥 포기했을 것이었다.
외곽이 아니라 깊은 곳까지는 잠입하기도 힘들 테고, 까딱 잘못해서 들키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이 정도는 큰 리스크 없이 한번 시도해볼 만하지.'
아카데미는 사방이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내부 풍경과 구조를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성벽처럼 드높은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현재 내가 위치한 방향의 담벼락 주위, 외곽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기척이 몇몇 느껴졌다.
느껴지는 마력이 미약한 걸로 봐서 경비병일 것이다.
그들의 위치를 모두 확인한 다음 바로 위쪽의 허공으로 공간 도약을 연달아서 펼쳤다.
어두운 밤이라 어지간히 재수가 없지 않고서야 내 모습이 들킬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늘 높이 떠오른 나는 부동 장막으로 몸을 고정한 채 담벼락 너머의 아카데미 내부를 훑어봤다.
축구장 수십 개는 합친 만큼 광활한 부지, 중앙의 거대한 본관을 중심으로 펼쳐져있는 수많은 건물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서쪽의 공용 도서관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아카데미 내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인 공용 도서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
마땅치 않다 싶으면 오늘은 살펴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이거 지금이 좋은 타이밍 아닌가?
도로 땅으로 내려온 나는 다시 한 번 내부의 기척을 살피고 담벼락 위로 순간이동했다. 자세를 낮추고 아래를 살폈다.
공용 도서관까지 접근하는 데에 별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부지가 워낙 넓기도 했고, 초감각으로 주위 기척은 모조리 살필 수 있는 데다가 공간 도약도 있었으니.
과감히 아카데미 내부로 진입한 나는 기척들을 최대한 멀리 피해서 건물들 사이로 움직였다.
아카데미 잠입이라,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진짜 별짓을 다 해본다 싶었다.
그렇게 무사히 공용 도서관 바로 근처까지 이동해서 건물에 몸을 숨긴 채 도서관을 바라봤다.
공용 도서관은 2층으로 이루어지 건물로 1층에만 창문이 있었다.
'사서인가?'
닫혀있는 유리창 사이로 도서관 입구 부근에 앉아있는 남성이 보였다. 아무래도 사서인 듯했다.
그 외에 도서관 내부에 딱히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이제부터 은밀하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가, 신비를 찾아내고 나오기만 하면 된다.
마침 사서도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게 슬쩍 정문을 열고 들어가도 모를 듯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신중을 기하는 편이 좋았기에 창문으로 출입하기로 했다.
공간 도약은 중간에 장애물이 있으면 펼칠 수 없기에 닫혀있는 창문 너머로는 순간이동할 수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주위의 기척을 살핀 뒤 도서관의 창문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각도상 사서의 시야가 닿지 않는 창이었다.
창을 슬쩍 당겨보니 당겨지는 게 잠기지는 않은 듯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창문을 열고서 곧바로 안쪽으로 순간이동했다.
'됐다.'
무사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사서를 확인한 뒤, 창문을 도로 닫고 거리낄 것 없이 책장들을 지나쳐 2층으로 향했다.
신비가 숨겨져있는 곳은 2층의 책장, 그중에 역사와 관련한 고서들이 모여있는 책장이었다.
2층은 1층보다 공간이 훨씬 좁고, 구석 쪽에 박혀있는 위치를 기억하고 있기도 했기에 금세 구분해서 찾을 수 있었다.
거의 방치하다시피 먼지가 쌓여있는 책들을 둘러보며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이 책장이 맞는 것 같은데······.'
찾기는 찾았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가 있었다.
신비의 문양이 있는 장소가 바로 이 책장에 가려진 뒤쪽의 벽면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책장을 움직여서 벽면에서 떨어뜨려야 신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혼자서 어떻게 드냐.'
크기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책장이었다. 내 키보다 훨씬 높고, 너비도 양팔을 벌린 것의 배는 되는.
끌어서 벽면에서 조금 떨어뜨리는 거야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소음이 문제였다.
결국 바닥에 끄는 건 안 되고, 조금이라도 들어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 번 책장을 잡고 힘을 줘서 가늠을 해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러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조심히 빼내서 바닥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빈 책장이면 조금 들어올리는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진짜 별짓을 다하네.
꽤 시간이 지나서야 책장의 책들을 모두 빼냈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들어보자 그제서야 드는 데 성공했다.
조심히 책장의 한쪽을 살짝 들어올려서 벽면에서 떨어뜨린 뒤, 나는 벌어진 안쪽의 틈을 들여다봤다.
이 벽면에 바로 내가 찾던 신비의 문양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은 채. 하지만······.
"······."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수북한 먼지만이 있을 뿐.
틈새를 다시 한 번 샅샅이 훑어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이건 왜 또 없는 거야?
혹시 책장을 착각했나 싶어 다시 한 번 주위의 책장들을 살펴봤지만, 분명히 이 위치가 맞았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설마 이번에도 누가 한 발 먼저 신비를 발견해버린 건가 싶었지만······ 그러려나?
만약 다른 이가 먼저 발견했다면 나처럼 책장을 움직여서 뒤쪽 벽면을 확인했다는 건데, 아무리 내 행동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해도 나보다도 누가 먼저 이런 짓을 했다고? 도서관에서?
'······아니면 타이밍이 안 맞았나.'
어쩌면 아직 신비가 생성되기 전일 수도 있었다.
지금부터 게임 플레이 시점 미래까지 사이에 신비가 생성된 거라면, 지금은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뭐가 됐든 확실한 건 이번에도 쓸데없는 헛수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2개 전부 연이어 허탕이라니······ 어이가 없어져서 실소가 나왔다.
'진짜 운도 더럽게 없네.'
신비 운은 칼데릭에서 찾을 때 다 쓰기라도 했나?
칼데릭에서의 신비 찾기는 모두 성공했는데 세인테아에서는 죄다 실패라니.
조금 허망한 마음이 들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괜히 책장의 틈새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가, 몸을 돌렸다.
나중에라도 다시 기회가 되면 찾아와서 확인해보는 수밖에.
빼낸 책들은 굳이 정리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대로 놔두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볼일이 전부 끝났으니 이제 다시 창문으로 나가서 도서관 밖으로 빠져나가려는데······.
"······!"
나는 재빨리 계단에서 물러서 근처의 책장 뒤에 숨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도서관의 정문과 바로 마주한 위치에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Lv. 46】
'······학생?'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인물은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 이였다.
금발에 금안, 그리고 묘하게 고아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여인.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사서가 퍼뜩 깨어나서 그녀를 바라봤다가, 시간을 확인하고서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출입을 금해야 하는 시간입니다만······."
그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한 투로 말했다.
"오늘도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10시가 되기 전까지는 퇴실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여기 스페어 키니까 내일 제때 반납해주십시오."
그리고 사서는 1층의 창문들이 모두 닫힌 걸 확인한 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여인은 이내 한 책장 앞으로 다가가서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2층 책장 사이에 몸을 숨긴 나는 독서에 열중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또 뭐냐, 진짜······.'
하필 계단 근처에 위치한 책장에 서있었기에 아래로 몰래 내려가기도 애매하게 됐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냥 좀 기다리기로 했다. 10시가 되기 전까지는 나간다는 것 같으니.
사락. 사락.
고요한 정적 속, 책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만이 도서관 내부에 울려퍼졌다.
여인이 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얌전히 소리를 죽인 채 있을 때였다.
"거기, 2층의 쥐새끼."
갑작스레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움찔 놀랐다.
그녀가 천천히 책을 덮고서 2층을 올려다봤다.
"들켰으니 순순히 나오거라. 본녀를 해하기 위해 찾아온 암살자인가?"